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

한때 융성했던 마산의 중국집들[Korea Masan all those years ago famous Chinese Restrants]

슈트름게슈쯔 2010. 4. 10. 10:43

 

 

 

 

 

 

  

 

  

 

 

 

 


                   

 

 

 

 

 

시대와 소득 수준의 변천에 따라 사람들이 외식을 접하는 형태의 조류는 여러가지 유형으로 변화되어 왔다.

해방이후 한때 외식의 대명사처럼 이어져온 중국 음식점들은 변화하는 격동의 시대와 같이

 다원적이고 다각적인 가짓수의 외식 산업에 밀려 근래는 그 명백을 유지할뿐

과거와 같이 호황을 누리는 중국집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과거 한국에서 살림이 궁핍하고 먹거리가 흔치 않던 보릿고개 시절에는

 하루 세끼 먹여주고 잠 만 재워준다해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시절이 있었던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한때 중국집의 일반적인 메뉴였던 짜장면과 짬뽕,볶음밥등은 서민들이 자주 접할수 없는 고급 음식에 속했다. 

그러나 언제 부터인가 그러했던 시절과는 달리 지금의 잣대로 보자면 

현저히 달라진 엄청난 격세지감이 있지만 그러한 시절에도

국내에서 중국집 메뉴의 대표 주자격인 짜장면의 인기는 대단했다.

1950~60년대에 수도 서울에서는 한달에 한번 짜장면을 먹기 위해서

계를 조직하여 모임을 가지기도 했고 어떤이는 짜장면이 하도 먹고싶어

중국집에 배달부로 취직하여 이후 중국집 주방장의 혹독한 괄시를 단단히 겪으며

요리를 배운후에 중국집 사장이 된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한국 외식업의 분야에서 수십년동안 거의 독보적인 인기를 누려왔던

중국집의 열기는 예전만 못한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이유는 여러 세대를 거쳐 오는 가운데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의 입맛과 식생활 문화의 패턴 또한 바뀌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토록 뜨겁던 짜장면의 열기는 소위 대한민국의 격동기였던 1963년에 처음 등장하여

지금껏 대량 소비되는 대표적인 인스턴트 식품인 라면이 그나마 짜장면의 열기를 눌렀고

차츰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해외 외식산업의 메이커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함에 따라

 짜장면의 우선적인 선호도는 그만큼 감소되었다.

그 옛날 한 그릇의 짜짱면에 만족하던 전후 세대들과는 달리 요즘의 한국 사회속에서는

 그 종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의 수많은 외식 산업이 등장한 형태로 변화했다.

어린이및 신세대들이 선호하는 형태의 외식인 햄버거,피자,돈까스,치킨,도넛,

족발,감자 튀김,스파게티,스테이크,본죽,포장일식,등등 온갖 먹거리의 수요가 풍부하다 보니

자연히 중국집의 인기는 뒤로 밀려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6.25이후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에 의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국가의 제일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정부가 국민들에게 공표한 여러가지 가족 계획의 표어를 남기기도 했었다.

 

 

60년대의 대표적인 표어였던 [무턱대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와

70년대는 [아들,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기르자]란 표어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가족계획 표어였다.

1970년도 후반에 한때 인구가 57만명에 이르렀던 경상남도의 마산시는 전국 7 대도시중의 하나라고 소개가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마산의 인구가 늘어났던 이유중의 하나는  

1970년대 초반에 막 계획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대한민국 굴지의 공업 도시인 창원을 옆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창원 공단에서 근무하는 노동의 인구는 전국에서 창원과 마산일원으로 몰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의  공화당 시절 청와대 경호실 비서실장 박종규씨의 고향이 마산의 바로옆 도시 창원이었던지라

 그의 입김에 따라 대단히 크게 작용했던 정치적인 영향력에 따라 향토 발전의 이권을 톡톡히 누리기도 했다.

