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곰탕과 시대 입맛

슈트름게슈쯔 2011. 4. 19. 11:40

 

 

 

 

 

과거나 현재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요인중 가장 큰 문제이자

가장 절실한 부분은 뭐니 뭐니해도 먹는 문제일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식생활 요건의 충족이라 할수 있다.

어떤이는 설움 설움중에서도 배곯는 설움이 제일 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옛말에 입은 거지는 얻어 먹어도 벗은 거지는 얻어먹지 못한다란 말도 있다.

지금도 결식 아동이 있지만 그래도 6.25 이후 보릿고개 시절및 1960,70년대에 비하면

점심을 무료로 배식해주는 종교 단체나 사회 단체등이 있는것을 보면

그때 보다는 많이 나아진 세상이라 볼수도 있다.

 

곰탕에 대한 유명한 일화중 하나는 일제시대 소설가이자 동아일보 국장이었던

빙허 현진건의 소설 [운수좋은 날]을 떠올리게 한다.

인력거를 몰며 생계를 꾸려 나가던 남자는 그의 아내가 병든 몸으로 종일 누워 있어서  

아내의 병수발까지 해야 했었다.

그러나 인력거로 손님을 나르는 품팔이 생활로는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운수좋은 날이 찾아 오기도 한다.

평소에 인력거 손님이 별로 없었던 그에게 

이 날은 인력거를 탈려는 손님들이 많았던 기회로 수입이 다른날 보다 좋았다.

그래서 그날 번돈으로 아내에게 곰탕 한그릇을 사다 주려고 했다.

그는 일거리를 마치고 곰탕집으로 가서 곰탕 한그릇을 사서

일찍 집으로 귀가 했건만

몸져 누워 있던 그의 아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록 소설속의 내용이지만

실로 눈물겨운 장면이 아니었다 할수 없었다.    

 

 

 

 

 

 

2005년 9월 통계로 보면 1995년 보다 남자의 전립선 암 발생율이 10배나 늘어났다고 보도되었었다.

그러한 원인으로는 평소 소고기,돼지고기등의 육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자주 섭취하는 식생활의 영향임은 자명하다고 할수 있다.

현재의 청소년들은 입맛이 까다로워 곰탕을 거의 사먹지 않는다.

즉 곰탕은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지만 과거 세대의 유물적인 고전 음식이라고 할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배곯던 시절인 50.60.70년대의 세대들은 보신 내지 소복용으로

수육과 소주를 곁들여 사 먹으러 가는 입장이다.

왜 이런 입장이 되어 버렸는가 하면

[청기와 뼈다귀 해장국][통뼈][서울 뼈다귀 감자탕]등의 돼지 등뼈에 여분으로 붙어 있는 고기를 삶아 

감자와 시래기를 혼합하여 조미료를 듬뿍 쳐 맛이 매콤 달콤한 뼈다귀 해장국이

시대의 입맛에 맞아 떨어져 전국의 곰탕집들은 이 음식점들에게

서민 음식점 일순위의 그 순위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중년 이상의 조금 비만인 사람 내지 배가 나온 사람은 TV 방송의 보도에 따라

전립선염과 전립선 비대증을 치명적으로 일으키는 주범이라고 대한민국에서 줄곧 후끈하게 보도하여

고통없이 오래 살려고 곰탕을 잘 사먹지 않는다.

그러나 단체생활인 회사 생활에 적응이 잘 안되는 조직 폭력배등의 깡패나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술집 보이및 술꾼이나 노가다등은 아직도 곰탕을 선호하는 부류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통계학적으로 그들은 전립선 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

또한 문란한 성관계로 인한 오입질로 임질이나 매독등의

악성 성병에 걸린 경험이 있는자는 십중팔구 만성 전립선염으로 고통을 받는다.

 

마산에서 곰탕집의 원조는 중성동의[대성장]이었다.

당시 창동 입구에는 대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업소가 두곳 있었다.

한곳은 성호 68 김명순의 부친이 운영하던 대성 피혁이었고

또 한곳이 대성장 곰탕이었다.

마산성호국민학교를 다니며 그 곳 곰탕을 사먹었던 아이들은 결코 대성장 곰탕의 맛을 잊을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창동 입구 대성장 곰탕의 맛은 한 마디로 끝내 주었다.  

그곳은 80년도 초까지 근 30여년 동안 마산에서 장사를 해오다가 세월이 바뀌는 동안

다양한 먹거리 문화의 변화되는 시대적 조류에 밀려나 경영 악화로 1982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 곰탕집  여자의 원래 주인 이름은 [고달순]이었다.

