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tish Tank

영국군의 사냥개 전차 위펫[WW1 British Army Whippet Tank]

슈트름게슈쯔 2014. 11. 23. 14:33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이름이 하운드 계열의 사냥개였던 영국군의 위펫(Whippet) 전차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 북부 플랑드르 들판에서 전사한 영국군 위펫 승무원들의 무덤 






영국군에게 노획한 독일군의 위펫 전차 





일본군이 수입하여 사용했던  위펫 MK A형  영국전차 - 1930년대 초반 만주(Manchuria)





소련 적군(Red Army)이 노획하여 활용했던 러시아 백군의 영국군 위펫(Whippet)Mk B형 전차 












위펫(Whippet) 전차의 모형 




현대 전차의 기원은 영국군의 사냥개 전차 위펫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서부전선의 전투는 한마디로 

연합군과 독일군의 참호전에 의해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피아간 아군 병력의 대량 희생을 줄이기 위해 일단 참호를 판뒤에 

그속에서 적의 동향을 관망하며 서로의 형세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한 교착상태로 부터 벗어나 적진을 돌파하기 위해 영국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내연기관에 방탄용 철판을 덧대어 제작한 

탱크라는 전차를 개발하여 전선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시간이 점점 경과되면서 영국군은 그들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제작했던 

탱크라는 이름을 붙였던 전차의 운용 경험에 따른 전술 또한 차츰 쌓여갔다. 

그리고 전선에 탱크를 투입시켜 펼졌던 여러가지 전투 경험에 의해 영국군은

 자신들이 보유한 전차의 장단점을 나름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사용했었던 MK 전차들과 그  파생형들은 전장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큰 차체와  낮은 기동성으로 인한 제약으로 인해 전차 운용상의 한계가 많았다.

 그러한 형태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전차가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조건에 맞는 전차는 차체의 크기는 작아도 

중량이 가볍고  기동력이 빠른  전차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한 조건에 의해 등장한 전차가 바로 영국군의 Mk.A 위펫(Whippet)중(中)전차였다. 

기존의 영국  전차는 화력과 돌파력은 있지만 크고 무거운 중(重:)전차로 분류하고 

그보다 작고 경쾌한 중(中)전차를 제작한 것이다.

 영국의 전차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트리톤은 

1916년 10월 더 저렴하면서도 보다 속력이 빠른 전차를 만들자고 제안하옄다. 

중(重)전차가 적의 방어선에 구멍을 뚫는 자체는 종종 성공하지만 

그 구멍을 뚫고 추가로 돌입해 전과를 확대하기에는 기동성이 떨어졌고 

그러한 입장으로 인하여  차체가 더 작고 경쾌한 전차가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교착상테에 빠져있는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타개시키기 위해

기존의 MK 전차들보다  더 작고 가벼운 전차가  Mk.A, 일명 위펫이라는 사냥개의 이름으로 개발이 진행됐다. 

그러한 신형전차의 개발에 영국군 수뇌부의 반응도 예상 밖으로 우호적이어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후 위펫 전차는 1917년 10월에 첫 양산형 전차가 출고되어 그 해 12월 실전부대에 배치됐다. 

주문량도 단번에 200대가 확보될 정도였다.   

위펫은 당시의 다른 전차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혁신적인 차량이었다.

 무장은 4정의 기관총뿐이지만 무게도 14톤으로 이전 전차들에 비해 상당히 가볍고 

승무원도 3명에 불과했다(기관총 사격이 가능한 승무원이 2명뿐이어서 실제 기관총 4정 중 2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줄어든 덩치와 가벼운 무게 덕분에 최고 시속은 13.4㎞/h라는, 

당시로써는 놀라운 수준의 고속을 발휘할 수 있는 데다 험지 극복 능력도 훨씬 좋아졌다.  

위펫 전차는 전차의 내부 구조도 크게 개량됐다. 

영국 전차의 단점이었던 엔진과 승무원이 분리되지 않아 소음과 매연에 노출됐던 

이전의 모델과는 달리 위펫은 후방의 전투실에 모든 승무원과 무장이

전투실과 완전히 분리된 앞 부분에 엔진 등의 주행 계통이 집중됐다. 

덕분에 승무원들이 임무에 보다 쾌적하고 효율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 

현대 전차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인 전투 구획과 

주행 구획이 분리된다는 점이 이 전차에서 사실상 시작된 것이다. 

  위펫 전차의  한계는 두 대의 버스용 엔진(각각 45마력)을 장착했는데 

전진이나 후진은 두 엔진을 모두 같은 방향, 같은 출력으로 가동하고 

방향 전환은 한 쪽 엔진의 출력을 줄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두 엔진의 출력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시동이 꺼지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폭주하기 쉽다 보니 조종수의 부담도 컸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조종수는 전차를 멈추고 한쪽 궤도를 아예 고정시킨 뒤

 다른 쪽 궤도만 움직이는 방법을 종종 실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궤도 이탈 등의 고장도 자주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펫은 실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8년 3월의 첫 실전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위영국 전차 위펫은 

1차 세계 대전 중에 사용되었던 어떤 영국 전차보다 

독일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던 전차로 평가된다.

 실제로 4월 24일에는 단 7대의 위펫으로 적 2개 대대에 공격을 가하여

 독일군 4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특히 1918년 8월에 벌어진 프랑스 아미엥 대공세에서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단 한 대의 위펫이 적진 후방에 고립된 상태에서 무려 9시간이나 버티면서 

적의 야포사격에 파괴될 때까지 적 1개 포대와 관측기구를 파괴한 뒤 

독일군 보병 1개 대대를 패주시키고 1개 사단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가벼운 차체의 중량 덕분에 영국군은 전차 운용의 제약이 적은 위펫은 전쟁 뒤에도 나름대로 인기가 있었다.

 러시아 내전에서는 영국이 17대를 파견했지만 공산군이 그 중 12대를 노획해

 1930년대까지 사용 했고 일본도 영국에서 위펫전차 6대를 수입하여 1930년대까지 운용하였다.

 



photo from : wwimodeller.co.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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