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극장

릴리 마를렌(Lilli Marleen 1981]

슈트름게슈쯔 2011. 1. 30. 13:53

 

 

릴리 마를렌[Lilli Marleen 1981]

 

 

1938년 쮜리히. 독일인 빌키(Wilkie)는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
빌키는 스위스인 음악가 로베르트 멘델스존(Robert Mendelssohn)을 사랑하게 된다.
아들이 독일인과 관계하는 것을 반대한 로베르토의 아버지는 빌키가 스위스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다.
빌키는 일에서는 운이 좋았다.
그녀가 전에 취입했던 음반이 인기를 얻게 되며 스타가 된다.
그 와중에 빌키는 나찌의 비밀경찰과 엮이지만 결국에는 전쟁에서 살아 남는다.
하지만 로베르토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드라마 | 독일 | 120 분 |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출연
 
한나 쉬굴라  지안카를로 지아니니, 
 
라울 기메네즈,로저 프리츠, 애드리언 호븐

 

 

 

 
2차 대전중 북아프리카에서
사막의 여우 나치 독일의 롬멜장군과  대치하고 있던
영국군 전차병들이 한낮의 살인적인 더위가 식어가는
밤 9시 55분이 다가오면서
라디오 주위에 한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때 영문을 모르는 한 병사가 큰 소리로 무슨 일이 있냐고 묻자
한 상사가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대면서 조용히 하라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병사는 입을 다물고 둥글게 모래위에 모여앉아
숨을 죽이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는 전차병들 사이에 끼여들어
잠시 기다리자.
젊은 여인이 독일어로 부르는 노래가 직직 거리는 잡음과 함께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선율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영국군 전차병들이 이해할 수 없는 독일어로 부르는
그 노래는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진 병영의 정문앞에..."
로 시작되는 이 군가의 이름은 릴리 마를렌이었다.

군가 릴리 마를렌 (Lili Marleen) 은 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전쟁의 막바지 때는
적군과 아군의 구별없이 2차 대전에 참전한 모든 병사들이
다함께 가장 즐겨부르고 듣던 군가로
세계 전쟁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었고
또 인류 역사상 가장 인기가 있었던 전설적인 군가가 되었다
.


맥주잔에 피어 오르는 거품같은 독일인의 낭만은 군복에서도 느낄 수 있다.
릴리 마를렌 포스트

나치 독일 군가 릴리 마를렌의 탄생은 세계 1차대전때
독일제국 군대에 징집되어 참전한 독일 병사
<Hans Leip (1893-1983>) 가 자신의 여자친구와
다른 한 여인의 이름을 합쳐 사용해 릴리 마를렌은 이렇게 태어났다.

이 시는 "Das Lied enines jungen Soldaten auf der Wacht"
(The Song of a Young Soldier on Watch" 젊은 초년병의 노래) 로
1937년 출판 되었다.

 
일년후 1938년 Norbert Schultze 의 작곡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Hans Leip 이 쓴 최초의 시 이름은 "Das Madchen unter der Laterne"
(German for "the girl under the lantern"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여인),

그러나 1939년 레일 앤더슨이 처음 음반을 취입한 후 릴리 마를렌이라는

이름으로 (LILI MARLEEN) 이름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릴리 마를린이 유명한 계기가 된 이유는 1942년 벨그라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지중해 연안 제국과 유럽까지 가 시청지역인
Soldatensender Belgrad (벨그라드 병사의 방송국)을
개설하면서 였다. 벨그라드 방송국에 근무하는 한 소위가 1941년
비엔나로 휴가를 떠날 때, 방송국으로 부터 방송에 사용할
레코드 판을 구해 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소위는 휴가중 중고 레코드판을 상점을 뒤져 그 당시 700여장 팔린
레일 엔더슨 이 취입한 지 2년된 레코드 판을 들고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쓸만한 음반이 별로 없었던 벨그라드 병사의 방송은
릴리 마를렌을 자주 내보냈다.


Langeog 에 세워진 릴리 마를린과 레일 엔더슨의 기념비.

