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러시아 어린이들의 군인 무덤 꽃다발 헌화 - Soldier tomb wreath bouquet of Russian children

슈트름게슈쯔 2015. 10. 16. 19:12



모스크바 인근 르제프 전투에서 사망한 소련군 병사의 도로옆 무덤에 

들에 핀 꽃들을 따서 꽃다발을 헌화하는 어린이들 - 1942년 7월 




독일군에 의해 사망한  미군병사들에게 주변에 핀 꽃을 따다가 

헌화하는 해방된 수용소의 러시아 여성들과 어린이 - 1945년 5월 


이 러시아 인들은 미군을 살해한 독일군 장교들이 항복하는 것을 목격했다.



인류에게 있어서 꽃다발은 여러가지 문화의 의식에 이용되지만 

그중 장묘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죽은 사람은 무덤에 꽃다발을 갖다 바치는 의식은 문자가 발명되기 훨씬 이전이었던 

인류의 선사시대부터 현재가지 이어져 내려오는 오래된 의식이다.



영국의 어린이들은 지난 몇백년에 걸쳐 뜻도 모르면서 

다음과 같은 불길한 동요를 불러왔다.

이 노래는 1665년 페스트(흑사병)가 유행했던 런던 거리에서 아이들의 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우연하게도 나온 이 노래의 뜻은 페스트의 증상과 무서움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장미꽃 반지 끼면
    주머니엔 꽃다발 가득,
    에취! 에취!
    우린 모두 쓰러지네.

    Ring a ring o' roses,
    A pocket full of posies,
    A-tishoo! A-tishoo!
    We all fall down

위의 소절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다른 구절들도 전해진다.

    The King has sent his daughter    왕이 그 딸을 보냈네
    To fetch a pail of water                물을 한동이 가져오라고
    ah-tishoo, ah-tishoo                    에취! 에취!
    We all fall down.                         우린 모두 쓰러지네.

    The bird upon the steeple            첨탑 위의 새가
    Sits high above the people           사람들 머리 위로 높이 앉네
    ah-tishoo, ah-tishoo                    에취! 에취!
    We all fall down.                        우린 모두 쓰러지네



이 노래는 1665년 페스트가 유행했던 런던의 거리에서 부르기 시작했다.
"장미꽃 반지"는 페스트, 즉 흑사병에 걸린 사람에게 나타나는 조그만 빨간 발진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머니엔 꽃다발 가득"이란, 사람들은 옛날부터 악취는 병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악마의 독한 숨결이라고 믿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약초와 꽃이 악취를 막아낸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에도 영국의 판사들은 갖가지 의식에 꽃다발을 가지고 다니는데,
이는 그들의 옛 선임자들이 장티푸스에 대한 예방조처로 꽃을 갖고 다닌 데서 유래한 것이다.

"에취! 에취!"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재채기가 병에 걸렸음을 나타내는 증상이었다.

"우린 모두 쓰러지네"...... 그야말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쓰러져 죽었던 것이다.
14세기 중엽, 먼 아시아의 변두리에서 시작하여 유럽을 휩쓸었던 악명 높은 흑사병의 유향으로
최소 25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선'페스트의 대 유행은 모피 사냥꾼의 탐욕이 그 원인이었으며, 불과 7개월 동안 6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병은 모피의 수요가 세계적으로 높아져서 몰모트의 모피값이 4배나 뛰어올랐던 1910년에, 시베리아 동부지방에서 발행했다.
설치류 동물인 몰모트의 모피는 검은 담비 털가죽의 대용으로 팔리고 있었고,
오랜 옛날부터 이 동물을 잡아온 몽고인들은 그 생태를 알고 있었으며,
이따금 이 동물이 이상한 병에 걸린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몽고인들은 아무도 병든 동물을 사냥하려 들지 않았다. 또 몰모트의 고기와 지방을 별미로 치고 있었지만,
겨드랑이 밑의 지방 조직 덩어리-임파선-는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민들 사이의 금기였다.
임파선에는 죽은 사냥꾼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있었고,
몽고인들은 또한 이 임파선이 병에 걸려 있는 수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병은 이따금 사람에게도 감염되며, 어느 사냥꾼이든 이 병에 걸리면,
몽고인들은 그 환자를 방치하여 운명에 맡겼다.

1910년, 수천명의 중국인들이 모피 붐을 타고 이동해왔다.
중국인들은 병들어 쉽게 잡히고 마는 몰모트를 만나면 그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사냥꾼이 병에 걸리면, 그의 동료들은 그 병이 동물로부터 옮은 '선'페스트인 줄 모르고 환자를 정성껏 간호하였다.

그리하여 이 페스트는 수렵지로부터 중국 동부철도의 종점인 만주리까지 퍼졌으며
마침내 철도 연변으로 2700km나 퍼져 수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페스트는 원래 사람의 병이 아니라 쥐의 병이다.
이 병은 박테리아가 일으키는 병이며, 벼룩에 의해서 설치류의 한 동물로부터 다른 동물에게 전염된다.

