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

중국과 소련의 우수리강 무력 국경 분쟁 1969 [Sino-Soviet Ussuri River border conflict 1969]

슈트름게슈쯔 2015. 5. 29. 13:36

















 당시 우수리강의 진보도-다만스키섬을 점령한 소련군 - 1969년 3월 




소련군과 무력 국경 분쟁이 일어났던 우수리강의 진보도-다만스키섬을 가리키는 중국 어린이들 



중국과 소련의 갈등은 중국의 인민 공화국 건국 이후 근 이십년동안 발생했다 .

1969년 3월 2일 오전 4시10분 중국과 소련 국경에 걸쳐 흐르고 있는 烏蘇里(우수리)강의 가운데에  있는 

(진보도- 중국명 : -다만스키섬 島 - 러시아명)에서 중국과 소련 양군의 병력이 무력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에 따라 중국 총리 주은래는 중남해의 豊澤園(풍택원)을 

주거로 삼고 있던 주석 마오 쩌둥에게 국경 현지 부대로부터온 제 1보를 전달한다.  

중-소/러 국경분쟁은 중-소분쟁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중국이 소련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미국과 전략적 삼각관계에 참여하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추진이후 1980년대 초부터 소련과 국경협상을 재개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다가 1985년 3월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등장으로 비로소 해결책을 얻게된다.

 특히 냉전의 종식 이후 중-러/중앙 아시아 3국과 국경선을 획정하고 군사적 신뢰 구축하며 신뢰를 쌓아왔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국경은 역사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 왔으나, 

1949년 중국의 건국이후 약 7,100km의 국경선을 유지해 왔다. 

중국과 소련이 1950년대 소위 밀월관계를 유지한 기간 중에는 국경선이 문제시되지 않았으나, 

양국관계는 1956년 2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난 연설과 1958년 8월 중국의 "대약진운동" 등의 대립요인을 안고 있었고, 

특히 1960년 8월 중국에 체류 중이던 소련 기술자 및 군사고문단이 모두 철수하면서 표면화되었다. 

1960년대 초 이후 중국과 소련은 상호 이념적 비방을 지속하였고, 

급기야 1969년 3월 우수리강 유역에서 2회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양국군의 충돌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당시 문화대혁명을 겪고 있던 중국이 자국의 국력약화와

 1968년 10월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대한 교전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계획적인 매복작전을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교전은 1969년 3월 2일 우수리 강가의 작은 섬(중국명: 珍寶島, 소련명: 다만스키〔Damanskii〕)에

 매복해있던 300명의 중국 국경수비군이 보다 적은 수의 소련 순찰대를 공격하여 

30여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발생하였다. 

중국은 첫 교전후 즉각 동 섬에서 철수하였고, 

다음 날에는 중국내 주요 신문 및 각 지역에서 "중국을 아시아의 체코슬로바키아화 시키려는

 사회주의 제국주의자"들의 음모에 대한 비난이 개시되었다.  

양측의 2차 교전은 3월 15일 동 지역에서 발생하였는데, 

중국군은 2,000명 이상의 병력과 야포를 동원하였으나 

전투지역을 동 섬으로 국한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주전차, 장갑차, 야포 등 다양한 현대식 무기를 동원하여 

 섬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국경내로 포격을 가하였다.

그 결과 중국측 800명, 소련측 6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중국은 4월 중국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소집한 후, 

5월에는 소련측에 협상제의를 하였으나, 

7월에는 중·소 서부국경 신강지역에서 양측간 총격전이 발생하였고, 

8월에는 헬기와 주전차로 무장한 수백병의 소련군이 신강내로 진입후 철수하였다. 

같은해 9월 북베트남 호치민의 장례식 참석후 북경에 들른 소련 총리 코시긴과 중국 총리 주은래간에 

국경협상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이후 국경회담에서는 국경선의 획정이 아닌 현상유지만이 합의되었다. 

 이후 양측의 국경회담은 1982년에 재개되었으나 양국관계의 경색으로 인해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1985년 3월 고르바초프의 등장이후  진전되게 된다.

특히 1989년 5월 북경에서 개최된 중·소 정상회담 직후부터 

양측의 외교부·국방부 관리로 구성된 대표단이 발족되었다. 

양국 국경선 회담은 양국 외무차관을 단장으로 모스크바와 북경을 번갈아 가며 실시되었고, 

1991년 3월 양측은 4,300km에 이르는 중·소 동부국경에 대한 잠정적인 합의에 이르게 되었고,

 동 협정은 같은해 5월 장쩌민의 모스크바 방문시 양국 외무장관에 의해 최종서명 되었으며, 

양측은 1992년 2월 동 협정을 비준하였다.  

중국은 러시아와 4355km(동부 4300km, 서부 55km), 카자흐스탄과 1533km,

 키르기즈스탄과 858km, 타지키스탄과 414km의 국경을 공유하게 되었다.

특히 1997년 4월 5개국간 서명된 "국경지역 군사력 상호감축협정"은 아시아에서 

체결된 최초의 다자간 군축협상으로서, 지역안정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향후 역내 영토,영해분쟁의 해결에도 귀중한 선례가 될 전망이다.

 중-러 및 중앙아 3개국간 국경분쟁의 극적인 해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러시아 및 중앙아 3국의 국력약화로 인한 재원부족으로 판단되는데 

1998 ~1999년에는 국경 확정이 아닌 월경, 범죄등의 지엽적인 안건이 주류를 이루었다.








photo from : Live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