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독일 기갑부대의 탑 에이스 쿠르트 크니스펠 & 킹타이거 전차 [WW2 German Panzer Top Ace Kurt Knispel and his King Tiger Tank ]

슈트름게슈쯔 2015. 9. 13. 23:42

 

 

 

 

 

 


쿠르트 크니스펠(Kurt Knispel, 1921.09.20~1945.04.28)



쿠르트 크니스펠은 수데텐란트(Sudetenland) 출신의 독일 육군 전차 장전수, 포수, 그리고 전차장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인 168대, 비공인 포함 195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여 최고의 전차 에이스로 남았다. 

그는 요하네스 뵐터(Johannes Bölter), 에른스트 바크만(Ernst Barkmann),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 그리고 미하일 비트만(Michael Wittmann)과 

더불어 사상 최고의 전차 에이스로 알려져 있다.  

어린시절  크니스펠은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의 주크만텔(Zuckmantel) 근처 

작은 마을 잘리스펠트(Salisfeld, Salisov)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 대부분을 인근 니클라스도르프(Niklasdorf)에서 보냈다. 

1940년 자동차 공장에서 수습과정을 마치고 난 그는 독일 육군 기갑부대에 지원하였다.  

훈련  기본 훈련을 위해 크니스펠은 저 질레시아(Lower Silesia)의 

자간(Sagan)에 있는 전차 전환 교육 대대(Panzer Replacement Training Battalion)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기본 보병 훈련을 거쳐 1호 전차(Panzer I), 2호 전차(Panzer II), 

그리고 4호 전차(Panzer IV) 운용 교육을 받았다. 

1940년 10월 1일 그는 제 12 기갑사단 29 기갑연대 3 중대로 배치되었다.

 크니스펠이 훈련받은 분야는 4호 전차 장전수와 포수였다. 

훈련은 1941년 6월 11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자간과 푸틀로스(Putlos)를 오가는 과정도 포함되었다. 

 2차 대전  크니스펠은 바바롯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 당시

 헬만(Hellman) 소위의 4호 전차 포수였다. 

그의 전차는 아돌프 프리드리히 쿤트첸(Adolf-Friedrich Kuntzen) 장군이 지휘하는

 제 57 육군(이후 제 57 기갑군으로 개명) 제 3 기갑집단군(Panzergruppe 3) 소속이었다. 

크니스펠은 야르체포(Yarzevo)부터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입구까지 

주로 북부 레닌그라드-티흐빈(Leningrad-Tikhvin) 지역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에버하르트 폰 막켄센(Eberhard von Mackensen) 지휘하에 

코카서스(Caucasus)에서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크니스펠은 1943년 1월 말 푸틀로스에 돌아와 새 티거 I(Tiger I) 전차 교육을 받았다.

 이때까지 그는 12대의 전차를 격파하였다.  

푸틀로스에서 교육을 받은 병력 일부는 파더보른(Paderborn)의 제 500 기갑대대로 배치되었다.

 특무상사 페덴작(Fedensack)이 이끌던 이 그룹은 제 503 중전차대대 1 중대가 되어 

쿠르스크(Kursk)에 투입, 제 7 기갑사단(Armee Abteilung Kempf)의 측면 엄호를 맡았다.

 크니스펠은 이후 코르선-체르카시 돌출부(Korsun-Cherkassy Pocket), 

비니차(Vinnitsa), 얌폴(Jampol), 그리고 카메네츠-포돌스크(Kamenets-Podolsk)에서 

아군을 구원하는 임무에도 투입되었다. 

이후 동부전선에서 차출된 이 중대는 티거 II(Tiger II)를 지급받고 캉(Caen) 주변에서 

전투를 벌이며 노르망디(Normandy)로부터 퇴각하였다.

 중대는 다시 동부전선으로 향하였고, 메죄투르(Mezőtúr), 

퇴뢰크셴트미클로우시(Törökszentmiklós), 체글레드(Cegléd), 케체메트(Kecskemét), 

그란(Gran) 교두보, 줄러(Gyula), 니트라(Nitra), 밥 캐슬(Bab Castle) 

그리고 라(Laa)에서 싸웠는데, 밥 캐슬에서의 전투 당시 크니스펠은 

한 전투에서 24발의 적 포탄을 맞기도 하였다.

 이후 보지츠(Wostitz)에서 다른 전차장 스코다(Skoda) 상사와 함께 

치명상을 입은 크니스펠은 우르바우(Urbau)의 한 야전병원에서 사망하여 인근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보다 전에 사망한 스코다는 소헤를(Socherl)에 묻혔다. 

그가 사망한지 열흘이 지나서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다. 












2013년 4월 10일 체코 정부는 우르바우의 한 교회 뒷뜰에서 15구의

독일군 시신을 발굴한 소식을 전하며 이중 한명이 크니스펠이라고 밝혔다.
당시 그는 군번줄을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다. 