 

 

버려진 불모지 같았던 마산 봉암동의 갯벌 수만평은 매립되어 수출자유지역을 만들어

해외의 회사들을 끌여들였고 그 옆에는 가난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가질수 없었던

소녀들이 전국에서 한일합섬으로 한해에 수천명이 몰려들었다.  

그에따라 갑자기 늘어났던 그러한 인구를 유치하기 위해서 많은수의 살립집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봉암 공단과 가까웠던 마산 용마산밑의 산호동일대는 월셋방을 구하기 힘들었고

 그 주변 지역의 경제 또한 인구 증가에 따라 자연적인 발전을 구사할수 있었다.

세간살이를 마련할 그릇 장사와 가구 장사,이불 장사,옷장사,식료품장사들

또한 전에 볼수 없었던 호황을 맞이 했고 제일 크게 한몫 단단히 잡은 업종중의 하나는 마산 어시장의 젓갈 장사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의 기본 반찬인 김치의 재료로 이용 되는 멸치젓갈은 김장철뿐만 아니라

년중 회사 밀집지역의 구내식당에서 대량으로 소비된다.

어시장에서 가내 수공업으로 대량 제조된 멸치 젓갈들은 마산 시내는 물론

인근의  창원공단과 봉암공단,한일합섬내의 공단 식당등에 해마다 때마다 수천통의 젓갈 드럼이 소요되었다.

 

 

이러했던 인구 증가에 따른 지역적인 현상으로 인하여

마산 시가지의 여러곳에서는 중국집 또한 그에 편승되어 성업을 이루게 되었다.

마산 시내에서 제일 유명했던 중국 음식점중의 하나는 남성동 파출소 밑에 위치했던 쌍흥관이었다.

이 곳은 90년대 초반까지 영업을 계속하다가 건물 주인의 빚에 따라 금융권에 저당 잡힌후 폐업되고 말았다.

현재 중리 마산대학에 남품을 하는 40대 초반의 모 업자는 자기의 어려웠던 청년시절

 창동 학문당 뒷골목에 위치한 정근식당의 불고기와 남성동 쌍흥관의 짜장면을 한번 량껏 먹어보는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중앙극장밑의 리생원(梨生院)은 마산에서 화교 중국인이 경영하던 오래된 중국집중의 하나였다.

이 중국 음식점의 주인은 다른 중국집과는 달리 이집만의 특화된 상술 비법이 한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여름에 가지를 대량으로 구입한후 그것을 세로로 썰어 말려서 튀긴후

우동과 짬뽕에 고명으로 넣어 서비스를 구사하는 전략적인 상술로 돈을 왕창벌었다. 

그곳의 주인은 50년대 중반부터 영업을 한후 70년도 후반에 중풍이 든후

다른 세입자가 [중앙관][한국관]등으로 여러명이 간판 이름을 바꾸어 영업을 하다가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리생원의 위치에서 조금 밑의 지점인 청락탕옆에서도 화교 한명이

오랫동안 장사를 하던 중국 음식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산 성호국민학교 입구에 있던

성호 68 이태우의 부친이 운영하던 천일 모자점 건너편 청락 목욕탕 건물의 청다방과 청락예식장과 청락미용실및 

 정명준씨가 운영하던 마산모자센타 옆에 있었던 춘화원(春花院)이었다.

이 집의 주인은 50년대 중반 부림동 근처에서 드럼통위에서 호떡장사를 하면서

짜장면과 짬뽕을 한그릇씩 팔면서 돈을 벌어 모은뒤 자수성가를 한후 그곳에 중국 음식점을 열었다.

그 춘화원 또한 1대 주인이 작고한후 화교인 아들이 물려받아 장사를 계속했었다.

그리고 시대의 조류에 따라 옛날의 호황을 뒤로하고 90년대 후반

주인의 아들이 종업원에게 업소를 넘기고 진해역쪽으로 이전하고 말았다.

