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
B.C 280년경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묘사한 삽화
현재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삼국시대 역사를 살펴 볼수있는 고구려 이문진이 편찬했던 역사서 신집 5권과
백제 고흥이 제작한 역사서였던 서기및 신라의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이 편찬한 향가집이었던 삼대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를 살펴볼때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삼국시대 한반도의 역사중 발해의 역사를 빼버려
후대에 사학자 단재 신채호선생은 김부식을 민족 최고의 만고역적이라고 지칭했다.
그로 인하여 현재 중국은 동북공정에 의해 발해 또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역사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다.
고대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으며,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으로 발전했으며, 로마 시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3세기 초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며,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1세 (혹은 프톨레마이오스2세)의 착안으로 개관했다.
(플루타르코스(기원전 46~120년)은 카이사르가 기원전 48년에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했을 때 실수로 알렉산드리아를 불태우게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당대의 방문 기록에서는 확실하지 않다.
도서관이나 혹은 일부 소장 서적이 몇 번 파괴된 것은 상당히 확실하지만,
그러나 이 시대에 도서관이 파괴된 사건에 대해 자세한 경위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가 입은 최악의 타격은 4세기 말경부터 시작된 기독교도들의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5세기경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주도아래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이단 숙청 과정에서
히파티아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살해당하거나 국외로 망명하였으며,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완전히 파괴 되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만행으로 말미암아 헬레니즘 학술의 귀중한 성과는 대부분 잿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과거의 도서관을 기념하고 이에 필적할 수 있기 위한 뜻으로
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Bibliotheca Alexandrina)이 2003년 옛 도서관 자리 근처에서 개관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앞 도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인류 역사상 가장 웅대했을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도서관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시 알려져 있던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그 번영은 국경을 넘어 저 멀리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가 사망한 뒤에도 그의 계승자들은 지중해 지역에 그리스 문명을 전파시는데,
B.C. 305년 이후에 이집트의 하류지방에는 프톨레마이오스라고 알려진 통치자들이 그리스 성격을 띤 국가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이 도서관의 건립은 프톨레마이오스 소터 1세(Ptolemaios Sorter)에서 시작되었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모든 나라들로부터 책을 수집했던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피라텔포스(Ptolemaios Philadelphos, B.C. 309-246)때에 와서 이루어졌다.
이들 통치자들은 희랍의 모든 자료를 수집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책들을 다 모아서 알렉산드리아를 학문과 지식의 보고로 만들자! 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이 계획은 어느 정도 지켜졌고, 실제로 BC3세기 경, 알렉산드리아는 전세계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공부중인 스콜라>
그들은 문헌 수집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예컨대 이런 방법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경비병들은 알렉산드리아 항에 기항하는
화물선이나 상선을 모조리 수색해서는 책이란 책은 몽땅 끄집어냈다.
그런 다음 길고 긴 도서목록을 대조해보고나서 도서관에 없겠다 싶은 책만 솎아내고선 이렇게 우겼다.
'우리가 도서관 좀 만드려고 하는데?
마침 여기에 없는 책을 가지고 있네.
그러니까 둘 중 하나만 택하라.
이거 필사할 때까지 기다렸다 필사본 가지고 갈것인가?
아니면 그냥 원본 주고 갈것인가?"
때로는 빌려간 도서를 필사하고 반납할 때까지 예치금을 주기도 했지만,
이 예치금을 포기해도 원본은 반환되지 않았다.
또 어느 때는 아예 원본을 가져버리고 나몰라라 했으니.
완전 고대의 지식전쟁터 한복판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수집한 서책들은 무려 70만권에 이르렀다.
종류도 매우 다양해서, 그리스의 희곡들도 있고, 점토판으로 된 고대 수메르인들의 서적도 있고,
갈가메시 서사시서부터, 알렉산드로스 일대기, 이집트 신화의 사자의 서나,
생명의 서, 에라토스테네스의 천문학 서적, 프톨레마이오스(용케도 왕조와 이름이 같은 천문학자)의
천문학 이론서까지 그야말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독자적인 학술연구뿐만 아니라 박물관도 마련된 종합 연구단지였었다.