그 집 주인의 풍모는 뚱뚱한데다 안경을 썼고 한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항상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고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대성장] 곰탕의 특징은 가마솥에다 사골을 넣은뒤 하룻밤 동안의 시간에 장시간 고아서 만든 사골 국물에다

양지와 사태살,소내장,처녑등의 소 각각의 곰거리 부위 고기를 세로로 잘게 썰어

펄펄 끓는 국물에 플라스틱 망태에 미리 삶아 수분이 제거된 준비해둔 고기거리를 집어 넣어 나왔다.

그리고 손님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물에 이미 후추를 치고

고깃조각을 양지부터 처녑까지 넉넉하게 넣어주는것이

그 곰탕집의 특징이자 장점이었다.

또한 통 무를 세로로 길게 약간 두껍게 썰어 만든 무 채나물은

손님이 더 달라는대로 아낌없이 내어 주었다.

 

 

자유당때나 공화당 시절에 마산에서 돈좀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그 집에서 곰탕과 수육을 사먹곤 했었다.

그리고 그 대성장 곰탕집에서 일했던 식모와 찬모 여자들도 수두룩했었다,

이후 그곳에서 일했던 찬모 여자들은 어깨 너머로

곰탕 만드는 기술을 배워 나가서 나중에 자기가 곰탕집을 차리기도 했다.

그곳에서 일을 하였던 한 식모 여자는 이제 할매가 되어 그 아들이 북마산 교동 초등학교 건너편에

[할매 곰탕]집이라고 20여년전에 차려 영업을 해오고 있다.

 할매 곰탕집의 맨처음 곰탕값은 4000원이었는데 2000년도 초반부터는

물가에 따른 돈의 값어치가 내려감에 따라 6000원으로 올랐다.

그런데 이 집 곰탕의 특징은 곰탕의 량이 너무 작아 육체 노동을 하는

노가다들은 곰탕을 시켜서 먹을때 항상 투털거렸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양을 줄여 주다가

단골들은 하나 둘 그집을 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북마산 할매 곰탕집의 한가지 문제는 주차할 공간이 없다는데 있었다.

이 집의 곰탕이 맛있고 장사가 잘된다고 소문은 삽시간에 경남권내에서 자자하게 났다.

그래서 그 동네에서 곰탕집을 차려 보면 떼돈을 벌수 있겠다는 계산하에

너도 나도 나서서 주위에 곰탕집을 차렸다.

얼마후 그집과 같은 도로변의 라인에 [장수 곰탕]이라는 집과 [진미 곰탕]이라는 집이 생겼고

건너편 회원동 앵지 밭골 입구에는 [소문난 곰탕]이라는 곰탕집이 새로 생겼다.

이에 할매 곰탕집의 주인은 결국 갈라먹기 게임이 되겠다 싶어 권리금을 붙이고 약삭 빠르게

곰탕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나가 버렸다.

그곳을 벗어난 이후 북마산의 [할매 곰탕] 주인은 

마산 해안도로 변으로 업소를 옮긴뒤 그 주인 여자의 아들이 다시 장사를 하고 있다,

 

 

마산 진동너머 양촌 입구로 진입하다 보면 14번 국도 쪽에 [진전 곰탕]이라는

무식한 주인이 운영하는 곰탕집이 하나 있다.

이 집 주인은 서울에서 낙향한 전과자로써 아주 개양심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인물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도로에서 이 [진전곰탕]집 앞 마당에는 무슨 축제때 플랫카드에 적는 글씨를 써놓은듯이 

높이 5~6m의 커다란 4각 목재간판에 큰 세로 글씨로 [맛 없으면 공짜]라는

문구를 적어 놓고 장사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마산,창원에서 고성,통영 방향이나 진주와 양촌,이반성 쪽으로

오가는 차량들의 눈에 확 띄는 위치에 무슨 이정표의

장승처럼 우뚝 세워져 있다. 

그 선전 문구는 곰탕 맛에 만큼은 자기 업소가 자신이 있다는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사기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상술이었다.   

 

 

 

어느날 이 곰탕집은 아침에 가마솥에 곰탕 국물인양 동서식품의 프리마를 대량으로

부어 넣은 장면이 한 손님에 의해 목격되었다.

하지만 그 손님의 묵인으로 인하여 시청 위생과에 고발 조치는 면했다고 한다.