이 병에는 크게 두 타입이 있는데, '선'페스트와 '폐'페스트로 나눌 수 있다.
감염된 설치류의 몸에서 옮아온 벼룩이 사람을 물면, 물린 자리나 겨드랑이 밑, 사타구니 등이 부어오른다.
이처럼 임파선이 부어오르기 때문에 '선'페스트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폐'페스트는 병든 설치류를 다루다가 박테리아가 호흡을 통해 감염되며,
그 다음에는 호흡을 통해서 이 사람 저사람 옮는 것이다.


페스트가 크게 창궐할 때에는, 인구의 90%까지 감염되는 경우도 있다.
'선'페스트의 치사율은 60~80%이며 '폐'페스트의 경우는 99%이상에 이른다.



인간은 유사 이래 줄곧 페스트의 발병으로 시달려왔다.
바빌론에서는 기원전 3000년에 남타르라고 부르던 페스트의 유행이 있었다.
남타르는 역병의 액신을 일턷는 호칭이었다.

페스트는 수 억에 달하는 인명을 앗아갔으며, 그야 말로 역사를 바꾼 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기 54년, 세계 최악의 페스트가 이집트로부터 궁요 교역로를 따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페스트는 소아시아를 거쳐, 콘스탄틴노플, 그리스, 이탈리아... 더 나아가서 라인강 유역까지 번졌다.
이 병은 52년간이나 창궐하였다.
당시 1억명의 희생자가 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수는 당시 알려져있던 세계 인구의 매우 많은 부분에 해당한다.


이후, 로마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교역로도 파괴되었고, 그 후 약 8세기 동안은 페스트의 대유행 기록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사제 '비드'가 그의 저서 "앵글로색슨 연대기" 속에서 적은 예가 있다.
그는 서기 664년에 영국과 아일랜드에 유행했던 "대역병"에 대해 기술 하면서
'선'페스트에 해당하는 병의 증세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4세기 초,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종파의 하나) 전도사들이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새로운 루트를 여행하고 있었다.
1338년과 133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전도사들의 무덤이 그 루트를 따라 발견되고 있다.
이들 방랑 전도사들 중 일부가 외몽고에서 페스트에 걸린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유럽에 쥐가 흔히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것이 그 후 60년간 유럽대륙을 휩쓸었고,
또 이후 4세기동안 세계를 공포에 떨게했던 흑사병의 원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14세기에 만들어진 흑사병 " Black Death"는 중세 라틴어에서 온 것이다.
라틴어에서 "흑"이라는 말은 공포를 의미했던 것이다.

1348년 피렌체에서는 약 100만명이 사망했다.
같은 해, 당시 아비뇽에 살고있던 교황 클레멘트 6세는 로마순례를 제창하였다.
이로인해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약 800km가 넘는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10만도 되지 않았다.



전염병이 최고조에 달한때에는 론강이 희생자의 묘지로 사용되었다.
달리 시체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14세기말까지 2500만이 사망했다.
이것은 당시 유럽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가장 악병 높은 유행은 1665년 6월 런던에서 시작된 유행이었다.
런던에서는 만연하는 페스트를 막기위해 취해진 방역법의 하나는 고양이, 개, 쥐 등을 태워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역법은 너무나 규모가 작고, 너무나 뒤늦은 조치였다.
결국 1666년까지 6만 8천의 런던시민이 사망했고, 전 유럽은 다시한번 대 흑사병이 창궐할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러던 중, 1666년 9월 2일, 런던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았던 지역의 중심부인 푸딩 레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는 세계 3대 화재로 기록될 만큼 큰 화재로 기록되어있다.
한 빵 공장에서 시작되어 늦은 초기대응으로 대화재가 되어버린 이 화재는 당시의 런던 시가지의 대부분인
좁은 골목과 목조 건물의 구성에 힘입어 성 바오로성당을 포함해 1만3천여 가구를 태워버렸다.
이 수치는 런던 가구의 85%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이 화재로 런던 시민 8만중 7만이 이재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 불길이 전염병의 만연을 부채질했던 그 비위생적인 환경도 함께 불태워 없애 주었고
흑사병도 더 이상 창궐하지 않게되었다.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페스트가 대 유행한 것은 1720년 마르세이유였다.
그림이나 글로 묘사된 것을 보면, 당시 의사들은 두꺼운 옷에 가죽장갑을 끼었고
새 부리와 같이 생긴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마스크의 끝부분에는 냄새를 막는 약초가 들어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냄새가 병을 퍼뜨린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약초들이 불길한 동요의 "주머니엔 꽃다발 가득"이라는 구절과 연관이 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페스트는 극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쩌면, 당시 유행하던 속담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속담의 내용은
만약 페스트가 발생하거든, "빨리 달아나라, 멀리 달아나라, 그리고 늦게 돌아오라"
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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