릴리 마를렌이 전파를 타자 나치 선전상이었던 요셉 괴벨스는
병사들의 사기를 저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릴리 마를린의 방송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릴리 마를렌이 방송이 중단되자 유럽각 지역에서 주둔한
독일 병사들이 방송국으로 릴리 마를렌의 재방송 요청이 쇄도했다.
이들과 함께 독일군 아프리카 군단장이었던 에르빈 롬멜장군도
릴리 마를렌의 방송을 요청하자 나치 선전상 괴벨스도 별수 없이
방송을 허락하면서 이때부터 릴리 마를린은 밤 9시 55분 에
방송이 끝나는 씨그날 음악으로 전유럽에 다시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

노르망디 작전에 성공한 후 연합군은 릴리 마를렌에
자신들의 가사를 붙여 "the D-Day Dodgers song" 으로 편곡해 불렀다.
최초의 영변 밀리 마를렌의 음반 추입은 Ann Shelton's 로 알려졌고
1940년대 독일출신 Marlene Dietrich 가 영어와 독일어로 음반을 취입해
미군들은 그녀가 부른 릴리 마를렌을 가장 좋아했다.

Vor der Kaserne, vor dem grossen Tor,
Stand eine Laterne und steht sie noch davor,
So Wollen wir uns wiedersehn.

Bei der Laterne wolln wir stehn,
Wie einst Lili Marlene,
wie einst Lili Marlene...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진 병영의 정문 앞에
여전히 그녀는 서있네
그렇게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며
가로등 옆에서 우리는 계속  서있고 싶어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Fassbinder, Rainer Werner(Dir) Lili Marlene(1981) Hanna Schygulla


Lili Marlene
Hanna Schygulla

 

  

 




Lilli Marlene
(Hans Leip / Nobert Schultze)

Vor der Kaserne, vor dem grossen Tor,
Stand eine Laterne und steht sie noch davor.
So wollen wir uns wiedersehn,
Bei der Laterne wolln wir stehn,
Wie einst Lilli Marleen, wie einst Lilli Marleen.

병영 앞에, 커다란 정문 앞에,
가로등이 하나 밝혀져 있고 그녀는 여전히 그 앞에 서 있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고자 하네,
가로등 옆에서 우리는 서 있고자 하네,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Unsre beiden Schatten, sie sehn wie einer aus,
Dass wir so lieb uns hatten, dass sah man gleich daraus.
Und alle Leute wolln es sehn,
Dass wir bei der Laterne stehn,
Wie einst Lillli Marleen, wie einst Lilli Marleen.

우리 둘의 그림자가 마치 하나처럼 보이네,
우리가 서로 너무도 사랑한다는 걸 모두가 금방 알아차렸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려고 했네,
우리가 가로등 옆에 서 있는 모습을,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Schon rief der Posten: "Sie blasen Zapfenstreich!
Es kann drei Tage kosten!" -- " Kamerad, ich komm ja gleich!"
Da sagten wir auf Wiedersehn,
Wie gerne wollt ich mit dir gehn,
Mit dir, Lilli Marleen, mit dir, Lilli Marleen.

보초병이 소리쳤네: "소등나팔이 울려!
(안들어오면) 3일 영창행일지도 몰라!!" - "전우여, 곧 돌아올께!"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네,
내가 그대와 떠나길 얼마나 원했던가,
릴리 마를렌 그대와, 릴리 마를렌 그대와.

Deine Schritte kennt sie, deinen zieren Gang.
Alle Abend brennt sie, mich vergass sie lang.
Und sollte mir ein Leids geschehn,
Wer wird bei der Laterne stehn,
Wie einst Lilli Marleen, wie einst Lilli Marleen?

그녀는 그대의 발걸음을 아네, 그대의 부드러운 발걸음을.
매일 저녁 그녀는 불타네, 그녀는 오래전에 나를 잊었네.
그리고 나는 고통을 느껴야 했네,
가로등 옆에 누가 서 있을 것인가?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Aus dem stillen Raume, aus der Erde Grund,
Hebt mich wie im Traume dein verliebter Mund.
Wenn sich die spaeten Nebel drehn,
Werd ich bei der Laterne stehn,
Wie einst Lilli Marleen, wie einst Lilli Marleen.