주인이 바뀌었던 춘화원은 이전의 주인에 비해 현저히 요리 실력이 모자라는 입장에 따라

돼지고기가 아예 한점도 들어가지 않은 국적 불명의 짜장면과

역시 볶은 돼지고기가 한점도 들어가지 않은 게맛살을 썽둥 썽둥 썰어 넣은

무성의하고 맛없는 볶음밥등을 만들어 내다가

새로이 등장한 주변의 신생 중국집들인 오동동의 [양자강]

중성동의 [창동관][만리장성]등에 영업권이 잠식 당하다가 몇년후 폐업하고 말았다.

이같은 사례는 중국 요리집의 기본인 짜장면과 짬뽕등에 신선한 돼지고기와

오징어를 사용하는 중국집 요리의 정공법을 잊은채 재료비를 아끼려고

돼지고기를 빼고 물오징어대신 마른 오징어를 물에 불려 영업을 하다가

결국 입맛이 정직한 소비자들에게 외면 당한 사례였다.

중국 음식의 기본적인 재료는 양파와 돼지고기에서 시작된다고 볼수 있다,

더우기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 음식화되어 버린 짜장면에 볶은 돼지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짜장면은 짜장면이라고 볼수가 없다.

 

 

 

만화가 신동우(1936~1994) 화백

 

 

 

 

 

 

1960.70년대 대한민국에서 홍길동 만화로 유명했던 작고한 만화가였던 신동우 화백은

1970년대초에 대표적인 그의 만화[차돌바위]에서는 초능력을 가진 꼬마가 어쩌다 산적들의 두목이 되었다. 

산적들은 꼬마 두목에게 무슨 음식이 가장 먹고 싶냐고 묻자 

그 꼬마는 지금 배가 고픈데  짜짱면이 가장 먹고 싶으니 당장 짜장면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산중의 산적들 산채에서 짜장면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인 돼지고기를 찾을수가  없자 

돼지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짜장면을 만들어 꼬마 두목에게 갖다 바친다.

꼬마 두목은 그 짜장면의 맛을 본후 돼지고기가 한점도 들어가지 않은 가짜 짜장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돼지고기가 들어간 짜장면을 다시만들어 내라고 산적들에게 명령한다.

그러자 산적들은 한가지 잔꾀를 냈다.

산중에 돼지가 없자 먹물을 묻힌 붓으로 종이 봉지에다가 돼지 대가리 그림을 그려

개에게 씌워 돼지를 잡아서 짜장면 속에 넣어 준다고 했다 

그러나 돼지대가리 그림 속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나자 꼬마는 돼지 대가리 그림이 그려진 봉지를 벗겨버린다.

돼지대가리 가면을 쓰고 있다가 산적의 식칼에 요리 재료가 되어 목숨을 잃을뻔한

개에게 꼬마 두목은 산적들을 물어 버리라고 명령한다.

당시 신동우 화백은 이솝이야기를 각색한 듯한 이러한 재미있는 만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한 만화속에서도 돼지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짜장면은 꼬마 산적 두목으로 부터 외면을 받았었다.

그 당시 그 만화는 대한민국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만화방에서 즐겁게 보았을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어린이들의 정직한 입맛을 결코 속일수는 없다는 교훈을 주는 좋은 만화이기도 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경험해온 짜장면의 기본적인 맛은 제대로된 춘장과

그속에 첨가되는 맛있는 돼지고기이다.

요즘 짜장면의 대부분은 시대적으로 바뀐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달착지근한 맛을 내기 위하여 보신탕과 마찬가지로  화학조미료 MSG를

한 숟가락씩 넣어야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제대로된 짜장면이 만들어 진다.

왜냐하면 그렇게 MSG를 첨가해 넣지 않으면

그동안 화학조미료가 듬뿍 든 짜장면의 입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바뀐 입맛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성동 골목안의 [만리장성]이란 중국집은 마산시내의 같은 요식업체 중국집들의

원성과 비난을 받아 항상 욕을 들었던 대표적인 악덕업소였다.

