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비키니 환초 핵실험 후의 일본 전함 나가토[Bikini Atoll second atomic bomb test after Japanese battle ship Nagato]

슈트름게슈쯔 2015. 2. 4. 20:14





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마지막으로 잔존한 일본 해군의 전함 나가토 - 1945년 9월 14일 도쿄만 요코스카 항 













비키니 환초의 원폭 - 1946년 7월 1일 









태평양 비키니 제도의 1946년 7월 1일 핵실험 후의 일본 해군 마지막 전함 나가토 



1946년 7월 1일 미국의 비키니 환초로 알려진 태평앙의 마샬 제도 해역에서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투하'공개 핵실험이 실시되었다. 

 비키니 환초(Bikini Atoll)는 서태평양 오세아니아 중 미크로네시아의 마셜 제도 북부에 있는 환초이다.

랄리크 열도(列島)에 속하며 북위 11 °35', 동경 165 °25'에 위치한다.

 비키니·에뉴·나무 등 약 20개의 환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에 둘러싸인 초호(礁湖)는 길이 34km, 너비 17km에 달한다.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며 유명한 휴양지가 될 수 있었던 이 섬의 운명은

 1946년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으로 한순간에 뒤바뀌게 되었다.  

미국은 비키니 섬과 에니웨톡 섬의 주민을 강제로 몰아내고 

1946년 7월부터 1958년까지 모두 23차례의 핵폭탄 실험을 실행했다.

그중 1954년에 행해진 수소폭탄 실험들(캐슬 브라보)에서는 섬 3개가 사라졌다. 

말 그대로 섬이 통채로 증발해버렸다.  

1946년 섬에서 쫓겨나 난민생활을 하던 비키니 원주민들은 

1974년 30여년만에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방사능 위험에 대한 논쟁이 격렬했지만, 방사능에 대한 공포보다 

고향에 대한 열망이 더 컸던 몇몇 원주민들이 자의로 돌아오는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방사능이 기준치 이상으로 심각하게 농축되어 있다는 

조사 결과가 속속 발표되었고, 결국 4년만에 비키니 원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섬을 떠나야만 했다.

또한 1954년 비키니 섬의 수소폭탄 핵실험 때 발생한 낙진에 노출되었던 

론게랍 섬의 주민들도 메자토 섬으로 이주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10∼15년 정도의 기간 동안 비키니 섬을 정화시켜주기로 하고 

핵무기 실험으로 야기된 반미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1억 5,000만 달러의 위탁기금을 적립했다 .

 1989년 미국 대법원에서는 자유연합협정에 의거하여 "마샬 제도의 주민들은 

피해보상을 목적으로 미국 정부를 고소할 수 없다" 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1990년 1월에 핵실험에 의한 피해자의 보상 문제를 심의하는 핵손해배상 재판소는

 마샬 제도 주민들에 대한 추가 보상을 승인하여 1993년 중반까지

 1억 1,200만 달러 핵실험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되었다. 

1997년 드디어 첫 안전설이 나온지 30년만에 섬을 거닐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과일은 위험하단 이야기가 있다.  

핵실험에 사용된 함선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에 항복한 독일군과 일본군의 함선과

 쓸모가 없어진 미군 함선들이었다.

 핵실험 결과 미군은 생각 외로 핵공격은 함대를 전멸시킬 피해를 주지 못한다 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핵만능주의가 도래하자 핵폭뢰, 핵어뢰, 핵포탄, 핵대함미사일 같은

 함선 공격용 핵무기들이 개발 되고 배치되었다. 

 이때 실험에 끌려나온 전함 중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구 일본군 전함으로서는 전쟁 후 유일한 생존 전함인 나가토였다.

또한 전쟁 후 유일한 생존 경순양함인 사카와와 함께 핵에 피폭되었는데, 

둘 다 피폭 당일날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나가토의 경우 수주일 뒤 7월 25일 2차 실험에서도 

침몰 하지 않다가 며칠 뒤 침수되어 서서히 침몰했다. 

다만 유난히 내구력이 뛰어나서 그런 건 아니고 

그나마 나가토가 다른 미군 전함들과 엇비슷한 내구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에서 만든 다른 실험용 구식 전함들의 경우에 2번째 핵실험도 견뎌내고 

다른 실험에 끌려나가 기어코 침몰한 케이스가 많고, 폭심지 중앙에 있던 

1916년 건조된 네바다 호의 경우엔 상부 구조물만 붕괴되었다.

그 외에도 3번이지만 실질적인 미국의 첫번째 정규항모이자 최다 함재기 출격 기록의

 새러토가및 독일 중순양함프린츠 오이겐 등 여러 귀한 함선들이 핵 실험으로 이용되었다. 

핵실험 당시 폭심에서 동쪽으로 160Km 떨어진 곳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 어선 "제5 후쿠류마루(第5福竜丸)"가 이 실험에 휘말려 선원 23명이 방사능 피폭을 당했다. 

당시 부선장이었던 쿠보야마 아이키치는 6개월만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총 13명이 방사능 피폭 때문에 사망했다. 

이 사건을 소재 삼아 출시 된 영화가 그 유명한 일본의 고지라 시리즈이다.

저 충격적인 실험이 행해진 때에 마침 노출도가 매우 심한 수영복이 같이 출시되어

 그 충격을 따와 비키니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photo from : www.maritimeques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