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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1961~1962 미국의 소련 공산주의 팽창 정책 저지 - Cold War 1961~1962 U.S Stopping Soviet Communist Expansion Policy

슈트름게슈쯔 2021. 1. 5. 13:57

 

냉전기 1961년 베를린 위기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정면 돌파로 대처한 "미국은 왜 잠자고 있는가"와

"용기있는 사람들"의 저자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제 35대 미국 대통령의 소련 공산주의 팽창 정책 저지

 

 

베를린 위기는 1961년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발생한 미국과 소련의 마지막 냉전 대결이었다.
1961년 6월 4일 부터 11월 9일까지 베를린에서는 미.소간의 심각한 군사적 긴장상태가 이어졌다.
1958년 11월, 소련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서베를린에서 서방 군대는 6개월 안에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그는 기간이 만료되면 소련은 서베를린과 동독의 통신선을 통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서방 당국은 동독의 허가를 받아서만 서베를린과 통신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이에 대해, 서베를린에서 군대를 철수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서베를린의 통신은 자유롭게 유지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독 정부는 1961년 부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에 주민들의 서베를린을 통한 탈출을 막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동유럽을 점령한 후에, 많은 동유럽 사람들이 서유럽으로 도망쳐 왔다.

1945년 부터 1950년까지 1500만명 이상의 소련 점령지인 동유럽 사람들이 서방으로 이민왔다.

많은 동유럽 사람들이 서베를린을 통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 왔다.

1950년 197000명, 1951년 165000명, 1952년 182000명, 1952년 331000명이 망명을 신청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 14일, 미국 측의 첩보기였던 록히드 U-2 정찰기에 의해 쿠바에서 건설중이던 

소련의 SS-4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MRBM) 기지의 사진과, 건설현장으로 부품을 운반하던 선박의 사진이

 촬영되면서 시작된 미국과 소련간 일촉즉발의 첨예한 대립이었다. 

1961년 베를린 위기로 인해 인기가 떨어진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소련 내에서는 국내 기관 재배치 문제와

22차 소련공산당 당대회를 통해 위신 추락을 경험했으며 외부적으로는 마오쩌둥의 도전으로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이에 소련 니키타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쿠바의 신생 공산정권인 카스트로 정권을 보호하며,

서방 세계와의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쿠바에 장거리 미사일 기지 설치를 비밀리에 추진하게 된다.

쿠바 미사일 위기란 소비에트 연방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것에 대해 일어난,

미국과의 군사적 대립으로 인한 위기이다. 러시아 측에서는 카리브 해 위기, 쿠바 측에서는 10월 위기라고 부른다.

1962년 10월 14일, U-2 기에 의한 첩보 사진에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의 사진이 촬영되면서 촉발되었다.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소련에 의해 쿠바에 설치된 미사일의 즉각적인 제거를 요구하였다.

이 미사일은 미국이 터키와 중동에 설치한 핵미사일에 대응한 것이었다.

소련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고, 수 개월 내에 쿠바의 모든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으며,

미국은 터키, 그 밖의 중동 국가에 설치된 ICBM기지를 은밀히 제거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미국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은 또한 앞으로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여파로 피그스 만 침공에서 붙잡힌 쿠바 출신 망명자들은 미국이 몸 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