90년대 후반 IMF 금융대란으로 인하여 한국 경제가 곤두박질칠 당시

짜장면 한그릇의 가격은 2500원 이었는데 그곳은 한그릇에 1000원씩 팔았다.

물론 1000원짜리 짜장면의 맛이 그리 좋을수는 없었다.

그곳의 짜장면 속에는 역시 돼지고기가 한점도 존재하지 않았고

춘장비와 물엿비를 아끼려고 식용 캐러멜과 갈분가루가 걸쭉한 짜장을 넣어 팔았다.

그러자 한때 싼 짜장면의 소문이 인근 도시 창원까지 자자하게되어 주말에 창동 시내로 나온  

학생들과 젊은층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했으나

그맛을 본 소비자들은 하나 둘씩 다시는 그집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만리장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은 중국집의 특기중 하나는 

만원짜리 하나에 [탕수육 + 짜장면 2그릇+ 군만두 1접시]  등의

모음 요리를 홍보용 전단을 뿌려 배달로 재미를 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메뉴는 재료가 너무나 부실하고 맛도 없어서

 자연히 이 업소에 손님들의 발길은 뚝 끊기게 되었다.

그에따라 이 업소 또한 얼마 되지 않아 폐업하고 창원 대방동으로 업소를 이전했다,

이와 같은 중국 음식점의 악덕 영업 형태는 결국 제살 깍아먹기식의 경쟁으로

 중국집 메뉴의 가격을 너무 낮추는 바람에 정상적으로 영업을 하는

주변의 여러 중국음식점 업소등을 문 닫게 한후 결국

자기의 업소도 문을 닫은 어처구니 없는 나쁜 사례를 보여준 경우였다.

이 업소는 창원 대방동으로 옮긴후에

2001년 필자는 어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이 업소의 면식이 있는 배달부를 볼수 있었다.

여기까지 이사를 와서 영업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했다.

한마디로 마산에서 벌이던 악덕 상술을 창원에서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업소가 현재까지 창원 대방동에서 영업을 계속 할지는 의문이다.

 

 

마산시내에서 중앙극장 밑의 소방도로에 있던 제법 유명했던

그 두곳의 중국 음식점과 그 밑의 [설미반점][열래춘][쌍룡각][양지반점]등도

오랫동안 장사를 하거나 한때 문을 열었다가 곧 없어지고 말았다.

또한 한때 대진백화점 7층에서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며 장사를 하던 [대진루]는

얼마 안가 장사를 접었고,창동 입구 철길 건널목 옆에

옥소은이란 성호국민학교 여학생의 부친이 운영했던[중앙반점]과

 그 뒤의 골목안쪽에 마산의 허새비 시인으로 알려진 이선관씨가 세들어 살았던 [복해루]는

중국집의 이름을 무슨 무슨 반점이 아닌 3자로된 이름으로  업소명을 곧잘 바꾸기도 했다.

나중에는 [야래등]으로 이름을 바꾸더니 시민극장 뒷골목으로 장소를 옮겨 [만리향]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업을 하다가 곧 폐업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북마산 교방동에서 성업중인 [옛날 손짜장]은 몇년전 서원곡 입구의 서원장 여관 옆으로

 이사를 와서 자리를 잡더니 손으로 직접 뽑는 옛날 손짜장이라는

영업 전략이 주효하게 맞아 떨어져  밀려드는 손님들로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 위치에서 200m정도 떨어진 의신여중 밑의 [용정관]은 황제 쟁반 짜장이라는

쟁반 짜장면 전문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며 성업중이며

그 위치 및 성호동 철길 바로위의 오래된 중국집 [성호반점]은 옛날 방식의 볶음밥으로

볶은 돼지고기를 제대로 넣어 맛있게 잘 만드는 중국집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근 30여년이 넘게 아직까지 성호동,교방동일대에서 꾸준히 영업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태양극장 밑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오던 [태양반점]은

 태양극장이 문을 닫은후 그만 두게 되었고 태양극장 밑 구마산 역앞의

개그맨 한민관과 이름이 비슷했던 [성민관]은 그 앞에

마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8차선 신작로가 생긴뒤 구마산역 부지는 육호광장이라는 로터리가 되었다.

