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폴란드 서부군 발렌타인 전차대대의 스코틀랜드 전술훈련 - Polskie Sily Zbrojne na Zachodzie Valentine Tanks on tactical exercises Scotland

슈트름게슈쯔 2018. 5. 30. 12:39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략으로 영국으로 망명한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폴란드 서부군 제 1전차 연대 제 2대대 발렌타인 전차 승무원들의 전술 훈련 - 1941년 8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망명 정부가 조직한 군대였던 

폴란드 망명군은 자유 폴란드군및 폴란드 서부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폴란드 망명군의 총병력은 25만 가량으로 소련군, 미군, 영국군에 이어 네번째로 큰 규모였다.

그들은 영국 본토 항공전 및 몬테카시노 전투 등의 격전에서 분투하면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1939년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불과 한 달만에 폴란드 제 2공화국은 붕괴된다. 

이후 파리로 망명에 성공한 정치인들은 같은 해 9월 30일에 폴란드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망명 정부 산하에는 함께 프랑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8만 5천여 명의 병력이 있었고, 

이들이 자유 폴란드군의 첫 일원이 된다. 

자유 폴란드군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가운데 

4개 사단이 조직되었고, 이들은 재편성과 거의 동시에

 프랑스군 산하에 편재되어 다시 나치 독일과의 항쟁에 돌입한다. 

1940년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당시 1개 여단이 파견되어 나르빅 항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곧바로 이어진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폴란드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곳곳에서 독일군과 격전을 치른다. 

하지만 프랑스 침공 당시 자유 폴란드 군은 독립된 군으로 무엇을 해볼만한 

인력을 갖추지 못한 채 프랑스군의 일부로 소속됐다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모리스 가믈렝 육군대장을 비롯한 프랑스군 수뇌부의 연이은

 대독일전 전략 실패로 인해 결국 패주해야만 했다.

프랑스에서의 참패는 자유 폴란드군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와서 

폴란드군은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고 영국으로 재차 이동해야만 했다. 

잔존 병력들은 영국에서 폴란드 제1 군단으로 재편성을 마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 

군단이라는 명칭을 붙인것이지 실제 병력수로는 사단 하나 꾸리기도 무리였다.

 그러했던 가운데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과 독일의 관계가 동맹국에서 적성국으로 돌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유 폴란드군의 숨통을 틔워준다.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협정을 맺어 

소련에 포로로 잡혀있던 약 8만여 명의 병력들을 되돌려 받았고 

이들은 폴란드 제 2군단으로 편성되어 중동으로 배치된다. 

문제는 폴란드군의 엘리트 장교를 구성할 인적자원은 소련의 카틴숲 학살로 인해 대부분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 시기 소련 스탈린은 병력자원으로 쓸 수 없는 연령의 노인과 여자, 어린이들도 

대량으로 이란으로 내보냈는데 이들은 전쟁이 거의 끝날 때까지 이란에 머물렀다. 

이후 1943년 무렵이 되면 폴란드 제 2군단을 비롯해 각종 병력들을 긁어모은 결과 

자유 폴란드군은 20만을 넘기는 병력을 자랑하게 되고 

그들은 북아프리카 전선, 이탈리아 전선, 서부전선 곳곳에서 활약한다. 

특히 이탈리아 전선에서 목숨을 아끼지않고 독일측의 공수부대와 치열하게 맞서 싸웠던

 몬테카시노 전투는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이다.

 자유 폴란드군은 마켓가든작전과 같은 시련이 있기는 했지만 

종전 까지 꾸준히 활약을 펼치면서 독일을 격파시키는 데 있어서 연합군 병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