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차 세계대전 WW1

유틀란트 해전 당시 독일 전함 포메른의 디오라마[WW1 Battle of Jutland German SMS Pommern Diorama]

슈트름게슈쯔 2014. 10. 29. 11:48





제 1차 세계대전 유틀란트 해전 당시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침몰되는 독일 전함 포메른의 디오라마








유틀란트 반도를 연상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국가는 바로 덴마크이다.

덴마크는 북유럽의 유틀란트 반도에 위치한 국토 면적이 자그마한 국가이다.

지정학적으로 덴마크는 유틀란트 반도 아래로 독일과 접해 있으며 

위로는 노르웨이및 스웨덴과 접해 있고  

또한 유틀란트 반도 옆으로는 북해를 사이에 두고 영국과  마주보고 있다.

덴마크는 유럽에서 독일과 영국에 둘러싸여 여러 차례 전쟁의 참화를 겪은후 

국력은 피폐해지고 슐레스비히 지역과 홀스타인 지역의 영토가 빼앗겼다.

그러나 크룬트비와 크리스찬 콜드및 달가스등의 지도자들에 의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민들은 일체 단결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밖에서 잃은것을 안에서 다시 찾자라는 

국가 부흥 운동에 따라 세계적인 낙농업국가로 다시 유럽의 부국으로 우뚝선 국가이다.

그러한 유틀란트 반도에서 덴마크는 북해를 두고  영국과 마주보고 있다.

그 북해의 유틀란트 반도 앞바다에서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이 맞붙은 대 해전이 벌어진다.

유틀란트 해전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였던 

1916년 5월 31일 ~ 6월 1일 사이에 독일 해군과 영국 해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이었다.

그리고 세계 해전사상 유일하게 드레드노트급 전함 함대가 서로 부딪친 대해전이었다.

유틀란트 해전을  독일 측에서는 스카게라크 해전이라고 부른다.  

20세기 초반 당시 강대국 국력의 상징이었던 전함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귀중하게 다루어져

실전에서 대함대가 격돌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유틀란트 해전을 제외한 기타 해전은 2~4척 규모의 분견대 단위로 작전을 나가다가 

순양함이나 순양전함 한두척이 가라앉거나 피해를 입는 양상의 해전이 벌어졌고,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거의 그대로 재현된다. 

그런데 영국과 독일 양국을 합쳐 드레드노트급 전함만 44척이 동원된 전함의 시대 중

 유일하게 벌어진 대해전이 바로 유틀란트 해전이다. 

 독일은 1900년대 초반 해군력을 급속히 키워가며 영국이 가진 해상지배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애초 독일은 영국이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영국이 지중해 등지에 전력을 분산할 것이라고 가정했지만 실제로 영국이 해군전력을 

스코틀랜드 북방의 스캐파플로에 집중시켜 북해를 봉쇄했기 때문에 독일이 영국 해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독일 해군은 영국 대함대를 일부 끌어내어 축차적으로 전력을 소모시키려는 전략을 내세웠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1916년 5월 히퍼 제독이 이끄는 순양전함 전대가 미끼용으로 먼저 출격하고 

그리고 쉐어 제독이 이끄는 본함대가 뒤를 이어 출격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은 개전 초 침몰한 독일 해군 함정에서 암호표를 입수해 

독일 해군의 무선 통신을 거의 모두 감청해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영국의 존 젤리코 제독은 이참에 독일의 대양함대(High Sea Fleet)를 때려잡기 위해

독일에게  유인된척으로 데이비드 비티 제독의 순양전함 전대를 먼저 내보내고 대함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당시 영국과 독일 양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함 종 영국 vs 독일 드레드노트급 전함 28척 vs 16척 

전(前)드레드노트급 전함 0척 vs 6척 

순양전함 9척 vs 5척 

장갑순양함 8척 vs 0척 

경순양함 26척 vs 11척 

구축함 78척 vs 61척 

주포 수량 305mm ~ 381mm 344문 vs 280mm~305mm 244문 


이처럼 영국 해군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위였으나 영국은 전술적으로 패배를 당했다. 

순양전함 사이에 벌어진 초전에서 비티의 기함 라이온이 대파당하고

 20분 간격으로 인디퍼티거블과 퀸 메리 2 척의 순양전함이 격침당하는 등 고전을 겪었다. 

오죽하면 전대사령관인 비티 제독이 "우리 배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면서 낙담할 정도였다.   

그러나, 초전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뒤늦게서야 영국의 함대 주력이 접근하는 것을 알아챈

 독일 함대가 신속한 후퇴를 결정함으로서 함대 주력끼리는 원거리에서 

포탄 몇 발을 서로 응사하는 정도로 전투가 끝나버렸고, 오히려 이후의 후퇴과정에서 

주변 경계 및 기타 업무를 맡은 순양함 이하급의 보조함선간의 야간전이 더 치열했다.

 게다가 독일의 함대 주력이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영국의 순양함과 구축함이

 형성한 경계선을 힘으로 돌파하면서 오히려 난전 자체는 야간과 후퇴과정에서 심했다. 