사랑에 빠진 너의 입은 꿈을 꾸듯,
조용한 공간에서, 땅바닥에서 나를 들어올리네.
늦은 안개가 방향을 돌린다고 해도,
나는 가로등 옆에 서 있을 것이네,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마를렌 디트리히는 독일에서 뮤지컬 배우이자 댄서였다.

그녀는 조셉 폰 스턴베르그 감독과 함께 촬영한 <푸른 천사>에서

노년의 남자들을 타락으로 몰고가는 댄서로 전세계에 그녀의 이름을 알렸다.
마를렌 디트리히의 매력은 풍만한 몸매와 
백만불짜리로 일컬어지는 매끈한 다리로 당대 최고의 각선미 소유자로 유명하다.

조셉 폰 스탄버그가 감독하고 게리 쿠퍼와 공연한 <모로코>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30, 40년대의 섹스 심벌로 각광을 받았다.

덕분에 남성 관객에게 섹시한 속옷과 관능적인 스타킹을 적나라하게 훑어볼 수 있는 음탕한 즐거움을 선사하였고

여성팬들에게도 , 특히 레즈비언 관객들도 그녀의 도도하고도 비밀스러운 양성적 매혹에 흠뻑 빠져들었다.
조셉 폰 스턴베르그와 콤비로 육감적 활력과 수수께끼의 장식미를 맘껏 선보였던

그녀는 자신의 모호한 글래머의 면모를 통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배우였다.

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반전 뮤지컬로 참전 용사들의 사기를 북돋았고,

전후에는 <악의 손길>에서 세상 물정 다 맛본 창녀로 여전히 타락과 신비의 카리스마를 뽐냈다.

독일 출신의 그녀는 나치정권에 저항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2차대전 당시 양측 병사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의 양심의 상징이라고 일컬어졌던 명곡 '릴리 마를렌(Lilly Marlene)'을 부르기도 했다. 품위가 있는 섹스 어필에 각선미, 매혹적인 허스키 보이스의 노래 솜씨, 히틀러와의 협력을 끝까지 거부하고 결국은 미국으로 망명을 택한 꿋꿋한 정신 등 그녀의 이야기를 다 하자면 끝이 없다.

그녀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초기 명작 <모로코(Morocco)>(30)를 위시해 수 많은 작품들에 출연했고, 후기에는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검찰측의 증인(Witness For The Prosecution)>(57), <뉘른베르그 재판(Judgment At Nuremberg)>(61) 등이 유명하다.

특히 2차대전 중 양측 병사들 모두에게서 애창된 노래 Lili Marlene은 그녀의 노래로 더욱 널리 알려져 평화를 원하는 인류의 염원을 담은 곡으로 승화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그래머한 할머니'로 불렸음에도 말년에는 사진 촬영을 철저히 거부한 채 파리에서 은둔의 여생을 보냈다. 1992년 5월 6일 90세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독일태생의 마를렌 디트리히 (Marlene Dietrich)의 노래로 잘 알려진 릴리
마를레네(Lilli Marlene) 혹은 릴리 마를렌(Lilli Marleen) 이 노래는 원래 Hans
Leip 이라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군뿐 아니라
연합군 쪽에서도 인기가 있었던 노래이다

라디오 베오그라드에서 매일밤 9시 59분에 울려퍼지는 이 노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독일 병사들의 애향심을 자극하였고 이노래가 울려퍼질 당시에는
모든 전투가 중단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한나 쉬굴라(Hanna Schygulla)

 
1943 년 12 월 25 일, 목재상의 딸로 독일에서 태어난 Hanna Schygulla
는 러시아에서 자라 2 차 대전 중 독일로 돌아왔다.  처음엔 교사를 했었는데,
연극에 매료되어  뮌헨 액션시어터에 참가, 파스빈더 감독과 만났다. 

영화계 입문은 1968 년이었고 이듬해 파스빈터 감독의 첫 작품 사랑은
죽음보다 잔혹에 출연한 이후로 그의 영화에 거의 대부분 출연했으며 뉴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연기파로 인정받았다. 

1985 년 타임지가 선정한 유럽의 가장 훌륭한 배우로 꼽혔으며 마르코
페레리 감독의 Storia di Piera 로 칸느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벤더 감독과 한나 쉬굴라 (Berlin Alexanderplatz,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980)



 

 
Lilli Marleen
James Last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