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성의 역사 쾌락의 제국 로마 다큐멘터리

슈트름게슈쯔 2017. 6. 6. 22:31



로마 제국의 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흉상 



티베리우스 (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는 로마 제국의 제 2대 황제이다. 

그는 아구구스투스의 양자로 들어가기 전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였다.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였던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이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42년  11월 16일에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에서 태어났다.  

수에토니우스는 위의 기록을 제시하면서 다른 견해도 밝히고 있는데 

티베리우가 외할아버지의 출생지이자, 훗날 티베리우스 시절 

원로원의 지시로 운명의 여신상이 세워진 푼디가 

티베리우스의 출신지라는 학설과 기원전 43년생 혹은 41년생이라는 학설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공식 관보와 달력에 기원전 42년에 

팔라티누스 언덕이 티베리우스의 출생지라고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 학설들은 근거가 부족하다며 부정하고 있다. 

티베리우스는 반 아우구스투스파였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반란때 참여하자 1세때 부터 로마를 떠나서 

페루시아와 네아폴리스, 시칠리아, 그리스로 도망다니며 생활을 해야만 했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도피 당시, 네아폴리스에서는

 몰래 항구로 도망치던 중, 티베리우스가 2차례 울음을 터뜨려 

일행이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이때 일행들에 의해 버려질뻔 했는 기록도 있다.

 그 후로도 어딘가에서(이탈리아 반도로 추정) 어머니 리비아가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할 때 숲에서 산불이 났고 

티베리우스 모녀는 이 산불에 휩쓸려 죽을뻔 했다가 

간신히 머리와 옷만 그슬리고 살아남았다. 

그리스에서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티스였던 

스파르타인들의 공공 탁아소로 맡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의 고난들은 티베리우스에게도 가슴 깊이 남았는지

 티베리우스는 시칠리아에서 어머니가 폼페이아에게 받았던 

망토와 핀 금제 장식들을 보관했고 100여년 뒤인 

오현제(안토니우스 피우스,하드리아누스,네르바,트라야누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절인 

수에토니우스도 바이아이에 남아있던 이 유물들을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티베리우스가 3살이었을 무렵에 사면령이 내려져 

티베리우스 일가는 로마에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리비아의 미모에 반하여 티베리우스 네로에게 

이혼을 하라고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부모는 이혼하고, 

리비아는 티베리우스 네로의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하였다.

 티베리우스는 리비아가 결혼 직후에 출산한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에게 거두어져 양육되었다. 

티베리우스가 9살 때 아버지가 죽어 드루수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에게로 가서 같이 살게 되었다. 

 청소년으로 성장한 티베리우스는 벌써 로마의 제일인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있던 옥타비아누스 휘하에서 겨우 12세에 나이로 정무나 군무업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29년 8월,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한 개선식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조카 마르켈루스와 함께 개선식에 참가하였다. 

그 후 드루수스와 함께 군단의 사령관으로서 각지에 파견되어 

자신이 유능한 장군임을 계속 증명해보였다.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원수직을 세습시킴으로써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유지할 생각으로 후계자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조카 마르켈루스와 동지인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등이 

후보로 생각해서 자신의 딸 율리아를 처음에는 마르켈루스에게,

 마르켈루스가 요절한 후에는 아그리파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사이에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두 형제가 태어나자 

두 명의 손자들을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보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두 명의 손자들의 후견인으로서 아그리파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율리아가 또다시 미망인이 되자 

당시 자신의 친척 중에서 최연장 남자인 티베리우스를 후견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와 그의 첫 번째 아내 폰포니아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하였으며,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셋이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빕사니아와 이혼시켜 율리아와 결혼하게 만들었다.   

티베리우스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동전.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와의 이별을 슬퍼했지만 율리아와의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윽고 품행이 좋지 않던 율리아의 행실로 부부 사이가 악화되어, 

티베리우스는 자진하여 로도스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율리아는 

간통죄를 추궁받아 티베리우스와 이혼을 당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2년에 로마로 귀환하였지만, 

후계자 후보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이미 요절한 상태라 

소거법적으로 티베리우스가 원수의 후계자 후보가 되었다. 

 기원전 4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된다.

 그 때, 티베리우스에게는 친아들 소(小)드루수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삼게 된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며,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이 흐르는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해, 티베리우스에게 두 번째의 호민관 직권이 주어졌다. 

 티베리우스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된 아그리파의 아들 

아그리파 포스트무스는 양아들 결연이 파기되어 추방되면서, 

티베리우스는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13년에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서, 사실상 공동황제가 되었으며, 

서기 14년부터는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노환으로 실질적으로 단독 황제가 된다. 

 이윽고,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장에 의해 유산의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단독 원수가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서 

금융 위기 대택, 변경 방위망 확립 등 뛰어난 행정 수완을 발휘했다. 

그렇지만 황제 주최의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키는 등 

재정 낭비 중단 정책을 단행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도는 낮았다.

그는  서기 26년 ~ 사망 (서기 37년) 까지 카프리 섬에 은거하여,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를 통해서 로마를 통치했기 때문에,

 그의 인기는 한층 더 떨어지게 되었다.

 또한, 29년에 이루어진 아그리피나 소탕작전은 

더욱 티베리우스의 인기를 떨어뜨렸으며, 

서기 31년 10월 28일에는 권력욕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던

 세야누스(Sejanus)를 교묘한 전략을 사용해 처형하기도 했다. 3

7년, 79살에 병에 걸려 사망한다.




틴토 브라스 감독의 영화 칼리굴라(1979)속 티베리우스황제역의 배우 피터 오툴(Peter O'Toole) 







로마 제국의 제 3대 황제 칼리굴라의 두상 



칼리굴라(Caligula)는 로마 제국의 제 3대 황제이다. 

본명은 가이우스이며 칼리굴라는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가 지휘하고 있었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귀여워하며 붙여준 '꼬마 장화'라는 뜻을 가진 별명이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대(大)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또한 네로의 어머니인 소(小) 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려 군단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차례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의해서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메루스와 함께 제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사망 당시 77살)의 젊은 후계자(즉위 당시 24살)로서 

칼리굴라의 제위 계승은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성사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치세 만년에 공포 정치를 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유서에 티베리우스 게메루스를 공동상속인으로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유서를 무시하고 칼리굴라가 단독상속인으로서 황제로 취임했다.  

칼리굴라는 황제 취임 직후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켜 

로마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고열이 나 쓰러져 심하게 병을 앓은 뒤에 그 후유증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하고 미친듯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칼리쿨라는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한 내용으로 바꾸고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도박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마차를 끌어온 인부에게 거액을 주는 등

 국고를 탕진해 재정을 파탄시키고 이로 인해 민심의 급속한 이탈을 불러왔다. 

또 자신과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시키는 등 비(非)정상적인 통치를 하였다. 

특히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맺고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신들과 같은 복장을 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는데, 이러한 기행은 여러 번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그는 41년 1월, 팔라티누스 경기 도중에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Cassius Chaerea) 등에 의해

 아내, 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의 통치기간은 3년 10개월이었다.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 원로원이 제정 대신 로마 공화정의 부흥을 기획했었지만,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무산된다.




틴토 브라스 감독의 영화 칼리굴라(1979)속 칼리굴라 황제역의 배우 말콤 맥도웰(Malcom McDo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