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소련군 전쟁 포로들로 구성되었던 러시아 해방군 - WW2 Russian Liberation Army consists of Soviet Red Army POWS

슈트름게슈쯔 2018. 9. 29. 18:46



독일 군복으로 갈아 입는 소련군 전쟁포로들 - 1944년




소련군 전쟁포로들로 구성된 러시아 해방군(ROA)의 신병 훈련 강좌 - 1944년 







독소전쟁  말기 소련군 전쟁포로에서 독일 군복으로 갈아입고 독일측에 가담하여 러시아 해방군(ROA)이 된  

병사들을 사열하는 포로수용소에서 자발적으로 나치 독일의 앞잡이가 된 소련군 장성 블라소프  - 1944년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블라소프 (1900~1946)은 제 2차 세계 대전 초기에 활약한 

소련군 장성이자 1942년 소련을 배신하여 3년 동안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가 다시

1945년 봄 체코 레지스탕스에 협력하여 나치 독일을 배신했던  자로서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아군과 적군 사이를 왔다 갔다했던 배신자였다.

소련군 장성 블라소프는 1942년 독소전쟁중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된 후,

나치 독일에 협조하여 포로 수용소에서 모집한 러시아 해방군을 이끌었다.

청소녀기에 블라소프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정교회의 신학교에 다녔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신학을 그만 두고 

잠시 농업을 공부하다가 1919년 붉은 군대 육군에 들어갔다. 

장교가 된 뒤 승진을 거듭하여 30대 후반에 장군이 되었다.  

1938년부터 1939년까지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 파견되어 장제스의 군사 고문으로 있었다. 

소련에서 파견한 장제스의 군사 고문들은 소련군의 엘리트들이었으며,

 군사고문을 역임한 바실리 블류헤르나 바실리 추이코프의 커리어를 본다면 

블라소프도 엄청나게 군에서 촉망받는 기대주였음을 알 수 있다. 

1930년에는 공산당에 가입했는데, 당시만 해도 장교들의 입당은 매우 까다로왔으며, 

그는 공산당이 보기에 "사상이 건전한" 군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부농 출신이었으며, 대숙청 기간 중 아버지가 굴라그에 끌려가는 등 

개인적으로는 소련 체제에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1940년에는 제99보병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는데, 그의 지휘하에서 

이 사단은 세묜 티모셴코 국방장관에 의해 "최고의 사단"으로 선정되었다. 

이렇게 그는 붉은 군대에서 촉망받는 육군 지휘관이었다.   

1941년 6월에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 블라소프는 중장 계급을 단 제4기계화군단의 군단장이었다. 

그리고 이후 제37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키예프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후 20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반격에서 대활약을 하였다.

 그의 공적은 게오르기 주코프에 버금갈 정도였으며 그는 영웅화되어 소련 선전망을 통해 매우 칭송되었다. 

그래서 이 공적으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그는 소련군의 미래였으며, 외모로도 190cm가 넘는 당당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42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블라소프,는 독일군에게 잡혀 블라소프는 독일의 포로가 된다.

블라소프는 심문 과정을 거친 후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블라소프는 포로 수용소에 수용돼 있는 기간 동안 "스탈린보다야 히틀러가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독일 측에 자진해서 협조할 뜻을 밝힌다.

독일군 장교들은 소련 측 부역자들을 포섭해서 반공적인 러시아군을 만들려고 했으나, 

슬라브족을 동유럽에서 제한하려던 히틀러는 이를 반대했다.  

하지만 최전선의 병력 부족 증상은 당장 해결해야 할 사항이므로 

블라소프가 자진해서 독일군에 부역할 뜻을 밝히자 

독일군은 그를 베를린으로 데려가서 독일의 심리전에 이용했다. 

이후 블라소프는 다른 독일 부역자들과 함께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와 자유 러시아 군단을 조직하고 

소련군이 잡혀 있는 포로 수용소를 돌며 자발적인 부역자들을 모집했다. 

이렇게 2개 사단의 병력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들은 독일 국방군 육군 소속이었고, 이들과 별도로 무장친위대에는 

소련 출신 코사크로 이루어진 다른 제15 SS 기병군단이 존재했다.   

이들은 "스탈린 체제"로부터 억압받는 러시아 인민을 해방하고 

러시아에 파시스트 국가를 설립하겠다고 주장했으나, 히틀러와 손잡은 그들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히틀러는 이들이 이런 선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들을 다시 포로수용소에 넣으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이들은 러시아 해방군(ROA)를 구성했지만, 명목상 사령관인 블라소프는 

전쟁 막바지까지 이들을 한번도 지휘해 본 적이 없었다. 

독일 측은 이들을 믿지 못해서 제대로 무장을 시켜 주지 않았고, 그저 후방에서 비전투 업무에 종사시켰다. 

가끔씩 블라소프는 독일군의 선무 방송이나 심리전에 동원되어 방송을 하거나

 혹은 전선에 독일 측으로 귀순하라는 삐라를 뿌렸다. 

한편 블라소프는 소련 지역에 가족을 남겨 두고 있었으나, 독일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고, 이후 정식으로 재혼하였다. 

 그러다가 블라소프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의 흐름은 바뀌어 

이제는 소련군이 독일군을 밀어붙이며 서쪽으로 진격했고, 소련군은 1945년 1월에는 독일 국경선까지 다가왔다.

독일군 병력의 수효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자 그제서야 독일 국방군은 ROA를 무장시켰고 

2월에 ROA는 진격해 오는 옛 전우들을 향해서 총부리를 겨눈다. 

그러나 이미 전황은 돌이킬 수 없었고 ROA의 주력은 체코로 후퇴하였다.  

체코에서는 당시 저항 세력에 의해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1945년 4월, 이들은 체코 저항 세력의 요청을 받아들여 체코인을 도와서 무장친위대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블라소프는 이런 참여 요청을 처음에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전황이 이미 기운 이상 서방 연합국에 항복할때 도움이 될까해서 무장친위대로부터 프라하를 해방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미 체코 저항운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이들은 ROA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체코를 떠나라는 명령을 ROA에게 내렸고, ROA는 체코를 떠나 

서부로 가서 반공적인(그래서 자신들에게 동정적일것 같은) 조지 S. 패튼 장군의 미 육군 제3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소련으로 송환되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