물론 상대의 급수가 너무 차이가 나는지라 보조함끼리의 전투는 영국이 우세했지만, 

독일 함대 주력과 영국 보조함의 전투는 영국이 밀려버리는 사태가 전개된다. 

 전체적으로 영국은 순양전함 3척, 장갑순양함 3척, 구축함 8척 총 11만 3천 3백톤 규모의 손실을 입은 반면,

 독일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경순양함 4척, 어뢰정 5척 총 6만 2천 300톤의 손실을 입는데 그친다. 

 유틀란트 해전의 결과로  겉으로 보이는 영국의 전술적 패배원인으로는

 도거뱅크 해전의 교훈으로 독일 전함들이 탄약고와 포탑에 철저한 방염대책을 추가한데 반면

 영국은 속사에 주력하기 위해 포탑내에 적정량보다 많은 포탄과 탄약을 쌓아놓는 등 

탄약의 안전한 취급에 대해서는 기존보다 더 소홀해졌고, 이것이 포탑/바벳을 뚫고 들어온 적탄에

 포탑과 양탄기에 쌓인 탄약들이 유폭하며 함을 폭침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살아 돌아간 독일 해군의 주력함들도 3개월 이상의 수리가 필요한 사실상 대파 상태에서

 겨우 돌아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술적으로는 영국의 근소한 패배라고 할 수 있다.  


당장 독일의 순양전함들은 미친듯이 두들겨 맞고 거의 침몰 직전까지 몰렸지만 

강도높은 훈련과 이전 해전들을 분석해 얻은 결론들을 바탕으로 한 잘 짜여진 메뉴얼대로 

응급수리를 하고 탄약고를 재빨리 침수시켜 유폭를 막는 등 

적절한 대응으로 결국 살아남았다. 

물론 건조당시 예상했던 적의 화력을 훨씬 능가하는 15인치 철갑탄을 몇 발이나 맞았으므로 

살아서 돌아왔을때 독일의 대표적인 전함이었던 자이틀리츠는 배의 흘수가 너무 깊어져서(=배에 물이 너무 많이 차서) 

입항이 힘들 정도였고 수리도 엄청나게 많이 해야 했으므로 한동안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영국의 승리였다. 

비록 젤리코의 뒤를 이어 대함대의 사령관이 된 비티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독일 해군이 출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전략적인 승리도 독일 해군의 출동의지에 달려 있었다는 어정쩡한 것이었지만, 

결국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한 독일 해군은 이후 

영국 수상함대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고 군항 안에 박혀 버리고 말며 

잠수함을 이용한 통상파괴전에 집중하게 된다. 

유틀란트 해전의 결과에 대한 간단명쾌한 한 설명이 꽤 유명하다. 

 "The imprisoned got out of their cell, punched the jailer & then returned." 

 "죄수가 감방에서 나와 간수에게 펀치 한대를날리고 감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통상파괴전이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영국을 굶겨 죽이지도 못했으니... 

게다가 100일 공세이후 패전이 결정된 독일을 빠르게 항복시킨 단초도

 킬 군항의 반란으로 알려진 수병 폭동이었다.  

유틀란트 해전으로 사실상 유일한 함대결전이라 그 후 전함 설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조준장비의 발달로 장거리 사격전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 갑판으로 떨어지는 대각낙탄에 대한 방어가 중요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함의 측면방어 대신 갑판방어가 중요시되고 

동시에 주포의 대구경화가 진행된다. 

또한 전함과 함께 함대결전에 쓰이기엔 순양전함이 너무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1차 세계대전 직전에 불었던 순양전함 건조 열풍도 사그라들게된다.  

소수 의견으로는 근대 백여 년동안 세계 제일의 실력을 자랑한다던 

국 해군이 건설된지 고작 30년도 못 채운 독일 해군을 거의 모든 함대 세력을 동원한 전투에서

 명시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반대로 명시적으로 전술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점에서 

유틀란트 해전은 영국 해군이 몰락하는 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도 있다.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측 사령관이었던 젤리코와 비티는 

킹 조지 5세급 전함의 4번함과 5번함의 이름으로 사용될 예정이었지만, 

해전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에 의해서 각각 앤슨과 하우로 교체당했다. 

사실 독일 함대를 전멸시킬뻔한 기회가 있었지만 양측 사령관의 불화와 선택으로

 그걸 놓쳤다는 시각이 우세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서 젤리코는 선전보다는 경과보고와 분석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고가 늦었다는 어른의 사정까지 가세해서 일이 커졌다.

 물론 영국 함대 전멸이라는 비보도 아니고 전술적 무승부였으니 급하게 보고할 것도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해전의 결과가 영국에 늦게 도착했고 앞서 해전의 결과가 도착한 

독일의 승전 주장때문에 영국의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다.

결국 젤리코의 보고가 도착하고 처칠이 그 보고를 바탕으로 

]영국의 전략적 승전을 알리는 바람에 여론이 다시 돌아왔지만 

이때의 경험때문에 처칠이 젤리코와 비티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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