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미 해군 함대의 이오지마 일본군 해안 벙커 물량 포격 - Pacific War US Navy Battle ships bombardment to the Japanese coastal bunker Iwo Jima

슈트름게슈쯔 2020. 8. 8. 23:02

태평양전쟁 말기 미 해군 함대의 이오지마 일본군 해안 벙커 물량 포격 - 1945년 2월 16일

 

 

태평양 전쟁 말기 미 해병 상륙부대 사령관 해리 슈미트 소령은 1945년 2월 중순에 앞서 10일간 이오지마 섬에 대한

집중 포격을 요청했다. 하지만, 리어 어드민. 수륙양용지원군(태스크포스 52)의 윌리엄 H. P. 블랜디 사령관은

이런 폭격으로 상륙 전에 함정의 탄약을 보충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슈미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 후 슈미트는 9일간의 포격을 요청했고 블랜디는 다시 거절했고 3일간의 폭격에 동의했다.

이 결정은 미 해병대에 많은 감정을 남겼다. 전쟁이 끝난 후

리외트. 홀랜드 M. "하울린 매드" 스미스 사령관(슈미트의 제 5수륙양용군단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 56)은 연합군의 이오지마 섬 전역 작전 기간 동안 해군의 포격 지원 사격이

부족하여 수많은 미 해병들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심하게 불평했다. 각각의 중전함에는

모든 전투 선박과 공동 작전으로 이오지마 섬 전체에 공격을 가할 수 있는 포격 구역이 주어졌다.

각 군함은 약 6시간 동안 발사했다가 일정시간 동안 포격을 중지했다.

이오지마 상륙작전 사흘전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날의 포격은 불확실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오지마 상륙작전 이틀전 일본인들은 포병 진지 준비에 임했던 시간과 배치가 뚜렷해졌다.

 

미 해군 중순양함 USS 펜사콜라가 일본군 해안 포대의 사정권에 들어섰을 때, 그 선박은 재빠른 적의 공격을

6차례나 받아 17명의 승무원이 사망했다. 이후 수중파괴팀(UDT)를 상륙시키려던 12척의 소형선박은

모두 일본군의 포격공세에 신속히 대피했다. 이들 선박을 방조하던 중 구축함인

USS 로이체(Leutze)도 일본군이 발사한 포탄의 타격으로 7명의 선원이 사망했다.

이오지마 상륙작전 하루 전 블랜디 제독의 포병들은 비와 구름에 또 한번 포격 지원의

방해를 받았다. 슈미트 장군은 "우리는 34시간 동안 포격 시계가 가능한 훤한 대낮의 불과 13시간 정도 동안

화력 지원만 받았다."고 불평스럽게 말했다. 이 제한적인 폭격은 일본군들이 요새화 된 동굴 벙커에 깊숙이

숨어버렸기 때문에 적에게 그리 큰 피해를 끼치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벙커와 동굴들이 미 해군 전함의 포격과

전폭기의 폭격 중에 파괴되어, 약간의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인들은 1944년 3월부터 이 전투를 준비해왔고,

이것은 그들에게 필사적 전투의 시작임을 알렸다. 상륙할 무렵에는 이오지마 앞바다에 450여 척의

미국 선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오지마 전투 기간 동안 약 6만 명의 미 해병대원들과

수천 명의 미 해군 건설대원들이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