그리고 [성민관]은 그 육호광장의 제비산을 보는 쪽의 점포에서 몇년간

영업을 지속적으로 하였으나 결국 문을 닫았었고 

상남동 청수탕 목욕탕 옆에 있었던 [희락관]또한 한때는 그 일대에서 

장사잘되기로 유명한 중국집이었으나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마산 시청 옆의 [영기루]는 문을 닫고 

매콤한 탕수육과 짬뽕 국물로 유명한 [영생각]은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중성동 구 동방생명 건너편에서 장사를 하면서 마산 시가지내의 원거리에도

신속한 배달을 구사하며 한때 돈을 왕창 벌었던 [재훈반점] 또한

점점 경제권이 좋아지는 기색이 없던 시내를 벗어나 다른 시의 지역으로 이전하고 말았다.

그외 북마산 골목의 [수미관]과 완월동 성지여고옆길의 [아사원]및 완월성당 건너편의 [모경관]

 크리스탈 호텔내의 [아사원]또한 없어지고 말았다.

가장 재수가 나빳던 경우의 폐업 형태는 서성동 개나리 동산위 [신신예식장]옆의 [청송반점]이었는데

이 음식점의 주인은 실내의 연탄난로 위에 대형 솥을 올려두고 항상 그속에 물을 넣어 끟였다.

그런데 어느날 밤새 끓던 물이 솥에서 완전히 증발한후

솥이 뜨겁게 달구어지면서 주위에 불이 붙어버려 순식간에 화재가 나버리고 말았다.

자다가 화재로 인해 잠이 깬 주인은 놀란 나머지 앞길이 캄캄한 입장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영세한 업소 내부에 있던 가재도구들을 두고 급하게도 그대로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그로써 중국집에 세를 준 건물 주인 또한 밤새도록 달구어진

[청송반점]의 가마솥으로 인한 화재로 집을 몽땅 태워 버리는 피해를 당하고 말았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영업을 해온 중국 음식점중의 하나는

부림동 닭전밑 구 시민냇과 위의 [화성원]이었으나 몇년전 폐업을 하고

그 자리에는  이제 메뉴가 바뀐 돼지국밥집이 들어섰다.

그쪽에서 조금 떨어진 부림시장을 건너오면 구[쌍흥관]이 나온다.

(구) 쌍흥관이 있었던 건물은 근 10여년동안 은행에 차압이 된 입장에 따라

제대로 건물이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 씽흥관의 건너편에는 [북경성]이라는 중국집이 있는데 

이 중국집 만은  마산 시내 구도심 한가운데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30여년이 넘게 지속적인 영업을 해오고 있다.

이 중국집의 특징은 가격이 비싼 고급요리든 짜장면 1그릇이든 아예 배달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관계로 중국집의 대표적인 요소중의 하나인 철가방 짜장면 배달부를 두지 않는다.

즉 맛으로 승부를 거는 중국집이니 만큼 맛있는 짜장면이 먹고 싶으면

자기 업소로 직접 먹으러 오라는 것이다.

그 만큼 [북경성]의 짜장면은 맛이 있기로 주위에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기도 하다.

현재 마산 구도심의 시내 부림동과 창동밑의 남성동에

북경성및 사해원과 외래향이라는 3곳의 중국집이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경성 바로옆 도로변으로 (구) 마산 무아 음악감상실 쪽으로 가다 보면

대구철물 건너편의 모서리 건물에 위치한 자그마한 중국집이 하나 있다.

이 중국집의 이름은 한 마디로 독특하다.