간 크게도 업소 입구에 [맛없으면 공짜]라고 적어 놓았지만

기실 곰탕 국물에 흰 빛깔을 내는 주 재료는 프리마였던 것이다.

 

마산 동성동의 골목안에 위치한 한양 설렁탕이란곳 또한 위의 업소와 마찬가지로

부엌 안쪽에 프리마가 상자채로 있는것이 목격되기도 하였다.

즉 요즘 곰탕집들 대부분이 옛날처럼 거의 사골 국물을 우려 내지 않고

프리마를 섞어 파는 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인 것이다.

이 집의 특징은 곰탕의 맛은 어느 정도 있지만 부엌이 더럽고 특히 변소가 매우 더럽다.

그래서 주인이 회충과 요충에 감염되어 있다고 볼수 있었다.

어떤이는 이집에서 곰탕을 한그릇 사 먹고 나면 어김없이 요충에 옮아

새벽녘에 요충이 알을 까러 항문쪽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뒤가 가렵다고 했었다.

그것은 이 집에서 반찬으로 나오는 깍뚜기가 맛은 있지만

깍뚜기를 만들때 비위생적인 조건으로 만들어 기생충의

충란이 깍뚜기 무우에 섞여 있는 것이었다.

위생이 불결한 곳에서 음식을 사먹으면 항상 손님에게 뒤가 가려운 요충을 옮긴다.

 

그러나 제일 악독한 상술을 보여주는 곰탕집의 형태는 뭐니 뭐니 해도 [대원장]이었다.

이 곰탕집은 마산 동성동의 국민은행 정문 옆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해안도로로 옮겨 성업중에 있다.

물론 국민은행 후문 옆의[전통 곰탕]이라는 곰탕집도 제대로 된 음식점이라고 볼수는 없는 집이다.

마산 동성동 국민은행 옆의 대원장이라는 곰탕집이 왜 [마산 할매곰탕]집 이라고

간판을 바꾸고 그 자리에서 뜨게 되었는가 하면

2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

그 건물의 소유주가 땅을 다른이에게 매매를 한 이유가 있었지만

 

둘째

그 자리에서 이미지를 쇄신하여 더 이상 장사를 할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초 진해에 살았던 30대 초반의 최OO 이라는 여성은 독신으로 소일거리 삼아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생활비라도 좀 벌어 볼려고 음식점을 한번 차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느날 창원 팔용동에 [현풍 곰탕]이라는 이름으로 곰탕집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곰탕집을 차리기 전에 그 여자는 마산지역에서 손님이 많이 찾기로 

유명한 곰탕집들을 벤치 마킹하기 위하여 돌아다녔다.

그러던중 그 여자는 우선 그 업소를 암행 방문했다.

그 여자는 곰탕집의 손님의 발걸음이 뜸한 점심시간 이후의 시간인 4~5시경에 찾아가

곰탕 한그릇을 시켜 먹어 본후 몰래 주방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곧 이어 그 여자는 속으로 놀라 자빠질뻔한 광경을 본것이었다.

손님이 한그릇의 곰탕을 시키면 탕속의 고기를 조금 남기는 사람도 있는데

그 찌꺼기 고기를 건져 내어 수분을 제거 시키고

다시 팔려고 신문지를 약 5매정도 펼쳐 놓고 그위에 찌꺼기 고기를 말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량으로 적재 해놓은신문지 더미 옆으로 지저분하게 보이는

먹다 남은 곰거리 수육 찌꺼기를 늘어 놓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었다.

이것이 나중에 지방 신문인 경남 신문에 나게 되고 해서

먹는 음식 장사를 하면서 한푼이라도 아껴볼려고 비위생적으로

손님들의 건강은 아랑곳 없이 먹다 남은 찌꺼기로

파렴치한 행위를 일삼은 주인의 개양심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것이었다.

 

평소에 이집 곰탕 국물의 색깔은 검었다.

사골을 우려낸 곰탕 국물의 색깔이 희어야 할것인데 왜 검은색깔을 띄는것일까 ?

하는 의문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었다.

찌꺼기 고기를 신문지에 수분을 흡수한답시고 말리다 보면

고기조각에 신문지의 검은 잉크가 들러 붙는다.

이것을 모아서 다시 대나무로 엮은 키로 훑어서 다시 국물에 섞어 내니

그동안 손님들은 신문지 잉크가 붙은 거무스럼한

곰탕 국물을 먹어온 것이었다.