그는 브르노(Brno)에 있는 군인묘지로 이장될 것으로 보인다. 

 적 전차 격파수 공인 168, 비공인 195대의 전차 파괴 댓수는 

2차 세계대전 최고의 숫자이며, 이중에는 3,000 m 거리에서 T-34를 격파한 사례도 있었다. 

그는 장전수, 포수, 그리고 전차장으로 대부분의 독일 전차에 탑승해보았다. 

그는 15대의 전차를 격파하였을때 일급 철십자 훈장(Iron Cross First Class)을 받았으며 

100대의 전차를 격파하였을때 금색 전차 돌격장(Tank Assault Badge in Gold)을 받았다. 

공인 126대(비공인 146)를 격파하였을때는 금색 독일 십자훈장(German Cross in Gold)을 받았다.

 그는 전차부대에서 장교 출신이 아닌 인물로는 유일하게 

국방군 공보방송(Wehrmachtbericht, Wehrmacht communique)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티거 I과 티거 II를 타는 동안 그는 42대의 적 전차를 추가로 파괴하였다. 

 그는 네번이나 추천을 받았지만 다른 2차 세계대전 전차 에이스들이

 다 받은 기사십자장(Knight’s Cross)을 받지는 못했다. 

다른 전차장들과 달리 크니스펠은 훈장에 대한 욕심이 없었으며 ‘인후염’에 걸리지 않았다 ]

– 여기에서 ‘인후염’이란 기사십자장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독일 육군 내 은어였다. 

같은 전차를 격파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면 크니스펠은 언제나 양보하였고,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고자 하였다.  

크니스펠의 승진이 늦었던 것은 나치 당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소련 포로를 학대하는 처형부대(Einsatzgruppen) 장교를 구타한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그는 군인으로서 요구되는 모습도 잘 따르지 않았으며, 

염소수염을 기르고 머리도 규정보다 길게 길렀다. 

그가 군 형무소에 가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그의 전차 격파 기록 뿐이었다


 

 

 

 

 



 

 

독일 기갑부대의 탑 에이스 쿠르트 크니스펠과 그의 332번  쾨니히스티거(킹 타이거) 전차 - 1944년 9월






 

제 2차 대전 당시 유럽전에 참전한 모든 독일 전차병들중

최고의 전차 에이스는 정작 쿠르트 크니스펠이라고 볼수 있다.

그의 적 전차 공인 격파 댓수만  168대이다.

(비공인 격파로는 200대에 다다른다고함...

그의 모든 동료들은 격파댓수에 대해서 그 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거라고함)

하지만 그는 미하일 비트만및 오토 카리우스와 독일 외무부 장관 요아힘 폰 리벤드롭의 아들

루돌프 폰 리벤드롭및 오토 에른스트 레머등의 다른 에이스들에 비하여 훨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쿠르트 크니스펠은 독일 4호전차부터 Tiger 1 ,Tiger 2 전차까지 탑승했으며
전쟁초에는 장전수로서 그리고 포수로서 나중엔 전차장으로 모든 병종을 섭렵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일군의 최고 훈장이라고 할 수있는
기사십자장은 수여 받지 못하였다.
위에 비교가 되는 전공을 세운  전차병들이 전공을 바탕으로 기사십자장은 물론
그 윗단계인 백엽기사십자장, 백엽검기사십자장을
즐비하게 받았음에도 크니스펠은 겨우 철십자대장 정도만 수여 받았다.
그가 모신 상관들은 줄줄이 출세해서 기사십자장 포함 훈장받고 줄진급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의 성격탓과 주변상황이 겹쳐서 였다.

1. 그는-동료들의 중언에 따르자면-승진이나 훈장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전공을 입증 해서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논란거리가 있는 전공은 전부 동료들에게 양보했다.

2. 그는 너무 평범한 졸병이었다.

 장교이었거나 SS도 아니었고 작은키에 면도를 하지않아

 털보처럼 해다니는 병사를 나치 독일 육군의 수뇌부에서 

전차전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기에는  2%가 부족했던 것이다.


3. 단기간에 강력한 임팩트 있는 활약도 없었고 무슨 극적인 이야기 거리가 없었다.

비트만이 쿠르스크에서의 맹활약이나 완전히 만화같은 빌레르 보카쥬 전투의 대활약이나
   오토 카리우스의 말레니파 전투같은게 이야기 거리가 없다.
  
그는 불운하게도 4번이나 기사십자장 수여 후보로 올랐으나 결국은 수여 받지 못했다.
더 불행한건 전쟁이 끝나기 불과 일주일을 남기고 전사했다.



[쿠르트 크니스펠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남긴 교훈]

 

1,사람 좋은게 좋은것만 아니다,

1. 아무리 승진에 관심이 없어도 일을 했으면 성과는 항상 어필해야 된다.

2. 이발과 면도를 깨끗하게 해서 깔끔한 외모를 상관들에게 보여주어야 된다.

 

 

 

 

photo from : 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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