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명소

3.15 의거 발원지 오동동

슈트름게슈쯔 2011. 9. 20. 20:45

3·15의거 발원지~용마산~구강포구

 

 

 3·15의거 발원지, 오동동, 용마고, 지하련 거주지, 용마산, 구강포구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불종거리 코아양과 앞에서.오동동 일대의 과거 요정거리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와

용마산에서 의적으로 추정되는 9명의 시민이 공개 처형됐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오동동 거리 한복판에서 3·15 의거 시작 

 

오동동 불종거리 앞 코아양과와 경남은행 사이 거리 바닥에 동판으로 제작된

'3·15의거 발원지'에서 사단법인 3·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회장과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 이승기 관장이 1960년 3월 15일 당시를 설명했다.

백 회장은 지금은 '원 할머니 보쌈' 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 민주당사 사무실이었는데,

그곳에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들이 몰려와 그곳에서 3·15의거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당시 40%의 시민들에게는 아예 투표권조차 주지 않았다.

'야당은 뭐하느냐'고 야당인 민주당사에 몰려간 시민들과 야당 의원들이 나서서 3·15 의거를 일으켰다는 것.

   
 
  도시탐방대 대원들이 마산시 오동동 코아양과와 경남은행 사이 거리 바닥에 동판으로 제작된 '3·15의거 발원지'를 보고 있다.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제공  
 

이어 3·15의거 발원지 부근인 오동동 삼성생명 옆 공터로 향했다.

옛 한국은행 마산지점 자리이기도 한 그곳은 1909년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마산교도소 자리였다.

당시만 해도 변두리였지만, 서서히 시내중심지로 발전하면서 교도소는 지금의 회성동으로 옮겨갔다.

 

◇추억의 오동동 '야시 골목  

 

오동동 거리에서 이승기 관장의 기억력은 빛을 발했다.

건물 하나하나 가리키며, 술 깨는 약을 만들어서 떼돈 번 '김약국' 집,

맘보·몽고아이스케키를 팔던 곳, 지성바, 라스베가스바, 별다방, 매일통닭 등이 있던 곳이라며 줄줄이 열거했다.

1950년대에 번성했던 오동동 요정거리에서 유명했던 춘천원, 오동장, 금오장, 감나무집 등의 자리도 잊지 않고 설명했다.

지금은 공터가 된 감나무집 앞에서는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오동동 타령을 한 소절 불렀다.

지금은 적막강산이지만, 1970년대 오동동 요정거리는 '

이승만의 양아들'로 불린 자유당 이용범이 돈을 뿌리고 간 곳으로도 유명했단다.

복잡한 골목에는 과거 유명한 요정이었던 '춘천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건물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동동 골목은 여자가 많고, 골목이 복잡한 탓에 '야시 골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1905년 용마산에서 의병 9명 처형사건 

 

월북 시인 임화의 부인이었던 소설가 지하련의 거주지와 오동동 아케이드를 지나서 용마산에 이르렀다.

용마산 충혼탑 아래에서 탐방대장 유장근 교수는 "2주 전 1905년 용마산 왜성 남쪽 기슭에서 9명이 처형됐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목발 김형윤의 <마산야화>에 9명 모두 다리를 부러뜨려 처형장으로 끌고 와

용마산 아래에서 처형해, 지켜보던 부녀자들이 너무 참혹한 모습에 실신하거나 똥을 쌌다는 내용이 묘사돼 있다"면서

당시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처형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함안, 진해, 창원 등의 출신인 이들의 공식 죄명은 절도이다.

하지만,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다니면서 부잣집 약탈뿐 아니라

일본인을 공격해 피해를 준 부분을 봤을 때, 단순한 화적 떼가 아니라 의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이다.

특히, 이들로부터 난자를 당한 일본인 사카이 마쓰타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도 가담했고,

1886년 강원도 의병 민용호 부대 진압작전에도 투입된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

사카이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했을 때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첫 신문이 있었던 여순(뤼순)에 급파됐고,

마산에서 인구, 세액 등에 대한 자료를 일본 정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from : 경남대학교 유장근 교수& 도시탐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