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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매입했던 영국제 미디엄 마크 A 위핏 전차 - After WW1 Japanese goverment buy the British Army Midium Mark A Whippets Tank

슈트름게슈쯔 2020. 12. 12. 21:08

 

제 1차 세계대전 종전 1년후 1919년 중순 일본 정부가 영국으로 부터 매입하여 일본군 기병 학교에서 운용하는

영국제 미디엄 마크 A 위핏 전차 - 1919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의 미디엄 마크 A 위핏 전차는 속력에 의한 기동성을 이용하여 적진을 무너 뜨리는

방식으로 중량이 27톤~30톤이었던 마크 4및 마크 5 등의 무겁고 속도가 느렸던 중(重)전차들을 보완하기 위해

영국 농기계 전문가이자 탱크 설계자 윌리엄 트리튼경이 설계하여 포스터 오브 링컨사에서 제작 생산했던

최초의 중형(미디엄) 전차였다.

미디엄 마크 A 위핏 전차의 중량은 14톤이었고 장갑 두께는 14mm,무장은 호치키스 기관총 4정,인원 3명에

엔진 출력 45마력 엔진 2기(67킬로와트)에 최고 속력은 13.4Km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프랑스로 부터 매입했던 르노 NC 전차 -1919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프랑스로 부터 매입했던 르노 NC 1 전차 (일본명 : 오츠 가타 센샤) -1919

 

 

만주 침략 당시 일본군의 르노 FT-17 경전차 (일본명 : 코우 가타 센샤) -1931

 

 

제 1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이 프랑스로 부터 매입했던 르노 FT-17 경전차 -1920년대

 

 

제 1 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은 기갑전과 전차에 관심을 보였고 외국에서 다양한 종류의 전차들을 확보했다.

그러한 전차들 종류는 1 대의 영국 육군 Mk 4 중(重)전차와 6 대의 미디엄 Mark A 위핏(Whippets)전차와

13 대의 프랑스 르노 FT-17 (나중에 Ko-Gata Sensha 또는 "Type A Tank로 지정됨) 경전차가 포함되었다.

Mk 4 중(重)전차는 1918년 10월에 구입되었고 위핏 중(中)전차와 르노 FT-17 경전차는 1919년에 인수되었다.

이 전차에 대한 시험은 성공적이었으며 일본 육군은 1925년에 기갑 부대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여

경전차 3개 대대와 중전차 1개 대대를 구성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인이 고유 전차 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부대를 장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 제국군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더 많은 전차를 구매하는 임무를 보내 새로운 설계를 요청했다.

그러나 새로운 전차는 이들 국가가 자신들의 기갑군에 공급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고, 유일하게 사용 가능한 모델은 구형 르노 FT-17 경전차였다.

일본인은 마지 못해 수입했지만 1929년에 그 후속 모델 전차였던

르노 NC1 (Otsu-Gata Sensha 또는 "Type B Tank"로 지정됨) 전차등의 10가지 종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두 유형의 전차는 모두 1940년에도 여전히 사용중 이었으며,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 차이나를 점령한 후 추가 차량과 예비 부품을 노획했다.

일본은 또한 영국 빅커스(Vickers) 6톤 경전차와 카덴로이드 경전차를 여러대 추가 구입하여

그 전차들을 기본 토대로 자국 신형 전차 개발을 위한 기초로 사용하여 89식 치로(이고)와 같은 전차를 만들었다.

 

미국인과 이탈리아인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은 원래 프랑스가 설계한 전차를 채택했으며

그들의 군사 교리와 전차 승무원 훈련에 영향을 받았다.

그 당시 다른 많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은 전차를 보병을 직접 지원하는 데 주로 사용되는

전쟁 도구 정도로 보고 전차의 독립적인 전투 행동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제 2차 중일전쟁 동안 일본 전차의 이용도는 성공적이었으나 반면 중국은 그들 자신의 중요한 기갑 부대가 없었다.

1939 년 할힌골 전투(일본인들이 그 전투 패배를 애써 축소시켜 부르는 명칭인  노몬한 사건)의 현장이었던

몽골과 소련의 국경지역 할힌골에서 소련에 대패한 일본군은 전차 부대를 보병 지원에 계속 중점을 두었지만

전차 설계와 군사 교리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 군비 생산의 우선적인 순위는 군함과 항공기의 생산으로 옮겨졌고,

육군의 장갑차 생산을 위한 지원이 전환되거나 축소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동남아시아의 지형과 태평양의 섬들은 일반적으로 기갑전에 적합하지 않고

그곳은 주로 열대우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말레이와 필리핀 침공을 제외하고는 일본의 대규모 탱크 사용이 제한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디자인의 개발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된 형태의 구식 일본 전차는 방어 진지와 보병 지원 무기로 계속 사용되었다.

연합군 전차에 도전할수 있는 우수한 성능과 디자인을 가진 일본 전차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등장하지 못했다. 그러한 전차들은 실험적 전차이거나 매우 소량으로 생산되었기에 궁극적으로는 

제 2차 세계 대전중의 전쟁 과정에 전투력을 끌어 올리는 영향을 미치기에는 충분하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