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옛날 한국의 호랑이 사냥꾼들[Once upon a time in korean Tiger hunter]

슈트름게슈쯔 2015. 2. 11. 16:45



화승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장죽 담뱃대를 입에 문 조선 북부 지방의 범사냥 포수들 - 1920년

 

이 당시 한반도에는 시베리아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한국산 범을 사냥한 조선 포수 사냥꾼들 





호랑이 원정대에 소속된 조선 포수 최순원과 백운학이 각각 잡은 두마리의 호랑이- 1917년  

 이 호랑이는 경성 조선호텔과 도쿄 제국호텔에서 열린 호랑이 시식회에 쓰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경주 대덕산에서 사살된 한국의 마지막 타이거 - 1921년 


사진속의 인물은 한국일보에 사진을 제공한 이상걸의 부친 이복우씨이다. 

호랑이를 엽총으로 쏘아 잡은 사람은 이상걸의 큰아버지 이위우씨였는데

일제 강점기때라 이후 호랑이의 가죽은 일본의 왕족에게 헌상되었다.



중국의 4대 기서중의 하나인 소설 수호지의 내용중에서는 

산뚱성 양곡(阳谷县) 랴오청 경양강(景陽崗) 에서

만취 상태로 어두운 고갯길을 걷던 중 때마침 나타난 대형 호랑이를

맨 주먹으로 때려 잡는 무송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대 중국의 소설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실제로 혼자서 호랑이를 잡은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고려시대 경주의 사나이 최루백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 경주에는 호랑이가 많았다.

최루백은 나이 15세 때 그의 아버지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도끼를 들고 산에 올라 호랑이를 발견하고

 “네 어찌 하늘같이 받들고 있는 나의 아버지를 해쳤느냐, 내 너를 잡아먹어야겠다.”고

 꾸짖고 호랑이를 죽여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꺼내고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뤘다. 

그리고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3년 간 시묘살이를 한 후 

소금에 절여 냇가에 묻어둔 호랑이 고기를 꺼내어 모두 먹었다고 한다.

루백(婁伯)의 효행은 ‘고려사 열전(高麗史列傳)’ㆍ‘세종실록지리지’ㆍ‘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ㆍ‘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ㆍ‘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서도 실려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후 문과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올라 

의종 7년(1153년) 금(金)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고 돌아왔으며, 

의종 9년(1155년) 평장사(平章事) 최자영,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양원준(梁元俊) 등과 함께 국정(國政)에 관한 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의종 12년(1158년)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국자제주(國子祭酒) 염직량(廉直凉)과 함께

 생원시를 맡아보기도 했으며, 후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루백(婁伯)은 100살을 넘게 살다가 1205년 12월에 사망하였으며, 

사후 효숙공(孝肅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조선의 정조는 최루백이 태어난 마을을 효자동으로  

호랑이를 잡은 뒷산의 큰 바위를 효암이라 명하고 

그의 자손에게 부역을 면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고려시대 경주에는 자기 부친을 잡아 먹은 호랑이를 잡아서 

그 고기를 잘게썰어 소금에 절인뒤 아버지의 정기를 생각하고 

먹으면서 3년동안 시묘살이를 했던 최루백 같은 효자가 있었다,

그리고 나라가 통채로 일본에 잡아 먹혔던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잡힌곳으로 보고된 지역 또한 

호랑이의 고장이었던 경주에서 였다. 

고사성어에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란 말이 있다.

그것을 직역하면  그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고사성어 대로

사람이 죽어서 그 이름을 후대에 까지 명예롭게 남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최루백은 죽어서도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효성이 지극했던 효자로 이름을 남겼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옛날에 많고 많았던 호랑이들이 

한반도에서 이미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한국범 또한 그 가죽을 후대에 남길수는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한반도 경주에서 마지막으로 사살된 한국 호랑이의 

그 가죽은 나라를 집어 삼켰던 원수 왜놈들에게 바쳐지고 말았다.

결국 한국의 마지막 호랑이 가죽은 죽쑤어 개준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