 

이후 그 집의 단골들도 거의 발을 다 끊게 되고 그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는

어릴때 배를 곯아 곰탕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나

곰탕을 선호하는 세대의 노인 손님들만 계속 그런 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곰탕집의 위생 상태가 얼마나 열악하고 비위생적이라는 것을 알수 있게 한다.

인생 나이 50 지천명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인생에 여러가지 경험이 많든 적든

 선한 눈을 가지고 평범한 인생 노하우를 가진 사람의 눈에는

척보면 삼천리요 툭하면 바로 호박 굴러 떨어지는 소리로 여겨진다.

 

 

아뭏튼 맛이 있어서 찾는 손님이 많으며 잘 나간다는 음식점들은 하나 같이 

거의 이제껏 해온 기본적인 방식의 좋은 노하우로 대부분 장사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음식점들은  

일반적으로 재고가 남으면 품질이 나쁜 재료를 잘 폐기시켜 버리지 않기도 한다.

 즉 그러한 재료로 만든 음식이 손님에게 나가게 되는것을 알아도 

이것을 폐기하는 주인들은 거의 드물다.

대체로 이러한 형태의 질 나쁜 음식이 손님의 입으로 들어가게 되니

파는 음식을 전적으로 신뢰 못하는 불합리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장사를 계속하다 보면 싸고싼 사향도 냄새가 퍼지듯이

자연히 소문이 나기는 시간 문제로 작용한다.

서서히 부지불식간에 그 음식점은 안 좋은 소문이 퍼져 그 다음은 뻔한 입장이 되게 되는 것이다. 

 

서부 마산의 중심지인 신마산에 냉면과 갈비탕및 불고기가

맛이 좋기로 유명한 [함흥집]이라는 음식점이 있다.

이 음식점은 지역에서 꽤나 잘 알려져 있어 연일 손님들의

밀어 닥치는 발길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함흥집에 도전장을 낸 사람이 한사람 있었다.

 

바로 그 주변 (구) 마산극장 밑의 공터에 한 업자가 대형 곰탕집을 차렸었다.

그곳 음식점의 앞마당에는 잡석을 다져 많든 대형 주차장을 마련해 놓아서

오픈시킨지 4개월 정도는 꽤 장사가 잘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집 또한 꼬리 곰탕을 만들때 

캐나다산 소고기 통조림의 깡통을 따서 그것을 재료로

곰탕과 꼬리 곰탕 한그릇에 고작 대추 2개를 얹어 넣고는

그것을 음식이라고 판매를 하는 것이었다. 

 

2003년 여름까지는 이 집은 대단한 호황을 누렸다.

실제로 손님들이 몰릴때면 문자 그대로 유사이래 보기드문 대만원 사례였고

몰려든 인파로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인산인해의

진 풍경을 볼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달이 문제였다.

2003년 9월에 닥친 초 특급 태풍은 과거 사라호 이후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중 가장 높은 재산상의 피해를 끼친 강력한 태풍이었다.

그해 늦 여름 그 초특급 태풍 매미가 불어 낙쳐

그 곰탕집을 깡그리 쓸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꿈에도 생각치 못했듯이 잘 나가던 곰탕집이 하루 아침에 날아가 버린

곰탕집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조용필의 노래 [일편단심 민들레야]속의 가사인

[그 여름 어인 광풍~~ 그 여름 어인 광풍] 이었를 런지 모른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한순간 많은 단골들을 그 집에 빼앗기고 매상이 뚝 떨어진

함흥집 주인의 입장은 정반대로 작용했다.

고지대에서 영업을 하여 태풍 매미가 일으킨 해일로 인한 바닷물의 침수 피해를

전혀 받지 않았던 [함흥집] 주인은

이제 그 전의 상황과 같이 경쟁자가 사라진 입장에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한국의 고전요리인 궁중요리만큼은 시대가 바뀌어도 새로 변할수는 없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입맛도 조금씩 변해진다.

한국의 정식 요리 조차도 시대가 요구하는 입맛에 맞는 재료가 사용되어 

새로운 형태의 음식들이 탄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각 세대들의 입맛 또한 똑 같을수 만은 없다.

70,80년대를 청소년기로 보낸 이들에 있어서 그리 맛있어 보일수없던

짜장면이나 짬뽕, 탕수육같은 중국집 음식들도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면 그러한 음식이 그때와 똑 같이 보일수는 없다.

중년의 남성들은 기름진 곰탕을 자주 사먹을수 있는 나이는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