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극장

서울 종로 조양여관과 금마차 주점

슈트름게슈쯔 2021. 9. 16. 01:17

한국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1992년작 장군의 아들 3편 영화 속 서울 종로 조양여관과 금마차 주점

 

 

조양 여관은 옛날에 서울 종로 3가 단성사 근처에 있던 여관으로 김두한이 기거하던 곳이었다.

구한말 조선의 개항 이후 인천과 서울 등지에는 서양식 호텔과 일본식 여관이 하나 둘 생겼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 장사꾼과 여행객들은 여전히 객주집을 이용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탈한 1911년 한일합방 2년후 1913년에 서울에 숨어 다니는 독립운동가들을

잡기 위해 ‘객주취체규칙’을 만들었다. 그에 따라 객주들은 자기 집에 숙박한 손님의 인적 사항과

자기 집에 오기 전에 묵은 곳, 행선지 등을 기록해 두었다가 그가 떠나면

한 시간 안에 경찰 주재소에 신고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 숙박부는 일부 변형된 채 아직껏 남아 있거니와, 객주집에 숙박하는 손님이 많을 경우에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규정이었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1일간, 일본 제국주의는 ‘

자신들의 치적’을 홍보하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확인시키기 위해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대규모 박람회를 열고 전국에서 160만여 명을 강제 동원해 관람시켰다. 그런데 당장 숙박시설이 문제였다.

서울 구경온 시골 사람이 사흘씩만 묵는다고 가정해도 매일 10만 명 정도에게 잘 곳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 무렵 서울 인구는 20만 명 정도였는데, 그중 6만 명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방에 조금 여유가 있는 집은

모조리 여관으로 등록하다시피 했다.그러했던 관계로 당시 서울은 그야말로 여관의 도시가 됐다.

행사가 끝난 뒤 수많은 여관이 곧 폐업했지만, 남은 일부는 다른 ‘영업’으로 활로를 찾았다.

그 이후 지금껏,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도시들은 세계적으로도 여관 많은 도시라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서울 종로 조양여관과 금마차 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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