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ese Tank

코레히도르 전투시 일본군 97식 치하 전차와 미군 M3 스튜어트 전차[Battle of Corregidor during Japanese Type 97 Chi Ha & US M3 Stuwart Tank]

슈트름게슈쯔 2014. 10. 3. 13:40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 루손섬 바탄 반도를 침공해 들어가는 일본군의 97 식 치하전차 - 1942년 




필리핀 바탄의 정글로 전진하는 일본군과 89식 이고 전차 - 1942년 




필리핀 바탄 반도 전투시 미군의 M3 스튜어트 경전차에 휘발유 화염병을 던지는 일본군 - 1942년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 바탄 반도 전투에서 일본군이 노획한 미군의 M3 스튜어트 전차 - 1942년 5월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 루손섬의 바탄 반도전투는 일본의 필리핀 침공의 전초전격 전투였다.

바탄 전투의 결과 필리핀은 완전히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후 필리핀은 일본의 전쟁수행기지 및 남태평양 침공을 위한 전진기지로써 사용되게 된다.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군은 꾸준히 필리핀 지역에 정찰을 실시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미군 수뇌부에도 알려져 곧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할 수 있다 라는 

정보를 신뢰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 때 육군에서 퇴역한 장군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다시 현역으로 재소집되어 필리핀으로 파견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의 침공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었고, 

그리하여 마닐라 만 4개 도서를 요새화하였으며

필리핀군을 미군의 지휘체계에 넣어 미극동지상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예상대로 일본군은 1941년 12월 8일 필리핀에 상륙하였으며,

 4개 방면에서 미-필리핀군을 압박하며 필리핀을 완전히 점령하고자 했다. 

 맥아더 장군은 해안에서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방어함으로써 가능한 

 장시간 필리핀 루손 섬을 2개 부대(북부 루손부대 지휘관: 조나단 메이하우 웨인라이트 4세 중장, 

남부 루손부대 지휘관: 조지 M. 파커 중장)로 방어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기존의 계획이던 War Plan Orange-3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즉, 최대한 비밀스럽고 빠르게 바탄 반도로 철수하여, 마닐라만을 결사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원래의 War Plan Orange-3계획에 따르면 방어 전투를 위한

 최소 6개월치의 식량과 의약품 및 무기를 비축하도록 되어있었으나,

 맥아더의 수정된 계획 War Plan Rainbow 5에 따라 해안선에서의 방어를 위해

 물자들이 해안선 주변으로 넓게 퍼져 있었다. 

따라서 바탄 반도에서의 방어 전투를 위해서 비축하려 했던

 6개월치의 보급품은 확보하지 못한채 바탄반도로의 철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결국 보급품의 부족에 따라 바탄 반도에서 방어 전투를  펼치던 미군의 발목을 잡게된다. 

일본군이 미-필리핀군의 바탄 반도로의 철수를 예측하지 못한 이유는

미-필리핀군이 마닐라를 결사 항전의 의지로써 사수할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1942년 1월 2일 미군은 남부 루손부대가 북부 루존부대의 연막 작전(지연전)에 힘입어

 결사적인 강행군에 돌입하여 마침내 팜팡가 강을 건너 바탄으로 철수하였다. 

북부 루손부대와 합세한 남부 루손부대는 나티브 산 일대에 주 진지를 구축하고, 

사마트 산 일대에 예비 진지를 구축하여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후방 침투를 염려하여 해안방어진지도 준비하였다. 

 일본군은 미-필리핀군의 바탄 철수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마닐라를 점령하면 필리핀 전역이 종료되리라 생각하였다.

일본 홈마 군의 주력인 제4사단은 마닐라 점령 직후 자바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군은 제16사단 일부와 제65독립혼성여단만으로

 바탄의 미-필리핀군을 격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1월 9일부터 주 진지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필리핀군의 저항은 대단히 완강하였다. 

1월 21일에야 서부 해안을 통해 일본군은 겨우 주 진지 저지선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미-필리핀군은 질서정연하게 퇴각하여

26일까지 안전하게 예비 진지까지 철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예비 진지로 철수한 미-필리핀군의 상태도 좋지 못했는데

식량과 의약품의 부족이 매우 심각하였다. 

처음에는 정량의 1/2이던 배식이  1/3으로 줄었을 뿐만 아니라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는 장병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저기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그들이 자살하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병사들의 사기 역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바탄 반도에서 식량과 의약품이 날로 갈수록 떨어지고 병사 개인 개인의 사기가 곤두박질 칠 무렵 

총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3월 11일 서남태평양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호주로 탈출한 사실이 알려졌다.

 북부 루손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조나단 메이하우 웨인라이트 중장이 총사령관의 임무를 이양받았다. 

그와 반대로 일본군의 병력은 보병 3만명 야포 200문 전차 50대 항공기 100대가 증강되어

물밀듯이 바탄 반도로 쇄도해 들어갔다.

1942년 4월 3일 일본군의 조직적인 포격과 돌파 전술에 의한 총공세에 

미-필리핀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4월 9일 결국 일본군에 투항하고 말았다.

그리고 미-필리핀군과 생포된 패잔병을 포함한 약 75,000명의 

병사들이 포로로써 바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약 10,000명의 병사와 20,000명의 병사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바탄 전투의 결과 일본은 필리핀을 완전하게 점령하였으며 차기 작전을 위한 전진기지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탄 전투를 포함한 필리핀 전역에서 받은 인적, 물적, 시간적 손실은 

뉴기니아 제도와 솔로몬 제도 전역에 대한 일본의 침공 계획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미군에 5개월이라는 시간을 준 셈이 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 코레히도르 섬 미군 기지에 공격을 가하기 위해 전진하는 일본군과 97식 치하 전차 - 1942년 5월 





일분군이 코레히도르 섬을 공격하여 노획한 미군의 M3 스튜어트 전차 - 1942년 5월 





코레히도르 섬 미군 기지 요새에 공격을 가하기 위해 산비탈을 오르는  일본군 제 7 전차연대의 97식 치하 신호토 전차 - 194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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