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매국노 반역자 배신자의 대명사 노르웨이의 쿠이슬링-Norway Quisling of the pronoun of traitor

슈트름게슈쯔 2015. 12. 10. 23:41



노르웨이의 매국노 쿠이슬링(1887~ 1945) 


그의 이름은 유럽에서 배신자,배반자,반역자,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초기 노르웨이를 침략한 나치 독일 SS를 영접하며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괴뢰정권의 수반으로 나선 노르웨이의 매국노 반역자 쿠이슬링





노르웨이 오슬로의 전부 청사에서 나치 독일 SS로 부터 기치를 전달 받는 

노르웨이의 친독파 매국노 비트쿤 쿠이슬링 - 1942년 9월 7일 





노르웨이의 쿠이슬링과 독일 SS 친위대 집단 지휘관 (Gruppenfuhrer) 펠릭스 슈타이너




노르웨이 노보고르드 지역 칼리노보 마을의 거리에서 

Sdkfz 10 독일군의 하프트랙 병력수송차에 탄  쿠이슬링과 

나치 독일 SS 친위대 집단 지휘관 (Gruppenfuhrer) 펠릭스 슈타이너 






노르웨이의 쿠이슬링과 나치 독일 SS 친위대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 



 

한국에서 민족 반역자 매국노의 대명사는 이완용이다.

이완용은 조선 말기 일제의 조선 침략과정에서,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이었던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의 다섯명 을사 5적 가운데 

한명으로 다섯명의 매국노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도 이완용같은 매국노가 있다.

그는 바로 쿠이슬링(Quisling)이다.

쿠이슬링이란 이름은 유럽 전역에서 

배신자,배반자,반역자,매국노의 대명사로 통용된다. 

언어사전에도 쿠이슬링(Quisling)은 반역자, 매국노와 동의어로 등재되어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린다.

비드쿤 쿠이슬링(Vidkun Quisling : 1887~ 1945년 10월 24일)은

 노르웨이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다.

그는 텔레마르크 주 에서 태어났으며 1942년 2월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노르웨이 정부가 런던에 망명해 있는 동안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총리직을 지냈다.

종전 후 그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총살되었다

쿠이슬링은 노르웨이의 퓌러(Führer, 총통; 히틀러의 칭호)로 불렸다.

그는 오슬로의 뷔그되위(Bygdøy)에 있는 별장에서 살았는데,

북유럽 신화에서 딴 김레(Gimle)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쿠이슬링은 노르웨이의 군사사관학교 생도 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후 노르웨이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소련에서 1920년대 기근 당시 그곳에서 난민 구제 사업을 하던 탐험가

프리티오프 난센(Fridtjof Nansen)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농민당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노르웨이의 헌법 기념일인 1933년 5월 17일 쿠이슬링은 지방 검사

요한 베른하르드 요르트와 함께 민족 단일당(Nasjonal Samling)을 창당했다.

민족 단일당(Nasjonal Samling)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당을 

본따서 만든 노르웨이의 반(半)민주주의 노선을 취한 지도자 중심의 정당이었다.

민족 단일당(Nasjonal Samling)은 쿠이슬링이 당에서

 히틀러가 나치당에서 맡은 역할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민족 단일당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으나 1935년을 전후하여

노골적인 친독 반유대 노선을 취하기 시작하자 지지는 줄어들어

나치 독일의 침공 당시 당원수는 2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치 독일이 1940년 4월 9일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왕과 정부가

북쪽으로 피난간 혼란을 틈타 쿠이슬링은 

세계 최초로 라디오 뉴스 시간에 쿠데타를 선언한 이가 되었다.




세계 최초로 라디오 뉴스 시간에 쿠데타를 선언하는 노르웨이의 반역자 비드쿤 쿠이슬링(Vidkun Quisling) - 1940년 4월 9일







노르웨이의 반역자 비드쿤 쿠이슬링(Vidkun Quisling)과 요제프 테르보펜(Josef Terboven)




쿠이슬링은 히틀러와 전해에 면담한 바 있어 독일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독일은 노르웨이를 직접 지배하기를 원하여

 쿠이슬링이 수립한 정부는 닷새 만에 해체되고

요제프 테르보펜(Josef Terboven)을 노르웨이의 통치자(Reichskommissar)로 앉혔다.

테르보펜과 쿠이슬링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테르보펜은 높은 자리에 노르웨이인을 앉히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는지

 1942년 쿠이슬링을 정부수반(총리에 해당)으로 임명하여

1943년 2월 1일부터 직책을 맡게 했다.

쿠이슬링은 노르웨이가 독일 점령하에서 벗어난 뒤

 다른 두 명의 민족단일당 지도자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총살되었다.

망명 정부는 나치독일의 점령기간 동안의 나치협력자들에 대한 종전 후

 재판을 대비해 사형제도를 부활시켰었다.

 이 때문에 후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독일 베를린을 방문하여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는 노르웨이의 매국노 쿠이슬링-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쿠이슬링"이 반역자의 대명사격의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신조어는 이미 크비슬링 생전에도 사용되었다.

일례로 당시 "베를린을 방문한 비드쿤 쿠이슬링"이라는

제목의 풍자만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쿠이슬링: 저는 크비슬링입니다.

 

히틀러: 그리고 이름은

 

쿠이슬링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


히틀러는 '저는 반역자입니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는 풍자였다.

 

 




 


photo from : Histom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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