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한국전쟁 당시 흥남부두 폭파[Korean War during demolition of Hungnam Harbor]

슈트름게슈쯔 2014. 7. 29. 16:41




흥남항에서 미군의 함선에 적재될 항공유 드럼통 - 1950년 12월 






북한 공산군의 학살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 위해 미 해군의 LST 앞으로 모인 흥남 주민들 - 1950년 12월 19일


 




메러디스호에 승선한 피난민들 - 1950년 12월 24일 








한국전쟁 6.25 동란 당시 흥남철수작전에서 마지막 철수선이 떠난 후 


폭파되는 흥남부두에 화염이 치솟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는 미 해군함 베거호 - 1950년 12월 24일 





한국전쟁 당시 흥남 중국 공산군 거점에 대한 미 해군 전함 미주리의 16인치 함포 포격 - 1950년 12월 26일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은 중공군이 6·25 전쟁에 개입하여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2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사흘 동안에 동부전선에서 고립상태에 놓인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국군을 따라 남하하려는 피난민, 

엄청난 양의 전투 장비와 물자 등을 흥남 항에서 선박 편으로 동해를 거쳐 부산까지 안전하게 철수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중요성과 불가피했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장진호전투’의 개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진호전투는 미 제1해병사단이 1950년 11월 26일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江界) 점령을 시도하던 중에 근처에 숨어있던 

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12만 명)에 포위되어 전멸될 위기를 맞아, 

혹한과 고립의 극한상황에서 12월 13일까지 28일에 걸쳐 간신히 후퇴에 성공한 작전이다.    

   당시 전황은 장진호 서쪽의 160Km 지점에서는 미 제8군단 보병 제2사단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후퇴 중이었다.

이 제8군단 퇴로와 제1해병사단의 포위망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원자폭탄 사용을 허락할 수도 있다는 언질까지 있었다.   

이때는 미군이 점령하였던 평양에서 철수해야 할 국면이 임박한 전황이라 

내륙으로 탈출이 불가능하게 된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서쪽 유담리(柳潭里)에서 

남쪽 하갈우리(下碣隅里)와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는 고토리(古土里)를 빠져나와 

오로리(五老里)를 거쳐 흥남으로 탈출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된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키면서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9병단은 전사 2만 5,000명, 부상 1만 2,5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 해병1사단도 전투 사상자 3,637명 비전투 사상자 3,657명이 발생했는데, 

비전투 사상자 대부분은 동상환자였다. 

해발 1,200m의 산악지형인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는 당시 강풍과 15cm 이상의 적설, 

낮 기온 영하 20℃, 밤 기온 영하 32℃로 체감온도는 영하 40℃를 넘었다.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1950년 12월 6일, 미 제8군이 평양을 내주고 38선으로 철수함에 따라 

흥남 일대에 모여 있는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순식간에 적진에 고립되어 버리자, 

12월 8일 맥아더 사령관은 해상철수를 지시하였다.  

작전을 총지휘한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흥남 항을 통해 아군이 차례대로 철수하는 동안 퇴조항~함흥~동천리를 연결하는 반경 12km에 교두보를 설치하고,

 흥남 앞바다에 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 등을 배치해 

엄청난 포격으로 중공군의 항만 공격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때 함대에서 발사한 5인치 함포만 1만 8,637발이었는데 

이것은 인천상륙작전보다도 70%나 많은 양이었다.   

12월 12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사흘 동안 125척의 수송선단이 진행한 철수작전은 

병력 10만 5,000명, 피난민 9만 8,000명, 차량 1만 8,422대, 

군수물자 35만여 톤을 흥남에서 부산까지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장진호 전투를 치르며 큰 피해를 입고 포위망 탈출에 성공한 

미 제1해병사단이 맨 먼저 승선하면서 철수작전은 시작되었고, 

수송선이 부족해 2회 반복 운항하는 때도 있어서 실지로 작전에 투입된 함선은 193척이 이르렀다.  

철수작전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피난민 문제였다. 

장진호에서 철수하는 미 해병사단의 후미를 놓치지 않고 기를 쓰며 

따라온 피난민들은 부두에서 철수선에 승선하려고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해상철수를 지휘하는 알몬드 소장은 약 3,000명 정도의 피난민을 철수시킨다는 견해이었는데,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결연한 의지로 맞섰다. 

“우리 국군은 걸어서 남하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유를 찾으려는 저 피난민들을 우선 구출해야 합니다.”   