이 알레산드리아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들도 전문적인 학자들에게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초대 관장은 문법학자인 제네노도토스(Zenodotos, B.C. 260)였는데,
그는 그렇게 모은 70만권의 서적들을 색인하는 작업을 맞았고, 호메로스의 작품을 비롯한 그리스 문학을 편찬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줄줄이 그가 못이은 색인 작업에 메달렸는데
그 가운데에는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B.C 275-194?)도 있었다.
또한 키레네의 칼리마쿠스(Calimachus of Cyrene, B.C. 305-240?)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도서 목록을 정리해서 유명한데 72만권이나 되는 책제목이 적힌 이 도서 목록은 <피나크스 Pinakes>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피나크스에는 '모든 종류의 문학에 뛰어난 작가 이름과
그 작품을 망라하는 목록'이라는 부제목이 붙여져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최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확실하지도 않아. 하지만 다음 세 단계로 구분지을 수는 있겠지. 가장 첫번째는 카이사르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우리의 케사르, 즉 줄리어스 시저가 어느 날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초청으로 알렉산드리아에 갔다.
케사르는 이 이집트 왕의 전략가 포트니우스에게 잘못보였다는군.
그는 환관이었는데, 들리는 야사에 따르면 케사르가 그 환관에게 불알이 없다고 놀렸다고 한다.
결국 포티니우스는 카이사르에게 앙심을 품고서 음모를 꾸미고는 동료 아클리아스와 암살 계획을 새우는데,
시작단계에서 바로 걸려서 포티니우스는 목이 잘렸다.
그러나 아클리아스는 탈출에 성공하여 강력한 군대를 일으켰고
카이사르가 머물던 알렉산드리아를 완전히 포위했다.
카이사르가 그렇게 기원전 47년에 포위 당했을 때,
항구에 정박해 있던 선함에 불을 질러 불길이 옮겨가 이 유명한 도서관이 큰 손실을 입었다.
창고에 보관되었던 도서는 불탔지만 그나마 크게 번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더불어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그때는 왕녀)한테 불태운 장서를 대치하기 위해
소아시아 페르가몬에 세워진 페르가몬 도서관에서 가져온 20만개의 두루마기를 기증했다.
그럼에도 40만권이 소실되었으니 그 량을 측정하여 가감해보면 20만권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꼴이다.
그 후 로마가 크게 뜨고나서 군인황제인 아우렐리아우스가 270년경쯤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크게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우렐리아우스 황제가 팔미라 왕국의 폭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 동안 왕궁이 파괴되고, 더불어 도서관도 크게 파괴되었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상황은 바뀌어 버린다.
4세기경 동로마 제국 소속의 테오필루스(346~395)는 자가 이교도를 박해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테오필루스는 5세기 초기에 활동한 신학자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였다.
이 자는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격렬히 반대했고, 그리스도교 저자들과 수사들이
이단설의 영향을 받는 것을 신랄히 비판했으며, 당시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자였다.
이러한 인물에게 온갖 이론과 신화와 잡다한 수사학이 총집결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박물관은 이교 사상의 가장 좋은 본보기로서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상형문자와
이집트 여신들이 이교도 배척의 최초 목표가 된 입장이었다.
결국 391년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기독교 집단에 의해 침해를 받았다.
당시 자그마치 수십만권이 넘는 책이 불태워졌으며 도서관 터는 교회와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이것으로 사실상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생명을 끝장났었다고 할수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당시 시대 도서관의 터]
이것도 터기 부분의 동명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것으로... 현존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유적은 전무
마지막으로 642년경 오마르장군 지휘하에 무슬림들의 침공으로 남아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일부분마저도
완전히 파괴하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사망선고를 받아.
오마르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기를 원했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파괴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3단논법을 구상하였다.
