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미 해군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생존자들[WW2 Survivors of USS Heavy cruiser CA-35 Indianapolis]

슈트름게슈쯔 2014. 9. 20. 14:00




태평양전쟁 중반기 미 해군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와 함상 캐터펄트위의 카타리나 정찰 수상 비행정  


- 1942년 4월 19일 캘리포니아 마레섬 조선소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되기 전 미 해군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수병들 




침몰후 구조된 미 해군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생존자들






상어가 득실거리는 해역에서 표류하는 미 해군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수병들 





관섬으로 이송된 인디애나폴리스호의 생존 수병들 - 1945년 8월 








태평양전쟁 당시 미 해군의 중순양함이엇던 인디애나폴리스는 1930년대에 취역한후 

 몇 번의 개장을 받아 화력과 대공지원능력을 향상시켜 오키나와 공격에도 참여했다.

인디애나폴리스는 일본 자살공격대 카미카제 공격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혁혁한 전과를 기록했었다.

 하지만 이런 대형 전투함은 자체 스크류 소음이 크기 때문에 대잠작전 관련 장비는 탑재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로인해 구축함급 이하의 호위함과의  대동 이동이 필수사항이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였던 1945년 7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인디애나폴리스는 

함장 찰스 B. 맥베이 3세 대령의 지휘아래 1196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B-29가 출격대기중인 티니안 섬으로 향했다.

 여기에는 역사를 뒤바꿀 물건인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재료. 고농축 우라늄을 싣고 있었다.

 당시 미 해군은 이 임무를 극비임무로 취급했으며 일본 해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가 단독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맥베이 대령은 호위함을 여러번 요청했으나 지휘부는 이를 묵살시켰다. 

그리고 이 것은 모든 비극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7월 28일 무사히 화물을 실어 날랐던 인디애나폴리스는 

다음 작전을 위해 필리핀 레이테 섬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이미 비밀 준수가 필요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상부에서 호위함을 붙여주지 않아서 단독으로 항해했다. 

그리고 7월 30일 새벽. 일본군 잠수함은 이를 발견하고 어뢰 6발을 발사시켜 

 2발을 명중시키며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킨다. 

침몰에 걸린 시간은 약 12분이었다.

인디앤아폴리스 중순양함의  침몰 직후 함장은 즉시 구조신호를 보내고, 

승무원들에게 퇴함명령을 내려서 폭발 직후 사망한 300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모두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생존자는 900명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빨리 구조가 이루어졌으면 모두가 생존했겠지만 

무려 4일이나 지난 1945년 8월 2일, 정기적으로 정찰을 하는 해군 항공기가 

처음으로 바다위에 떠있는 생존자들을 발견하고 구조를 시작하였고

 그 후 약 이틀간 구축함까지 동원되어 모든 생존자를 건져올린다. 

그래서 남은 최종 생존자는 316명이었다.  

식수와 의약품이 매우 부족한 상태에서 약 5일간  생존자들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바다위에서 탈진한 수병들은 서서히 죽어가거나 환각증세까지 보였다.

수병들이 표류한 그 주변해역은 상어 떼의 출몰지였다.

 상어들은 처음에는 미 해군 수병들의 시체를 노렸고 그 다음에는 주변의 부상자를 노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해군 비행기가 구조하는 도중에 상어가 생존자를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함장 맥베이 대령은 이 순간까지도 구조신호를 계속 보냈고, 조명탄과 

거울까지 동원해 구조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침몰 직후의 구조신호는 근처의 미해군 수신소가 감지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한 수신소는 당직사관이 술에 취해서 곯아 떨어져 잠을 자고 있었다.

다른 수신소에서는 당직사관이 놀고 있느라고 신호자체를 무시했다.

그리고 또 다른 수신소는 일본군의 계략이라고 판단해 구조신호자체를 무시했다. 

 후에 맥베이 함장이 구조된 후 해군 본부에 바다에 떠서 표류하고 있었던

 5일 동안 왜 구조요청이 없었는가를 물어보았으나 해군본부의 대답은 그런 구조신호는 없음이었다. 

때는 일본의 패전이 짙어오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미해군의 함선을 가라앉힐 거라 의심하지 않았던 시기이긴 했다.

그러나 가뭄에 콩싹이나듯이 피해가 발생하긴 했다. 

인디애나폴리스가 침몰하기 6일전 그 해역에서 미 구축함 한척이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으니 확실히 안심하기에는 이른 시기였던 셈이었다.

 그러나 미 해군본부는 함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는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다. 

설상가상으로 7월 31일에 레이테 섬에 도착해야 할 선박이 

제 때 도착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도 않았다.  

이 사건은 미 해군에게도 충격이었지만, 언론에서 특히 법집 쑤신듯 들고 일어났다. 

결국 해군은 책임 떠넘기기 식으로 함장인 맥베이 대령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해당 군사재판이 책임을 떠넘기기가 된 것도 

미해군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약 700척의 군함을 잃었지만 

자신의 함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된 함장은 맥베이 대령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함대 사령관이 태풍으로 인해 함대에 심각한 손실을 끼쳤어도  목이 붙어있는데 

 책임 떠넘기기에 걸맞게 죄목도 "적의 공격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함을 침몰시킨 것"이었다. 

자세히는 중순양함이 어뢰 회피를 위한 지그재그 기동을 하지 않았다는게 이유였다. 

원칙상으로는 맞는 말 같지만, 지그재그 기동을 하게 되면 속도와 항속거리가 크게 줄어드는데다가 

항해시간도 크게 길어지기 때문에 그와 같은 항앵은 

적 잠수함이 매복한 확률이 높은 수역에서나 주로 하게 되며, 

긴급 사태시 배수량만 1만톤이 넘는 중순양함은 갑자기 적 잠수함이 쏜 어뢰를 발견했을 경우 

구축함 같은 작고 잽싼 함선처럼 즉시 지그재그 기동을 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따른다.

 과학성이 부족했던 일본군 같았으면 근성이 없어서 못했다고 했겠지만 

당시에는 충분한 해당분야 경험이 있어야 했으므로 

재판정에서 책임 떠넘기기로 제출된 죄목이 먹혀 들어갔다.  

맥베이 대령은 이후 니미츠 제독의 사면으로 인해서 복직은 하였으나

 1949년 소장을 끝으로 예편되었다. 

그것은 사실상 불명예제대였다. 

이 후 유족들의 비난을 뒤집어쓴 채 맥베이 대령은

 1968년 70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권총으로 자살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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