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

제주도 서귀포의 일본군 10식 120mm 해안포와 4.3 사건 당시 정방폭포 위의 수용소

슈트름게슈쯔 2018. 6. 24. 16:44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도 송악산에 설치했다가 

해방 이후 미군에 의해 파괴된 10식 120mm  해안포 




일본군이 요새화 시켰던 제주도 대정읍의 10식 120mm 대공포 진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 제주도를 본토 방어 결전지로

 이용하기 위해 '결(決) 7호 작전'을 진행했다.

일본군은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7만5천명의 병력을 제주에 주둔시켜 섬 전역을 군사 요새화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제주도 해안 곳곳에 미군 함정을 공격하기 위한

해안 동굴 진지 구축 공사와 비행장 공사등에 제주도민들을 

마치 노예처럼  강제로 대량 투입시켜 노동력을 착취했다. 

제주도 송악산과 성산 일출봉, 서우봉, 수월봉, 삼매봉 해안 등이 그 대표적인 곳이

송악산의 경우 해안 동굴진지 외에 '알뜨르'란 드넓은 벌판에 비행장까지 건설하고, 

주변에는 격납고와 탄약고, 고사포 진지, 지하벙커까지 만들었다.








제주도 송악산 일제 해안 동굴 진지 -  2017년 8월 22일 



송악산은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높이 104m의 기생화산체이다. 

이 산은 소나무가 많이 자라난다 하여 '송악산(松岳山)' 이라 부른며

오름 절벽에 파도가 부딪쳐 '소리가 울린다'하여 '절울이'라고 부른다.

   송악산은 제주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바다 쪽으로 해안 절벽을 이루고 있고,

 이중 폭발을 거친 화산으로 큰 분화구안에 또 하나의 폭발이 생겨 

현재의 정상에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송악산 둘레길은 제주올레10코스 중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송악산에는 크고 작은 해안 진지동굴이 60여개소나 있다. 

해안 진지동굴은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주변에는 섯알오름 고사포 동굴진지와 해안동굴 진지, 알뜨르비행장, 

비행기격납고, 지하벙커, 이교동 군사시설, 모슬봉 군사시설등이 있다.









4.3 사건 당시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 위의 수용소 - 1948년 



한국사에 등장하는 정방은 세가지가 존재한다.

첫번째 정방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이다.

소정방(蘇定方, 592 ~ 667)은  소열(蘇烈)이 본명이지만 자인 정방(定方)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기주(冀州) 무읍현(武邑縣) 사람으로 환갑을 넘겨서야 주목받았던 인물이었다. 

소정방은 전투시 강행군과 속공을 구사하여 서돌궐, 사결, 백제의

 세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왕들을 모두 생포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평양까지 공격하였으며 말년에는 노환으로 자국에서 병사했다

두번째 정방(政房)은 고려시대  말기

 최씨 집권 때 정무를 행하던 곳으로서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인사 문제 처리를 위해 1225년(고종 12년)에 자신의 집에 설치한 기관이었다.

그리고 세번째 정방은 지명으로서의 정방(正房)으로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폭포인 정방폭포(正房瀑布)이다.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는 빼어난 경관을 가진 유명한 관광지이다.

그러나 70년 전 정방폭포 아래 바다는 선혈로 물들었던 비극의 공간이었다. 

정방폭포 위의 지역에는 4·3 당시 경찰서와 수용소가 주변에 밀집해 있었고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일대에서 희생된 것으로 밝혀진 사람은 247명이었다.

4.3사건 당시 학살지로도 알려져 있는 정방폭포 위 지역에서 1948년 음력 10월 24일과 11월 22일,

 12월 14일, 12월 24일, 12월 28일 등 여섯 차례의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1949년 1월 22일 인근 안덕면 동광리, 상창리 주민 등 80여 명이 토벌대에 의해

 정방폭포 위의 담배공장에서 학살당했고

 살해된 주민들의 시체는 정방폭포 아래로 흘려 보냈다고 한다.








제주도 송악산과 반공포로들 -1953




제주도의 징집 -1953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해안가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