중국집의 이름은 1990년대 초 한국에서 빅히트를 기록했던 

주윤발과 종초홍 주연의 홍콩영화였던

종횡사해(縱橫四海)와 영화 제목의 뒷 두글자와 같은 사해원이다.

사해원(四海院)이란 중국집은 2000년대초에 생겼는데 이 곳은 맵새하고 고소한 짬뽕과

삭스핀 스타일의 광동면과 광동밥의 맛이 일품이라서

10평도 안되는 점포에 항상 그곳을 찾는 많은 손님들로 인하여 문전성시를 이룬다.

원래 이프(IF)카페 1층의 이곳은 1970.80년대에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 광생당 한약방이었으나

주인은 2000년대 초에 작고하고 그의 아들이 장소를 물려받아

업종을 한약방에서 중국집으로 바꾸어 사해원(四海院)을 경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경남은행 건너편 건물 1층에는

외래향이라는 중국집이 성업중이다.

원래 이 건물은 1970년대말 (구) 금백제과 자리였다.

그러다가 캠브리지 멤버스 양복점으로 바뀌었다가 화장품코너및

Sub Way 샌드위치등 여러 업소를 거친후 몇년전 중국집이 들어섰다.

이름은 과거 창동 학문당 뒷골목 위에 있던 만리향과 이름이 비슷한 외래향이다.

이 곳은 잡탕밥 요리를 잘 한다고 소문이 나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집 주인은 한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그 집 주방장인지 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을 지나다 보면 그곳 관계자는 항상 음식점 입구 주변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에 띄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대단히 좋지 않은 장면 이다.

그것은 그러한 인체에 크나큰 해악을 끼치는 4000가지의 발암 물질이 내포된 

담배를 피우는 비위생적이고도 지저분한 장면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야와 

사람들의 뇌리에 지속적으로 각인이 되면 저 음식점 앞을 지날때면 꼭 장사가 되지 않는지 밖에서

담배를 피운다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부지불식간에게 전달되게 된다.

그러면 어느때부터 한 두사람씩 그 음식점을 찾아가지 않게 된다.

그리고 모름지기 만인을 위해 음식 재료를 다듬는 사람은

손님들의 입맛과 건강을 위한 서비스맨이자 공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정성을 기울여야 제대로 인정받을수 있는 음식점 주방장이자 요리사가 될수 있다.

일반 대중들이 건강을 위하여 먹는 음식을 만드는 사회적 공인의 손에 묻은 담배 니코친 성분이

음식 재료를 다룰때 같이 묻어서 손님들이 입으로 먹는 음식에 니코친 성분이 같이 함유되어 섭취된다면 

이것은 대단히 해롭고 비위생적인  일이자 그러한 우려를 하는 사람들은 다시는

길거리에서 주방장 요리사및 주방 보조원들이 담배를 피우는 음식점에는 자연히 발길을 끊게 된다. 

 

  

마산에서 제일 우스운 이름의 중국집은 서성동 전신전화국 뒤에 있는 중국집이었다.

그 중국집의 이름은 몽고종 인류가 태어나면 엉덩이 위에 문신처럼 파랗게 나타나는

반점으로 볼수 있는 몽고반점과 이름이 똑같은 [몽고반점]이었다.

세월은 흘러 몽고반점 또한 몇년전 문을 닫아 버렸다.

시내보다도 동네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음식맛으로 인하여

자산동 완월동 아파트단지 상권을 장악하여 30여년을 성업중인

중국집은 자산동 마산중학교 밑에 위치한 [삼성원]이 있다.

그리고 자산동 삼거리 옆길에는 몇년전에 중국집이 하나 새로 생겼다.

그 업소는 부림동에 있던 중국집 화성원이 그 곳으로 이전을 한 입장인지도 모르지만 좌우간

부림동 (구) 시민냇과 밑에 위치해 있던 화성원의 이름과 똑같은 화성원이란 이름으로 중국집이 하나 새로 생겼다.