이와 같이 3단 논법을 통한 오마르의 명령으로 도서관장서는 알렉산드리아 대중목욕탕의 연료로 불태워졌고
6개월 동안이나 열기를 유지했으며, 이후 알렉산드리아에는 다시 도서관 부흥은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재건은 일어났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입구의 도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내부
1988년 유네스코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재건하자고 결의를 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새로운 도서관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 계획은 참으로 웅장하여 전 세계에서 책을 보내고 웅장한 도서관 건물 설계도가 구상되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도서관을 지을 돈이 없어서 결국에는 유네스코에서 비용을 들여 공짜로 지어주었다.
항상 인류의 보고를 파괴하는 건 인류 스스로의 오만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있는 장서는 20만권이다.
세계인 모두가 이 도서관은 제발 오랫동안 유지되기를 바라는 입장일것이다.
기원전 3세기 초부터 프톨레마이오스왕조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었던 알렉산드리아 박물관과 도서관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이 지중해를 넘어 이집트를 점령한 후
이 나라 북부에 자신의 이름을 딴 기획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우고 난뒤 그 역사는 시작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이 지역의 통치권을 쥐게 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기원전 323년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도서관을 건립했다.
이 도서관은 로마군에 의해 전소되기까지 300년 동안 서양 헬레니즘 문명의 요람 구실을 한다.
이 도서관이 처음 체계화된 것은 아테네도서관의 성과를 잘 알고 있는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Demetrius Phalereus)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박물관이나 도서관은 부서별로 전문화되었고 성직자가 관장을 맡았으며, 직원들의 보수는 이집트 국왕이 지불했다.
박물관이나 도서관의 본관은 왕궁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기원전 235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는
사라피스신전(Temple of Sarapis)에 그 별관이 설립되기도 했다.
2000년 전 처음 도서관을 연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광적인 도서 수집가였다.
예컨대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곧바로 전담팀이 배 안을 수색해 모든 책(파피루스나 양피지 두루마리)을 압수할 정도였다.
원 주인은 필사본만 돌려받을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코란 필사본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세계 여러 나라에 사절을 파견해 책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인도에서는 불교 경전이,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의 자료들이 전해졌다.
아테네로부터는 유명한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원본을 입수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도서관이 그리스 문헌을 취합할 뿐 아니라 지중해·중동·인디아 등지의 모든 언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기도 함으로써
국제적인 도서관으로 발돋움하려 했던 그 이상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로 그리스 문헌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기록에 남아 있는 유일한 번역은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뿐 이었다.
'별관'으로 알려진 도서관도 391년 그리스도교도에 의해 파괴되었다.
기원전 43년 로마군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울 때 함께 소실된 두루마리의 숫자는 70만권에 달했다.
이 도서관의 편찬 계획을 통해 그리스 시인들의 작품들을 취합하는 것, 많은 작품들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책으로 묶는 것,
그리고 문장부호와 악센트 체계의 점진적인 도입이 이루어졌다.
국내의 서지 자료의 수합은 칼리마쿠스(Kallimachos)가 맡았다.
그것은 현재 유실되고 없지만 비잔틴 시대에까지 전해져 오면서 그리스문학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박물관과 도서관은 여러 세기 동안 유지되다가,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황제 때 일어난 내란으로 파괴되었고,
2002년 4월 현재 이 도서관의 소장 도서는 25만권에 불과하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관계된 일화 ; (지구 둘레 측정)
에라토스테네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문헌을 뒤져보다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레네에서는 하짓날 정오가 되면 해가 머리 바로 위에서 수직으로 비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시레네에서 약 9백25Km 떨어진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이 단순한 사실에서 한가지 착안을 하게 된다.
땅에 수직으로 막대를 세웠을 때 막대와 그림자의 끝이 이루는 각을 재고
두 도시의 거리를 재면 지구 둘레의 길이를 측정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 둘레를 측정할 때 에라토스테네스는 두가지 가정을 했다. 첫째, 지구는 완전한 구형이다.
둘째로 태양광선은 지구에 평행하게 들어온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막대와 그림자가 이루는 각은 두 도시 사이의 거리를 호로 하는 부채꼴의 지구 중심각과 같다.
에라토스테네스가 계산해낸 지구 둘레의 길이는 오늘날 측정치인 4만여 km에 아주 가깝다.
안타깝게도 그의 업적은 잘 알려져 있지만 문헌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세부적인 방법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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