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일본군의 필리핀 마닐라 시민 대학살[WW2 Japanese Military Philippine Manila Citizens Massacre]

슈트름게슈쯔 2014. 7. 1. 17:34



태평양 전쟁 말기 마닐라 시내 록사스 불바르지역으로 들어기는 미군 차량 - 1945년 2월 




필리핀 마닐라 록사스 불바르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마군과 M10 울버린 구축전차 - 1945년 2월 




마닐라 시청 의사당 건물 옆에서 일본군의 거점에 포탄을 발사하는 미군 M18 헬캣 구축전차 - 1945년 2월 




마닐라 극동 대학 근처에서 사살된 일본 해군 육전대의 사체- 1945년 2월 




마닐라 시가전 당시 미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스페인 풍으로 지어진 렉트란(Letran) 칼리지 건물의 벽- 1945년 2월 




마닐라 인트라무로스 포트 산티아고 게이트의 미군 M4 셔먼 전차  - 1945년 2월 28일 


16세기의 스페인 사람에 의해 지어진 인트라무로스(Intramuros)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닐라의 유일한 지역이다.





파괴된 마닐라 의회 건물 옆으로 진군하는 미 제 148 보병연대 C중대 병사들 - 1945년 2월 




파괴된 마닐라 체신부 건물 옆을 지나는 미 제 145보병연대 F 중대 병사들 - 1945년 2월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필리핀 마닐라시의 남성과 여성및 어린이의 사체  




필리핀 마닐라 에르미타 지역에서 벽에 일렬로 세운뒤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시민들의 사체 - 1945년 2월  



2차 세계 대전 말기 1945년 2월에 필리핀에서 퇴각하던 

일본군은 필리핀 마닐라 시의 민간인들에게 약탈, 강간및 학살을 자행한다.

  이 학살에 따른 희생자 수는 약 10만 명에 달한다. 

이 사건은 미군 약 1,000명과 일본군 약 16,000 명이 전사한 마닐라 전투 중 발생한 최악의 사건이었다. 

현재까지 일본의 우익은 당시 미국 측의 군사 행위에 사건의 원인이 있다거나, 

미국측 폭격에 의한 희생자 수도 많다고 주장하며 

일본군이 필리핀인들을 대량 학살시킨 사실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려 애쓰고 있다.




전쟁터가 되어 버린 마닐라 시내의 끔찍한 살륙 현장을 피해 달아나는 시민들 - 1945년 2월




자동차를 이용하여 마닐라 시내를 순찰하는 필리핀 블루 이글 유격대 대원들과 미군 M4 셔먼전차 - 1945년 3월 







1899년 미서전쟁(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미국은 자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대해 필리핀 독립법을 발표하고 표면적인 독립을 약속한다.

이후  1935년 11월에 필리핀 임시정부가 발족되여 마누엘 케손이 대통령에 취임하게된다.

글러나 태평양 전쟁 발발로 1942년에 일본에 의해 수도 마닐라가 점령되고, 케손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 때문에 많은 필리핀인이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과 함께 일본군에 저항했다. 

필리핀인의 무장조직은 미국 육군의 지도나 지휘를 받거나 

자생적으로 발생한 항일 조직이었고, 지형과 지리에 밝아 일본군을 괴롭혔다. 

 1944년 10월, 레이테 해전에서 패한 일본군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력을 결정적으로 상실하게 된다. 

1945년 1월에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2월 3일에 미국 1 기병사단과 37사단이 마닐라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마닐라를 포기하고 사령부를 바기오로 옮겼다. 

그러나 해군 소장 지휘하의 해군 부대와 육군 부대 일부가 마닐라에 남아 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펼쳤다.  

일본군의 퇴각 당시, 마닐라 시내에는 약 70만 명의 시민이 남아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미국군에 협력적이라고 판단한 일본군은 

미국군에 대한 협조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이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성 파울로 대학에서는 어린이를 포함 994명을 살해, 북부 묘지에서는 2000명을 처형시켰고

 산차고 감옥에서의 집단 살해 등 구체적인 살해 증거는 도쿄 국제 전범 재판에서도 보고됐다. 

 필리핀의 전투는 일본군 잔당을 이끌던 해군 소장의 자결과 미국의 승리 선언으로 끝이 났다.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야마시타는 마닐라 군사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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