삼성원 바로 앞 동네에 새로 개업했던 화성원은 삼성원의 아성에 대항하기위해 생긴 업소로 볼수있다.   

마산고등학교 입구의 골목에 위치에 있는[흑룡강반점]은 마산 시내에서 유일하게

설날과,추석에도 짜장면을 시켜먹을수 있는 소규모의 중국집이다.

또한 전국에서 제일 웃기는 중국집의 이름중에 하나는 진해 대야동에 있는 [강동원]이다.

이 중국집의 이름은 창원 출신의 미남 배우 [강동원]의 이름과 똑같아

그 이름으로 하여 선전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고 한다. 

마산지역 인근의 중국집중에서 볶음밥을 대단히 맛있게 잘하던 39사단 가는길 창원역앞에 있었던  

[대구반점]또한 한때 융성했다가 4차선 도로가 생기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또한 1980년대초 창원 39사단 가는길의 창원여중옆 서상동에서 갓골 입구에 위치한 수양버들이 늘어진 곳의

도로변에 생겼던[강화류] 또한 얼마 안가서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창원지역에서 짜장면이나 볶음밥 1그릇을 시키면 2인분에 해당하는

많은량을 주는 후덕한 인심을 느낄수 있는 중국집이 있었는데 그곳은 북면 온천에 있던 [부산반점]이었다.

이집의 여주인은 남상이었는데 일복이 많았던 나머지 체형이 남자처럼 변하여

어깨 근육과 오랑우탕을 닮은 강대한 팔뚝은 남자 육체미 선수를 방불케 했다.

손은 흡사 머슴 손처럼 솥뚜껑만 했는데 뱃구리가 큰 북면의 농사를 짓던

다수의 동네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던지라 1인분 음식의 양은 보통 중국집에서 시키는 1인분의 꼭 2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업소는 외지인들이 음식량이 많다고 하는 말이 많았던 때문인지

어느때 부터 음식의 량이 반으로 움푹 줄어 들어 버렸다.

현재 부산반점은 옛날 손우동이라는 간판으로 바뀌어 계속 영업을 하고 있다.

창원에서 짬뽕의 건더기와 국물맛이 매콤하고 시원해서 그 맛이 1등급의 수준이라 쳐줄수 있었던 

중국집은 소답동의 [국일반점]이었고 볶음밥을 시키면 짜장건더기를 넉넉하게 리필해주는

소답동의 [천일반점]은 창원중학교와 창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매일 천여곳 정도의 음식점이 문을 닫고

그와 비슷한 수치의 또다른 요식업소가 새로 생겨나기도 한다.

어느때 무슨 곰탕과 닭갈비,장어구이, 뼈다귀해장국,막창,막걸리집,곱창,불낙집등이

유행하는가 하면 그와는 조금 차별화된 새로 등장한 요식 형태에 대하여 금새 몇년 못가서 밀려나 버린다.

또한 시절운에 따른 변수가 발생되기도 하는데  치킨점이나 돼지고기 요리점이나

횟집을 차린지 얼마 되지 않아 조류 독감과 구제역및 비브리오 패혈증등이

오래 지속되는  영향으로 바로 영업이 중단 되버리는 비운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떤 음식점이라도 영업이 부진하여 문을 닫을 상황까지 다 다랐을시에

그에 대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겠지만 그중 제일 큰 이유는

무었보다도 그 음식점에서 제공되는 음식의 맛과 품질이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들수 있다.

그것은 그 원인 자체가 원론적으로 보면 아주 단순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식당이 지속적인 흑자 경영의 영업 형태를 구사하려면

우선적으로 청결한 식당의 조건과 신선한 재료의 재공급에 의한 훌륭한 맛의 연출은 기본이요

그것을 바탕으로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의 까다롭고도 정직한 입맛을 확실히 충족시켜야 한다.

 





 

 

photo from : MBC 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