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 병기

미국 델그렌 건과 조선 광성보 전투 1871 US Navy Battle Ships invade after Dahlgren gun firing in the Kwang sung bo Ganghwado Island Korea

슈트름게슈쯔 2018. 9. 28. 20:49



미국 남북전쟁 당시 제임스 강의 북군 해군 실험용 철갑선 갈레나 호와

 선체 측면의 덱 캐논  230mm 델그렌 건  함포들  - 1862년 4월 




존 로저스는 남북 전쟁 당시 북군 해군으로 활약한 미국의 군인이었다. 

그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해군 아시아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1862년 4월 존 로저스는 제임스 강에서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한 실험 철갑선 갈레나 호의 지휘를 맡았다. 

로저스는 제임스 강 함대를 지휘하여 1862년 5월, 제임스 강까지 원정을 떠났고,

 남부동맹의 요새인 드레위리 블러프(Drewry's Bluff)에서 공격을 당해 수도 리치먼드 8마일 지점에서 저지당했다. 

갈레나 호가 입은 피해는 그가 나중에 작성한 전투 결과 보고서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함정이 방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전투는 이후에 실제 전장에서 실험하는 것을 경멸하게 만들었다. 

그 후 로저스는 조지 매클렐런의 반도 전역을 지원하면서 함포 사격으로 

남군이 포토맥군의 진지를 돌파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존 로저스는 1862년 7월 16일 철갑선 위호켄 호의 함장이 되었다. 

북군의 모니터 호를 침몰시킨 폭풍우를 뚫고 브룩클린에서 찰스턴까지 성공적으로 항해한 후, 

1863년 5월 단독으로 섬터 요새를 공격했고 6월 17일에 남군의 CSS 아틀랜타 호를 나포했다. 

이 공적으로 그는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로저스에세는 불행하게도 이것이 그의 마지막 참전이 되었다. 

부상에서 회복되자 그는 철갑선 독재자 호의 함장이 되었다. 

로저스는 보다 활동적인 자리를 원했지만, 남은 전쟁 기간 내내, 

설계 및 구조 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달려야 했던 것이다. 

로저스 소장은 1869년까지 보스턴 해군 기지를 담당하여 지휘했다. 

1869년 12월, 소장으로 진급한 로저스는 미국 아시아 분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로저스 소장은 휘하 함대의 지휘뿐만 아니라 외교 임무도 관할할 수 있었다. 

1871년의 그가 지휘했던 신미양요는 미국 외교사에서 별로 좋은 역사는 아니었다. 

 조선 원정의 총책임은 청나라 주재 전권공사였던 프레드릭 로우가 맡았고, 

로저스는 그를 도와 무력 투사를 지휘했다. 

로저스가 이끈 병력은 군함 5척 (함포 85문)과 병력 1,230명이었다. 

조선과 외교협상이 조선의 완강한 거부로 실패하자, 

로저스는 강화도 초지진을 시작으로 광성보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선은 지구책으로 나왔고, 대규모 침략은 감행할 수 있는 전력도 없고 

미국 정부의 훈령 범위도 벗어난 문제여서, 로저스는 후퇴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마레 섬 해군 기지 사령관과 미국 해군 관측국의 국장으로 근무했다. 

관측국장으로 재직 중이던 1882년 5월 5일 워싱턴에서 사망했다.






광성보 전투시 미국 해군 전함들의 함포 사격과 수병들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분전했지만 처참하게 전멸 당한 조선 수군 수비대 병사들 -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국은 1871년 조선 원정을 위해, 

500명 이상의 선원과 해병대 100명으로 구성된 650명의 병력과 

미국 해군 전함 기함 콜로라도와  알래스카, 팔로스, 모노캐시, 베네시아등 다섯 척의 전함을 준비했다.

기함 콜로라도에는 해군 소장 존 로저스와 재중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가 탑승해 있었다.

6월 2일 광성진 앞 염하에 집결한 미군 함대가 포격을 개시하였다. 

포격을 마친 함대는 남하하여 손돌목을 지날 때 또 다시 포격을 가하였다.

조선 수군도 응사하여 미국 함선 일부가 파손되었다.

 그러나, 미국 함대의 피해는 경미하였다.

몇 차례의 포격전이 있은 후 상호 교섭을 시작하였다.

 미국 측 로우 공사가 해변에 편지를 쓴 장대를 꽂아두면 조선 측이 이를 읽은 후 답신하였다. 

미국은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였고, 진무사(鎭撫使) 정기원은 미국의 손돌목 침입이 

불법이며 조선은 다른 나라와 교섭하지 않으니 즉시 물러가라 답신하였다.

 미군은 물치도로 물러가며 2~3일 안에 답신이 없을 경우 공격할 것이란 최후 통첩을 남겼다.

 6월 10일 미군은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군함 2척의 지원을 받으며 24척의 종선에 나누어 탄 651명의 병력이 상륙하였고 

초지진을 수비하던 조선군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6월 11일 미군은 대모산에 포대를 설치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으며

 조선군은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남기고 덕포진으로 패퇴하였다.

미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미군 기함 콜로라도호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으며

미군이 제너럴셔먼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지자 살해되었다고 대답하였다. 

미국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광성보 전투에서 보복을 가하기로 결심하였다.

8시간 가량 치러진 이 전투에서 조선측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었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 

미군은 광성진의 관아를 불태우고 초지진을 거점으로 삼아 주둔하였다.

한편, 고종 실록은 이날 전투의 사상자를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광성보 전투 후에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어재연이 전사한 후 미군은 퇴각하였다.

그것은 애초의 제한적 공격이 목표를 달성하였다는 판단과 염하를 항해하며

 다수의 전함이 암초에 부딪혀 피해를 입은 까닭 때문이었다.

미군은 물치도로 퇴각하여 20일 동안 포로 석방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은 어재연을 병조판서에 추증하는 등 

전사자를 추증하고 공적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내렸다.

한편, 이양선이 나타나 전투가 있었고 크게 패하였다는 소문이 서울에 자자하였고,

 대원군은 소문의 확산을 경계하며 사대문 밖으로 피난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전투 이후 조선은 미군과의 접촉 담당을 강화부 진무사에서 부평부사 이기조로 바꾸었다. 

부평부사는 격렬한 어조로 미국을 비난하면서 결사 항전의 뜻을 전했다.

이러한 상호 교신 이후 조선과 미군은 교신을 중단하였고, 

미군은 더 이상 협상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포로를 자진 석방한 뒤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