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극장

오디 머피의 독일 전차 수리병들 총류탄 사격 - Audie Murphy rifle grenade firing to German tanks repair crew

슈트름게슈쯔 2018. 3. 14. 12:27



몬테카시노 전투 당시 연합군의 포화에 캐터필러가 파괴된 독일 4호 전차를 수리하여 사용하기 위해 

파괴된  캐터필러를 종륜 위로 걸어 밀고 당기며 무한궤도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벌이는 독일군 - 1944년 1월  




2차 세계대전 말기 노르망디 내륙지역 생로 공격 첫날 르 데제르에서 

M1 카빈 소총에 M9A1 총류탄을 장착시키는  미군 병사 - 1944년 7월 11일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10년후 미국의 영화배우가 되어 다시 총을 잡고 

 [To Hell and Back] 영화속 유럽 전선의 전투씬 연기를 펼치는 오디 머피 - 1955년  










불타는 전장(To Hell and Back 1955) 속에서 안지오 전투 당시 주간 전투에서 캐터필러가 파괴되어 

전선에 버려져 있는 독일군 전차(미국제 M41 워커 불독)를 수리하여 재사용하기 위해 

야간의 어둠을 이용하여 파괴된 전차에 몰래 접근하여 무한궤도 연결 수리 작업을 벌이는

독일 전차 수리병들을 발견하고 M1 카빈 소총에 장착시킨  M9A1 총류탄을 발사하여

  수리 작업을 저지시키는 미군 병사 오디 머피






오디 머피가 전투에 사용했던  M1 카빈 소총 



  

디 머피(Audie Leon Murphy 1926 ~ 1971)



  디 머피는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27개월 동안 유럽 전선에서 미군 병사로서는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받은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전쟁 영웅이다.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으로 수여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명예 훈장과 은성 훈장등의 군인 훈장과 국가 기장이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훈장과

 수여장 5개 등 총 33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이등병에서 중위로 진급했다. 

가히 그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위해 태어난 미국의 군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던 것이다. 

후일 그는  미국의 배우로서 33개의 서부영화를 포함한 44개의 영화에 캐스팅 되었다.

 특히 그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중 자서전을 기초로 제작되었던 

대한민국에서 [불타는 전장]이라는 영화 제목으로  개봉된 

 [To Hell and Back]은  가장 대표적인 2차 세계대전 배경 전쟁영화이다.

이 영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 말년이 된 1979년 

한국 TV방송의 주말의 명화로도 다시 방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컨트리 음악 작곡가와 목장 사업가로도 활동했으며

 1971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지는 미국의 35대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의 묘지 다음으로 방문객의 수가 많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침략 당시 오디 머피의 나이는 15세 였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침략으로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곧 징집이 시작되었다. 

오디 머피는 미국의 제 2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군대에 입대를 하려고 했으나 

군 입대 최소연령인 16세에 미달했던 이유로 그는 거절당했다.

그리고 1942년 6월  그가 16세가 되던 해의 생일 바로 당일에

 비로소 그는 처음 해병대에 지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빈곤했던 가정환경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실격을 당했는데

당시 그의 체격은 키 166cm에 몸무게는 48kg에 불과했다. 

이후 그는 해군과 공수부대에도 지원했으나 불합격 처리되었고, 

마지막으로 그린빌 육군 모병소에 지원서를 냈다.

 육군 모병관에게 사정해 겨우 합격한 그는 군번 01-692-509로

 기초 군사훈련을 위해 텍사스 주 캠프 월터스(Camp Wolters)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약한 체력과 영양실조까지 겹쳤던 머피는 다른 훈련병들보다 

지나치게 빨리 지치거나 실신하기까지 해서, 그를 담당한 중대 교관들은 

머피를 행정병이나 취사병 등의 후방 근무 훈련으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소견서를 읽은 머피가 이 조치를 취소해달라고 강경하게 요청했고,

 별 수 없이 교관들은 13개월동안 계속 그를 전투병으로 훈련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3개월의 기초훈련 후 메릴랜드 주 미드(Meade) 훈련소에서 

보병 훈련까지 이수한 그는 해외근무를 요청하여 제 3 보병사단 

15연대 1대대 B중대의 이등병(당시 보충병) 으로 

1943년, 횃불 작전(Operation Torch) 의 일부로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상륙했다. 

이 시기에 특별한 전투나 작전은 없었고 머피는 3사단의 기동 연습에만 참가했다. 

중대에서 그의 별명은 애송이(Greenhorn) 나 텍사스 꼬맹이(Little Texas) 였다고 한다. 

그가 실제 전투에 참가한 것은 1943년 7월 10일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y)의 일부로 시칠리아로 진격한 때였다. 

