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 중순양함 미쿠마의 침몰[During the battle of Midway the Japanese heavy cruiser Mikuma Sinking]

슈트름게슈쯔 2014. 8. 7. 17:10



노먼 벨 게드스의 일본 중순양함 미쿠마와 모가미에 대한 미 해군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SBD) 편대의 폭격 디오라마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 해군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을 받은후 침몰하는 일본 해군의 중순양함 미쿠마 - 1942년 6월 6일 



1942년 6월 일본 중순양함 모가미와 미쿠마는  미드웨이 작전에도 참가한다.

그러나 6월 5일 퇴각중이던 모가미와 미쿠마가 미군의 잠수함과 접촉 충돌로 

이를 회피하려다 모가미와 미쿠마가 서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때문에 모가미는 1번 주포탑 앞쪽 부분의 함체가 흔적도 없이 날아갔으며

그러한 일이 발생했던 직후

 일본 모가미급 중순양함 미쿠마는 미 항모 호넷(CV-8)과 

엔터프라이즈(CV-6) 에서 발진시킨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SBD)에서

투하시킨 폭탄 공격울 받게 된다.

미 해군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 편대의 공격을 받은 일본 중순양함  모가미는 대파되어 

간신히 트럭 섬으로 귀환한다. 

한편 동형함 미쿠마는 미 해군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에서 투하시킨 폭탄 5발에 명중되었다. 

그 여파로 미쿠마 함내의 산소 어뢰가 폭발하여 다음날 침몰하게 된다.

그것은 개전 이후 일본 해군 항공모함 4척이 침몰한 이후 

더불어 일본 중순양함 1척이 최초로 침몰한 기록이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모가미급 중순양함의 대표적인 순양함인 모가미(最上)는 

야마가타 현의 모가미 강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2번함은 미쿠마(三隈), 3번함은 스즈야(鈴谷), 4번함은 쿠마노(熊野)였다.

그 순양함들 모두는 강의 이름에서 명칭을 따왔다.  

모가미급은 우수한 성능의 일본 해군 중순양함이라고 전해진다. 

이것은 설계상으로 일본 해군의 순양함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기대 만큼의 성능은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모가미급의 준공 당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트러블이 있었고,

 실전에서도 여러가지 문제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일본의 설계사상과도 연관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함선 설계사상은 철저한 거함우월주의였었다. 

거함우월주의 사상에 따라 일본은 중순양함을 무조건 서방의 

중순양함보다 우수한 성능을 가지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과도 연관이 있는데 

그것은 1922년에 발효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1930년에 발효된 런던 군축조약이었다. 

런던조약에 의해서 일본은 12척의 중순양함만 건조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 미국은 18척의 중순양함을 건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일본은 런던 조약의 허점을 이용하였다. 

그것은 여유 배수량이 존재하는 경순양함을 건조하는 것이였다. 

경순양함의 최대 배수량(기준 1만톤 미만) 안에서 6척의 중순양함급 경순양함을 건조하는 계획이었다.

 런던 조약은 경,중 순양함을 구분하는데 있어 주포 구경 6.1인치(155mm)와 8인치(203mm)에만 

차이를 두고 배수량의에는 제한이 없었다. 

그때문에 일본은 조약탈퇴 이전까지는 6.1인치(155mm) 함포를 모가미급에 장착하였고

 탈퇴후 바로 8인치 함포로 바꾸어 장착할 수 있도록 

바벳의 크기를 공용화하는 등의 작업을 건조시부터 진행한다. 

1934년, 일본의 미쳐 돌아가던 군부는 고작 2년을 남겨놓고 조약 파기를 선언하며

 다시 건함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일본은 조약형 경순양함인 모가미급(실제 중순양함)으로 미국, 영국 등을 속이고 

조약 탈퇴후 바로 8인치 함포로 교체하여 중순양함으로 사용하게 된다.

 또한 원래 8인치 함포는 1만톤급 미만에서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힘들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때 일본이 배수량을 속였을 것이라고 대체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의 모가미급은 8인치 함포를 단후 기준 배수량이 12,400톤(만재 15,057톤) 이 넘어가고 있다.

 게다가 8인치 함포를 교체한 후에도 서류상으로 모가미급은 여전히 경순양함이었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도 미군은 모가미급을 6.1인치 함포를 단 경순양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모가미급이 중순양함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후 각국이 모두 일본을 따라서 편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중순양함의 배수량이 1만톤 ~ 2만톤 사이인 호칭으로 변질되었다.

 원래 중순양함과 경순양함이 모두 1만톤 미만이였던 것을 생각하면 조약은 유명무실해진 것이었다. 

모가미급은 당시 일본이 해군 조약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이 예가 되었다. 

역사적인 곡절이 있는 수상함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준 1만톤 이상 2만톤 미만으로 의미가 변질된 중순양함은 현대 순양함의 체급에도 영향을 주었다. 

물론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함 때까지만 해도 

대체적으로 만재 1만톤 내외를 순양함이라 불렀다. 

모가미급과 중순양함, 그리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런던 군축조약, 

현대의 순양함체급은 서로 어느정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일본이 모가미급을 건조하면서 2가지의 일탈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모든 조약을 위반하고 기준 배수량 12,000톤의 중순양함, 경순양함을 건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순양함을 건조했으면서 경순양함이라고 속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큰 문제를 만들어낼 정도로 성능에 집중했다면 능력도 뛰어나고 실전에서도 활약을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와 반대였고 모가미급 중순양함은 미 해군의 먹잇감이었다.  

