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

안향과 무당 미신 교육

슈트름게슈쯔 2021. 1. 29. 19:20

대한민국 국보 제 111호 안향 초상

 

 

마른 명태 북어 - 2015년 2월 강진 

 

 

안향(安珦, 1243년 ~ 1306년 9월 12일)은 고려 시대 무신 집권기와 대몽항쟁기 이후 

황폐해진 고려 사회에 원나라에서 유학을 수용하여 유학 발전에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안향은 고려의 국학을 진흥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힘썼는데,

그는 유교가 고려에 문치 사회를 구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향은 충렬왕이 복위하고 충선왕이 원나라로 갈 때 그를 호종하여 원나라로 갔다.

그는 원나라에서 여러 명사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익혔다.

1289년(충렬왕 15)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수용하고 귀국하면서 영주 숙수사에 거처하며

원나라에서 도입된 성리학을 익히는데 진력하였고 이를 고려에 전했다.

당시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혼란속으로 빠져든 때라 무인집권과 몽골의 침입, 삼별초의 난, 일본정벌 등과 같은

혼란 상황이 계속되면서 사상적 이념을 잃고 사회적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고려 사회에 성리학을 전수해 정치, 사회, 사상의 이념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다.  

중국에서 고려로 돌아온 안향은 시경, 서경,역경,춘추,악기,예기등의 육경(六經)과 자사(子史) 등의

서책을 구입해 들여와 고려 관원과 학생들에게 익히게 하였다.

그리고 안향은 백이정, 권부, 우탁 등을 가르쳤고 그들은 다시 이제현, 이곡, 이색에게 성리학을 전수하였다. 

그리고 안향은 미신을 배격해 마을의 풍속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고려사 105권 열전18 에는 안향과 고려 여자 무당과의 일화가 나온다.

  충렬왕 원년에 안향은 경상도 상주(尙州) 판관으로 파견되었는데 

당시 여자 무당 세명이 있어서 요망한 신을 받들고 여러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들은 합주(陜州-현재 합천)로부터 여러 군과 현들을 돌아다니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공중에서 사람이 부르는 소리를 지어 내었고 그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오는 것이

마치도 길을 치라(喝道)로 호령하는 것 같았다.

‘갈도(喝道)’는 ‘길을 치우라’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그것을 듣고 놀란 사람들이 급한 마음에 분주히 제사를 지내었는데

서로 뒤질세라 제사를 올리기 위해 덤비었고 수령으로서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자가 있었다.

그들이 상주에 오자 안향은 그들을 붙잡아서 곤장을 치고 칼을 씌워 놓았더니

무당들이 귀신의 말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을 붙잡아 두면 화를 면치 못한다고 위협하였다.

상주 사람들은 모두 무당들에게 겁을 내었으나 안향은 동요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무당들이 용서해 달라고 빌자 안향은 그제서야 놓아주었고

그 뒤로 귀신도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했던 안향의 유교적 이념을 토대로 조선이 세워지면서

그가 전래한 성리학의 영향은 더욱 커졌다.

1970년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는 고려말기 문신 안향의 이야기가 나왔었다.

3학년 국어 교과서속 안향에 대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어느 고을에 용한 3명의 여자 무당들이 있었는데 고을 원님으로 부임한 안향은 

혹세무민의 요설로 고을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괴롭히는 무당들을 잡아서 칼을 씌웠다.

칼을 쓴 무당들은 원님을 보고 자기들의 신령님이 나타나 큰 벌을 내릴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 고을 원님은 칼을 씌운 그 무당들을 그대로 며칠을 굶기자 그들이 말했던

신령은 나타나지 않고 배가 고파 굶주린 3명의 여자 무당들은 원님에게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빌었다고 한다. 

위와 같았던 내용을 국어 교과서에서 배은 학생들은 한국의 재래 토속신앙이자

무속 신앙이었던 무당을 한국의 재래 토속신앙이라고 여기지 않고,

바로 그때부터 무당을 미신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이미 초등학교때부터 국어 교과서에서 나온 안향의 무당 이야기를 배운 후 

무당을 미신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한 교육의 효과는 엄청난 형태로 작용하여 이후 아이들은 자기집에 가서도

무당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학교에서 배운대로 무당은 미신이라서

그런 것을 절대로 믿으면 안된다고 자기 할아버지와 할머니및 부모님에게 열렬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대한민국 전국의 초등학교에는 자기 모친의 직업이 무당이었던 학생도 더러 있었다.

당시 무당들의 무속 행위와 관련된 일화로서 필자가 들었던 바에 의하면 마산 추산동 산동네에 살았던

무당일을 전수하는 선생 무당은 새로 무당일을 배우러 온 학생 무당에게 가르치는

인간 조종술 수업중에서 무당집을 찾은 손님에게 신령님이 그 손님에게서 원하는 중요한 물품 하나는

바로 말린 명태 북어 제일 큰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무당은 심리적으로 불안하여 무당집을 찾아온 좌불안석인 손님의 상태를 포착하여

자기 가정을 평온하게 해주기 위해 신령님께 바치는 제물로 말린 명태 북어 제일 큰것 몇마리를

가지고 와서 신당에 올려 놓고 빌어야된다고 시키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즉 무당집을 찾은 손님에게 무당은 심리 전술의 점괘를 설파하여 이후 정서적으로 불안해진

그 손님을 다시 무당 자기집을 찾게 만든후 그 손님에게 반드시 자기집안을 편하게 해줄

신령님께 바칠 제물로 가장 좋은 품목은 말린 명태 북어 제일 큰것 몇마리라며

그것을 사와서 정성껏 신당에 올리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당시 1970년대 초에는 먹거리와 반찬거리가 넉넉치 않았던 관계로 무당집 아이들

도시락 반찬으로 사용하기 위해 년중 보관 하기가 쉬운 말린 북어를 가져오라고 시켰다고 한다.

손님들이 가져온 북어 제일 큰것은 다듬이 방망이로 댓돌에 대고 두드려 찢어서 고추장으로 버무린 다음

무당집 아이들 사철 반찬으로 사용했고 그러한 형태로 이용하기 위해 항상 말린 명태 큰놈을 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