해안에 당도하자마자 처음으로 교전을 경험했는데,

 이때 약 500m 가량 앞에 보이는 말을 타고 도주하던 

두 명의 이탈리아 장교를 사살했고, 이것이 그의 첫 전과가 되었다고 한다. 

허스키 작전 이후 머피는 상병으로 진급했다.  

시칠리아를 완전히 정복한 후 제 3군은 1943년 9월 중순에

 이탈리아 본토인 살레르노(Salerno)를 침공했다. 

살레르노에 상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머피는 말라리아에 걸려서 몇달을 살레르노의 임시 야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후 복귀해 살레르노에서 복무하고 있던 어느 날, 

머피는 야간 정찰대를 지휘해 독일군 지역을 급습했다. 

그러나 곧이은 포화로 인해 돌산 뒤로 숨게 되었고, 

독일군 측에서는 분대 병력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미리 병사들을 매복시켜 놓았던 머피는

 일제사격으로 세 명을 사살하고 9명의 포로를 잡았다.

그 공로로 그는 부사관으로 진급했다. 

이탈리아 북쪽으로 계속 진격하면서 그는 볼투르노(Volturno)와 

안지오(Anzio)에도 상륙해 전투를 치렀고, 이러한 참전으로 

미 제 3군이 로마로 진격한 시기에는 여러 훈장을 받게 되었다. 

 이후 제 3사단은 이탈리아에서의 임무를 마감하고 1944년 8월 15일 

앤빌-드래곤 작전(Operation Anvil-Dragooon)의 일부로 

남프랑스에 상륙해 최초로 교전을 치렀다.

 이때 군에서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라티 팁턴(Lattie Tipton)이 

항복하는 것처럼 가장하며 접근중이던 독일군에 의해 전사하자, 

머피는 단독으로 독일 기관총병을 사살하고 노획한 독일군 기관총과

 수류탄을 이용해 근접한 다른 독일군의 여러 거점을 파괴했다. 

이 공로로 그는 미군 서열 2위의 훈장인 

육군수훈십자훈장(Army Distinguished Service Cross)를 수여받았다. 

10월 2일에 독일군 기관총 진지 15야드 앞까지 접근한 후 

수류탄 두 개를 던져 파괴시킨 무훈으로 은성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0월 5일 전방의 독일군 진지에 접근하여 무전기로 폭격유도를 하여

 파괴시킨 공로로 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수여받았다. 

몇 주 후에는 저격수의 도탄을 포함한 두 번의 부상으로 

다시 은성 훈장을 수여받게 되는데 

이때 그는 하사 계급으로 중사 계급의 지휘권도 겸임하고 있었다. 

그는 약 10주 동안 치료를 거쳤고, 그가 다시 돌아올 때쯤에서는 

중대장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이후 그는 프랑스 북부로 계속 진격했다.








1945년 1월 26일에 있었던 홀츠바이어(Holtzwihr)전투로

 머피는 일약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45년 1월 26일 B중대 장교 2명과 부사관과 병사 28명은 

2대의 601 전차연대 소속 전차들과 함께 홀츠바이어 시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고, 

그 때 머피는 B중대의 소대장이면서 포격 유도원이었다. 

그런데 진격 중 갑자기 독일 제 2산악사단 소속의  판터 전차 6대와 

독일군 2개 중대 총 250여명의 병력과 맞닥뜨린 B중대는 기습 공격을 받게 되었다. 

미군 전차 2대 중 1대는 독일군 판터전차의 포격으로 격파되었고, 

다른 1대는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 기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건너편에는 독일군 128명이 진격하고 있던 상태였는데, 

이때 머피는 모든 소대원들을 숲 속의 후방으로 보내고 단독으로 독일군들과 전투를 치렀다.

 전차 위에 올라간 그는 기관총으로 독일군에게 응사하기 시작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아군 포병에게 포격을 지시했다. 

이때 독일군 전차에서 발사한 포탄의 충격으로 전차에서 튕겨나갔지만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올라가 사격했다. 

이런 대치상황이 계속된 지 1시간 후, 기관총의 총탄이 바닥나자 

그는 탄띠를 교체할 틈도 없어 전차 해치 안에서 죽은척 했고, 

2개 분대의 독일군이 접근해 오자 갑자기 일어나서 기관단총을 발사해 사살했다. 

격파된 전차 안에서 계속 사격을 하던 그는 독일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는

 전차에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때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그 직후 그 전차가 화염에 의해 폭발했다고 한다. 

그는 의무병들에게 다른 부상한 소대원들을 응급조치하게 지시했고, 

다리에 붕대만을 감은 뒤 소대원 몇 명을 인솔해 후퇴하던 

독일군을 소탕한 전과를 달성했다.

  홀츠바이어 전투로 머피는 명예 훈장을 수여받게 되고, 

이례적으로 하사에서 곧바로 장교 계급인 소위로 진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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