아무리 경순양함인 척하고 중순양함을 만들었다고 해도, 

일본군 내부에서의 구분도 있기에 일본군의 중순양함보다는 약간 배수량이 적었는데, 

그에 비하면 강력한 무장과 장비, 엔진을 가지고 있는지라 

함체 복원성에 상당한 이상이 생겼다. 

당장 풍랑이라도 만나면 전복돼서 그냥 바다로 침몰하기 십상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제4함대 사건이라는 큰 일을 겪으면서 선체 외판이 뒤틀리는 큰 사고가 난 후,

 추가로 벌지를 부착하면서 배수량을 2,000톤 이상 늘려서 부력을 강화하고

 함체도 강화하면서 겸사겸사 함내 구성도 바꾸면서 어느 정도 보완을 시켰다. 

물론 그 과정에서 37노트의 속도는 35노트로 줄어들었다. 

성능을 늘리기 위해서 당시 일본의 기술력으로는 아직 실험단계였던 

전기용접을 건조시에 대량으로 사용했다.

 전기용접 자체는 기존의 리벳접합식보다 중량을 경감하고 접합도 튼튼하며 

작업속도도 빠르지만, 어설프게 용접하면 안건드린 것만 못한데

 일본의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용접의 단점만 크게 부각된 것이다. 

당장 상정된 최고속도인 37노트를 내려고 하면 함체 전체가 부르르 떨리거나, 

항해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용접면을 포함한 선체 각부에 균열이 발생하는 등 큰 문제가 발생했다. 

역시 이 문제로 인해 다시 도크에 들어가서 벌지를 부착하는 작업과 함께 

균열이 일어난 부위를 교체하고 다시 용접을 실시하게 된다. 

이렇게 모가미급 중순양함에 적용된 전기용접이 사고를 일으키면서,
일본은 야마토급 전함까지 리벳접합을 고집하는 멍청한 짓을 하게 된다. 

3, 4번 주포탑이 종종 선회불능사태가 발생하는 등 사용이 힘들었다.

 이는 선체 중앙부에 한 계단 더 높은 고각포 갑판을 강도 갑판(피칭, 롤링시 인장력을 견디는 갑판)으로 하고

 이 전후단을 3, 4번 주포탑의 바벳에 직결한 구조를 채택한 탓에, 

온도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선체의 신축이 그대로 포탑으로 전해져서 

포탑이 작동하지 못하게 한 것이 이유였다. 

즉 뜨거운 햇빛을 몇 시간 맞으면 그냥 주포탑 2개를 못쓰게 되므로 화력이 격감한다.

 결국 이 문제도 고각포 갑판과 바벳을 분리하는 작업을 실시해서 간신히 해결했다.

 원래부터 중순양함으로 변신을 감안하고 있었으므로 6.1인치의 3연장 주포탑과 

8인치의 2연장 주포탑은 호환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포탑간 간격 조정에 실패했다는 것인데, 

다른 곳은 문제가 없었으나 1번 주포탑과 2번 주포탑간의 간격이 큰 문제였다. 

6.1인치의 기존 주포탑은 선회에 문제가 없었지만, 8인치 주포탑은 

포신을 수평으로 놓은 상태에서는 1번 주포탑에 포신이 걸리면서 선회가 불가능하므로 

선회시마다 포신을 약간 들어올려야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급박한 교전시 포탑을 회전하다가 사고가 발생하기 딱 좋고, 

평시에도 풍랑이 좀 심해진다 싶으면 2번 주포탑의 포신을 약간 들어올리는 예방조치를 취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2번 주포탑의 포신과 1번 주포탑이 충돌하면서 서로 손상을 입게 된다. 

이 문제는 함체 전체를 뜯어고쳐야 하므로 끝까지 해결이 안났다.

그리고 함내에 산소어뢰를 탑재했다. 

이건 일본군의 구축함과 순양함 전체에 대한 문제였다. 

그것은 미 해군의 공격에 의한 사소한 피탄에 어뢰가 유폭하면서

 함 전체에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구축함이면 자신보다 큰 함선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어뢰가 필요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동급의 순양함까지 상대가 가능한 순양함급에 

그러한 위험한 어뢰를 장착하면 재수없게도 구축함등의 소형함선이 

명중탄이라도 맞추면 한방에 폭살당하는 엄청난 위험이 있었다. 

물론 일본군도 나름대로 이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고, 

어뢰 저장고나 발사관을 장갑화하는 등의 조치를 시행했지만, 

그 정도로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후퇴전시 

산소어뢰를 몽땅 바다에 버려버리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 일이 일어나기 쉬웠다. 

이는 실전에서도 나타났는데, 미드웨이 해전에서 후퇴하던 

모가미와 동형함 미쿠마의 경우, 원래는 모가미의 손상이 더 심했으나 

모가미의 장교중 1명이 자기 목을 걸고 남아있던 산소어뢰를 다 바다에 버리는 조치를 취했지만, 미쿠마는 그러지 않았다. 

문제는 그 후에 미군의 공습이 있었다는 것이고, 미쿠마는 상대적으로 추가적인 피탄을 덜 당했지만, 

그 피탄이 산소어뢰에 적중하는 바람에 치명상을 입고 

폐함수준에 가까운 고철로 변해버렸으며, 결국 일본 본토로 

귀환을 하지 못하고 미드웨이 해역에서 바닷속으로 침몰당한다.








photo from : www.history.navy.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