  알몬드 소장은 L-19기를 타고 흥남부두 위를 비행하면서 운집한 수만 명의 피난민이

 마지막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정박 중인 함선을 향해 차가운 바닷물을 헤치면서 필사적으로 접근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참모에게 명령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놔두고 갈 수 없다. 

모두 구출해야 해.”   피란민의 전면철수가 결정되자 한국과 일본의 수송선과 상륙정이 징발되어 올라오고,

 12월 19일부터 민간인들의 승선이 시작되었다.   

12월 20일 저녁, 중공군이 밀어닥치기 직전의 흥남 항에 메러디스호가 입항한다.

 이 배는 미 태평양함대사령부와 계약으로 도쿄에서 항공유를 싣고 

부산에 도착해 하역작업을 하던 도중에 철수작전을 돕기 위해 급히 이동한 화물선이다.  

 메러디스호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캘리포니아 주 LA에서 건조된 

길이 138.7m, 무게 7,600톤의 화물선으로 무어 맥코맥사(Moore McCormack Lines) 소속이다.

 정원은 60명인데, 이미 12명의 사관과 35명의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어 13명의 여유 공간만 있었다.

 여분의 물과 식량은 물론, 구명보트나 구명 장구도 없었고, 탑승자를 위한 화장실 등 위생시설도 전혀 없었다. 

 하역작업 중에 급히 올라왔기 때문에 선내에는 하역하지 못한 300톤가량의 항공유가 남아 있었다.

 연근해 10km 안쪽으로는 북한의 기뢰가 촘촘히 설치돼 있고, 

북한 잠수정도 빈번히 활동하는 상황이었는데, 

기뢰탐지장비도 없고 군사 보안상 무선교신도 차단된 상태의 메러디스호가 피난민을 태우고 

해역을 빠져나가려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12월 20일 메러디스호가 흥남부두에 닻을 내리자 미 제10군단 존 차일즈 대령이 승선했다. 

“우리가 상선에 피란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소. 

당신이 판단하여 얼마를 태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소. 

상급선원과 의논해 결정을 내려 주기 바라오.”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 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의 탑승은 12월 22일 저녁부터 이튿날 오전까지 이어졌으며, 

17명의 부상자와 5명의 만삭 임산부를 포함해 모두 1만 4,000명이 갑판과 화물칸에 한 치의 공간도 없이 탑승했다.

 메러디스호는 2,700톤급 온양호와 함께 철수작전 마지막인 12월 23일 오후에 흥남 항을 떠났다. 

곧 이어 알몬드 소장은 흥남부두에 내려놓은 다량의 무기가 중공군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부두를 폭파시켰다.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남하하는 와중에 음식과 물, 침구, 의약품이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입혀주면서 28시간의 긴 항해 끝에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 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다시 80km를 더 남진해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닿았을 때 

내린 인원은 탑승인원보다 5명이 더 많았다. 

절박한 항해 도중에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던 것이다. 

선상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미군은 ‘김치 원·투·스리·포·파이브’라 불렀는데, 

그중 ‘김치 파이브’였던 이경필(63) 씨는 현재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거제시지회장을 맡고 있다. 

  메러디스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위대한 구조를 한 ‘기적의 배’로 

2004년 9월에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미국 의회가 극히 드물게 주는 ‘용감한 선박상’을 받은 이 배는 그 후 베트남전에도 투입되었다가

 1971년 퇴역했고, 1993년 고철로 매각하기 위해 분해됐다. 

 1914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라루 선장은 민간 화물선을 타고 바다에서 20년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서양에서 군수물자 수송 작전에 참가했고, 

36살이던 1950년 6·25전쟁 초반에 미 태평양함대사령부와 계약으로 

인천~부산~일본을 드나들며 미군의 보급품과 무기를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2월 초에 일본에서 항공유를 싣고 흥남에 있는 연포공항의 미 해병대 항공단까지 수송하는 임무를 맡고 

도쿄를 출항해 흥남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월 8일 유엔군사령부와 미 해병대가 북한지역 전선에서 퇴각을 결정했기 때문에 

연료를 흥남이 아닌 부산에 하역하라는 수정주문을 받고 

부산으로 회항해 하역하던 도중에 흥남철수작전 지원에 투입되었다.  

라루 선장은 피난민 구출공로로 한국 정부의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모든 선원은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1958년)과 미국 정부의 ‘용감한 선박 표창’ ‘상선단 공훈 메달’(1960년)을 받았다.  

 1952년 작전 참가임무가 끝났고 귀국한 라루 선장은 1954년 바다를 떠나 

뉴저지 주 뉴턴 시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가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의 수사로

 2001년 10월 87세로 타계할 때까지 평생을 봉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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