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서울의 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당이었던 박문사

슈트름게슈쯔 2017. 9. 4. 10:44




일제가 조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뜯어 만든 박문사의 정문 경춘문(慶春門) - 1954년 





한국 6.25 전쟁 직후 박문사 옆의 미군 지프 - 1954년 



박문사(博文寺)는 일제 강점기에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동쪽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사찰이었다. 

 장충단은 본래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기리기 위해 대한제국 고종이 쌓은 제단이었다. 

 이 곳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에 대한 항일 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짓고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호이다. 

박문사는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의

 친일부역자와 그외 천여명의 참석하였다.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가 발기하여 세워진 소토슈 사찰로 건평은 387평이었다.

 설립 목적은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박문사 건축에는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이 사용되었으며,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하여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박문사를 도쿄가 아닌 서울에 박문사를 지은 이유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이십오년사(施政二十五年史)에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위해 

기획되었다'고 박문사 건립 이유를 전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의 산봉우리마다 쇠말뚝을 박아 혈을 끊으려 했던 

그들의 행태를 보건대, 일본에 항거하다 순직한 이들을 기리는 

장충단에 박문사를 지은 것 역시 '쇠말뚝 박기'의 목적과 하등 다를 바 없던 것이다.  

정말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굳은 정신적 결합'이 가능했는지, 

1939년 11월에는 이광수와 최린, 윤덕영 등 대표적 친일 인사들을 비롯한

 1천여명의 사람들이 박문사에 모여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한일합방 공로자를 위한 감사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들은 통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이었기에, 

박문사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계획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랬기에 일본 위정자들의 관심도 남달랐다. 

왕정복고와 메이지유신, 헌법 초창, 한국과 만주 지배 등으로 공헌한 것을 이유로

 이토를 충정군(忠貞君)에 봉한 바 있는 일황 히로히토는 

박문사 낙성식 때 은으로 만든 대형 향로와 향화료(香華料)를 하사했고, 

일본 황족들은 꽃병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이 행사에 조선 총독 우가키와 내로라하는 친일파들도 참석해 자리를 지켰음은 물론이었다. 

일제는 남별궁의 석고각과 광화문 담장, 경희궁 흥화문, 

경복궁 선원전 등을 뜯어다 박문사 건축에 이용했다. 

 박문사 건축은 궁궐 파괴와 병행하여 진행됐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느라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던 광화문 양쪽 옆의 담장 석재를 가져다 

박문사의 담을 쌓았고, 경복궁 선원전과 그 부속 건물을 옮겨다가 박문사 건물로 삼았다. 

또 지금의 조선호텔과 원구단 자리에 있던 남별궁의 석고단을 덮고 있던 

석고각을 해체해 박문사의 종 덮개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문은 더욱 가관이었다. 

1932년 당시 이미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경성중학교로 변해버린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가져다 이토를 기리는 박문사 정문으로 쓴 것이었다. 

조선 5대궁의 하나인 경희궁 대문을 떼어다가 

그 원수 격이라 할 수 있는 이토의 사당 정문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토는 죽어서도 철저히 조선 파괴에 앞장선 셈이었다.  

그들은 장충단을 놀이 공원화하는 한편 박문사는 성역화하는 수순을 밟았다.

 조선의 궁궐은 야합과 음모, 무능의 공간으로 선전하며 파괴하는 한편 

박문사는 서울은 물론 한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 부각시켜 갔다. 

당시 여행 안내책자인 [경성지방의 명승사적]에서는

 "경내는 자연 노송으로 둘러싸여 전아장중한 사원의 단벽(丹碧)과 잘 조화를 이루고, 

풍광명미(風光明媚)하여 경성의 명소로서 가장 뛰어난 곳의 하나"라고 박문사를 묘사하고 있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참석하고 히로히토 천황과 황족들의 하사품도 전해졌다.  

1937년에는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을 위한 '정신기지'로 삼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이 곳에서 이토를 포함하여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 

한일 병합 공로자를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용구의 아들인 이석규가 흑룡회와 함께 개최한 이 행사에는 

이광수와 최린, 윤덕영 등 약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박문사 사찰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철거되었다.

곧이어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각계 인사 수백 명이 장충단에 모여

 안중근 동상을 박문사 자리에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안중근 동상 건립은 지지부진했다. 

1959년이 되어서야 박문사 터가 아닌 남산 중턱에 세워졌다.   

박문사 자리에는 1967년 영빈관이 섰다. 

정부의 영빈관이다가 1973년 기업의 영빈관으로 넘어갔다. 

박문사는 사라졌지만 그곳으로 오르는 길고 가파른 돌계단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