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진해 경화동의 일본군 욱일기 믹스 간판 점포 - Japanese Military Flag style Mixed store signboards in the GyeongHwa Dong Jin Hae Korea

슈트름게슈쯔 2016. 9. 5. 20:33



2차 세계대전 말기 진해항과 경화동의 항공사진 - 1945년 




근래의 진해항과 시가지의 인공위성 사진



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및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를 침략한 

나치 독일은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모두 색출하여 그들이 지정한 거주 지역으로 

강제로 이동시켜 담을 쌓아 바깥과 격리시킨 구역인 게토를 곳곳에 만들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조선의 진해에서도 게토와 같은 한인 거주 구역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일제 강점기 일본군부에 의해 강제로 조성된 진해신도시는 

식민지 시대 여느 도시처럼 기존 시가지에 일본인이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해안·비옥한 농토와 함께 평화롭게 살던 

마을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만든 도시였다. 

그리고, 이 도시의 뒤에는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한국인들의 신도시 ‘경화동’이라는 음지가 있었다. 

 진해 현지조사단이 해군대신 재등실(齋藤實) 앞으로 보낸 

‘진해군항시설지 실지답사보고서’라는 서류가 있다. 

 거기에는 진수부·공창·수뢰단·화약고·대포발사장·병원·

연병장·관사·시가·정차장·묘지·학교 등 제반시설의 위치와 규모를 결정하고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 끝에 「실지조사를 바탕으로 각 조사원의 소견이 일치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라며 6개 항을 붙여 놓았는데 그 4번째에 ‘한국인 처리’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내용은 「한국인을 일본인과 함께 살게 하는 것은 위생 등의 문제로 불가하다,

 격리하는 것이 맞다,

 격리시킬 위치는 신시가지 동쪽에 있는 덕산방면이 좋다」라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덕산방면’은 최종결정 때 신도시와 

덕산 사이의 중간지점(속칭 한일거리)으로 바뀌었다.   

시가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지점에 조선인 거주지를 만들면 

신도시조성과정에 필요한 노동력공급이 불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책에 의해 일제는 1907년 3월 강제적 수단을 동원하여 마을을 철거하기 시작하였다.  

값싼 지대에 불만을 품은 한국인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땅값지불은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 속에 진행되었다.  

진해에 일본군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진해주민들의 저항이 많았다.  

만이 개(도만포) 부근에서 측량하던 일본해군을 쫓아내기도 하고(1905. 5), 

토지보상비를 거부하기도 하고(1906. 10), 

한국인 소유의 산림을 집어 먹으려는 마산부윤 아들의 횡포를 

돌리(석동)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막아내기도 했다(1910).  

하지만 힘 없는 주민들이 일본군부의 강제력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1개 마을의 390여 호 2천여 명의 한국인들은 조상 대대로 일구고 살았던 땅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일본군들이 이미 준비해둔 신도시 동쪽 약 2.5키로 지점의

 ‘한일거리’라고 불렀던 벌판에 강제로 집단이주 당했고, 

이들에게는 가구당 45평 정도로 구획된 택지를 받았다.  

격리당한 한국인들의 땅 한일거리는 이후에 ‘경화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한국인들의 집단 거주지역이 되었다.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구 진해시) 경화동에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거주했던 적상 가옥 - 2016년 9월 6일 




경화동 주택가의 45평 가옥들 


경화동에는 약 4m내외의 좁은 도로가 격자형으로 배치되었고,

 길 중간 중간에 소방 목적의 7개 공터가 주어졌다.    

 이 공터는 후에 일본의 군사시설(비행장) 때문에 열지 못하게 된 

풍호동 ‘풍덕개장’이 옮겨와 매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 장터로도 사용되었다.  

7개의 공터는 각각 장터로서의 기능이 달랐는데 

①은 나무전, ② 8일 싸전, ③ 3일 일용잡화, ④ 8일 일용잡화, 

⑤ 3일 고기전, ⑥ 3일 싸전, ⑦ 8일 고기전이 열렸다. 

 이런 전통으로 경화동에는 지금도 5일장이 열리며 상설재래시장도 열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만들어졌던 경화시장 근처의 공터 


현재는경화동 주민들의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식민지 도시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생활공간이 격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해의 경우처럼 기존마을 주민들을 내쫓아 격리시킨 후 

그곳에 지배자만의 도시를 건설한 사례는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경화동은 한이 맺힌 통한의 공간이었다.

격리명분이 위생문제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치안문제 때문이었던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교육에 있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차별화하는 

일본의「내선별학(內鮮別學)」통치원리로부터 온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거기다가 군사기밀이 필요한 군항도시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강제력으로 건설한 진해신도시는 ‘빼앗은 자의 도시’였다.  

경화동은 쫓겨나간 한국인들의 격리구역, 즉 ‘빼앗긴 자의 구역이었다.  

그것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한후 유대인들을 강제적으로 연행하여 

그들을 모두 지정한 구역으로 이동시켜 가두어 두는 공간이었던 게토와 비슷했다.  

 그리고 더욱 치욕적인 사실은 일제가 경화동의 위치를 신도시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인 

일본인들 자신들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시킬수 있는 적절한 거리’에 둠으로써 

지배자로서의 조선인의 노동력 착취를 위해 경화동이라는 곳을 

도시공간 배치로 지정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만큼 진해 경화동은 일제 강점기 당시 나라의 처절한 역사가 스며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진해 군항제 벚꽃 축제시 경화역 풍경 



미국 CNN이 선정한 대한민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50곳 중에서

 다섯번째로 선정된 진헤 경화역은 

 해마다 4월의 봄철 진해 군항제 시기에 기차역 철길 주변에 

만개한 벚꽃 터널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한 벚꽃 관광 명소이다.

그러한 진해 경화역 또한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철도역이었다. 

진해 경화동에는 현재에도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 군부에게 할당 받은 45평 택지 구획에 따라 

오래된 대부분의 가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정주택과 점포들의 토지 평수가 모두 고만 고만하게 45평 정도 임을 눈 여겨 볼수 있다.

그러한 경화동에 예전에 농지였던 공간은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면서 

곳곳에 새로들어선 빌라 건물과 상가건물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중에는 소위 땅과 주택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면서 

일제 강점기 당시 한이 맺힌 진해 걍화동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일제의 침략에 대한 역사 의식이 희박한 형태의 점포도 존재한다.








진해 경화동의 일본군 욱일기 스타일 믹싱 간판 - 2016년 9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