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마리우스와 술라 [Marius & Sulla]

슈트름게슈쯔 2012. 1. 11. 13:43

 

 

마리우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Gaius Marius 기원전 157년 ~ 기원전 86년 1월 13일)는

 로마 공화정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다.

이례적으로 7번이나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로마 군단에 대한 마리우스의 개혁으로 유명하다.

 

 

 

 

술라

 

루키우스 술라 (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기원전 138년 ~ 기원전 79년)

술라는 로마 시대의 정치가, 장군이었다.

뛰어난 술수와 군사적 재능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두 번이나 진격하였고

독재관이 되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마리우스와 술라.

만약 대학 교양강의에 로마사 과목이 있다면

이름이 언급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인물들이다.

 

 

술라의 흉상만 보아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대략 감이 오는데 인상은 이렇다.

 회색 눈이 유난히 선명하고 이가 희어 무척 무서워 보이고,

얼굴색은 눈에 거슬릴 정도로 붉고, 게다가 흰 점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그의 이름 술라도 이 얼굴색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도대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B.C.138~78)는 어떤 인물이기에 그럴까..

그는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뛰어난 권모술수와 군사적 재능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두 번이나 진격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독재관이 되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실시한 인물이.

이런 인물을 설명하기 전에 또다른 인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카이우스 마리우스(B.C.155~86년) 마리우스 또한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는데..

그의 처음 출발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누만티아를 공략할때 종군하면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승승장구해 집정관에 무려 7번이나 올랐으며

그는 특히 군제 개혁을 통해서 전장에서 공을 많이 세웠지만

그의 부관이자 군사 담당관이었던 저 술라로 인해서 종국을 맞이한 인물이다.

 

그런 원인도 술라가 승승장구하자 마리우스의 견제가 들어오고 시기하자,

이것을 눈치챈 술라가 마리우스의 동료 집정관인 카툴루스 밑으로 들어가면서

둘은 적대 관계가 된 것이다.

결국, 마리우스의 말로도 술라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놀라 기운이 쭉 빠지고

잠도 제대로 못자는등 공포에 시달려 늑막염에 걸려 세상을 떴다고 한다. 

얼마나 술라가 두려웠으면 그러했을까?

 마리우스는 술라라는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격이었다.

이런 마리우스는 성정이 상냥하지 않고 교제술이 남들보다 크게 뒤떨어져

전쟁 때에는 필요하지만 평화시에는 소용없는 도구나 기구처럼 천대를 받았다 한다.

이런 마리우스의 영광의 빛을 가린 대표적 인물이 술라인데..

그래서 술라에 대한 마리우스의 분노는 엄청났다.

대신 술라는 귀족들이 마리우스에 대해 품고 있는 증오심을 이용해 출세하고,

또 그와의 불화를 정치 생활의 신조로 삼았던 인물로..

마리우스가 지는 해라면 술라는 뜨는 해로 볼 수 있는데

 

술라의 평가는 이렇다.

 

인용은 플루타크의 <영웅전>에서..

 

술라는 수많은 두드러진 공적을 올려 시민들 사이에서는 명장,

친구들 사이에서는 지상 최고의 장군,

그리고 적대자들 사이에서는 가장 운이 좋은 장군이라는 명성도 얻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격적으로 부조리하고 모순된 점이 많았고

 

남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는가 싶으면 더 많은 것을 주고,

 

뜻밖의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이유 없이 남을 얕보기도 했다.

 

또 자기 쪽에서 부탁할 일이 있으면 비굴하게 굴고,

 

자신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교만하게 굴었다.

 

형벌 문제도 그랬다.

 

별일 아닌데도 사형에 처하는가 반면,

 

그 반대로 사형에 처해야 할 중죄인을 사면을 해주었다.

 

 

로마로 들어온 술라가 50세때 그의 애제자 폼페이우스와 집정관에 선출되는데..

이제는 늙은 호랑이가 된 마리우스가 아직 권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잔인하고 흉악한 탐욕자 술피키우스를 끌어들어 원로원 기능을 마비시키는등 국정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에 술라가 이들을 진압하니 마리우스는 로마를 버리고 도망을 친다.

 이에 술라는 반대파인 킨나를 집정관에 임명하는등

소아시의 패권을 이룬 미트리다테스 정벌 원정길에 올라 공을 세우며 위명을 떨친다. 

이후 킨나의 반란을 진압하는 내전을 치르며

로마에 입성한 술라는 수천여명의 반대파를 숙청하는등 실로 일대의 공포정치 펼친다.

이때 반대파 살생부에는 킨나의 사위 18세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있었는데

는 학살을 면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만약 그때 카이사르도 죽었다면

로마의 역사는 바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반면교사로

마리우스와 술라에게

로마를 어떻게 장악하는지를

똑똑히 배웠다.

 

훗날 로마의 제1차 삼두정치로 잘 알려져 있는 일찍 병사한 레피두스와

카이사르에게 죽은 폼페이우스에게 또한 마찬가지로 작용하게 되었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는 집정관이 모두 공석상태가 되었다.

이에 술라는 10만의 병력을 배경으로 원로원을 압박해 종신 독재관에 취임한다.

원래 로마 공화정에서 독재관은 임기가 6개월이었지만..

술라는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종신독재관을 요청했고 민회는 이를 승인한다.

독재관에 취임한 후 그는 대대적인 국정 개혁에 나서면서

독재관으로 이러한 개혁을 2년동안 정력적으로 실시한 술라는 

돌연 사임을 발표하고 모든 공직에서 은퇴해 버린다.

하지만 술라는 은퇴후에 전 재산의 10분의 1을 헤라클레스 신전에 바치고,

민중에게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고 그 연회는 여러날 계속되었는데..

이때 아내 메텔라가 사망하자 그 슬픔에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광대들과 어울려 광란에 빠짐으로써 슬픔을 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재혼한뒤 여배우나 피리 부는 여자등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이른 아침부터 주연을 베푸는등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더니 

마침내 그는 궤양에 걸쳐 전신이 썪고 이가 꾀었는데

하루에 몇 번씩 목욕탕에 들어가 몸을 씻어도 아무 효험이 없는등 말로를 치닫는다.

 

 

 

 

레피두스

 

 

 

 

폼페이우스

 


결국, 반대파의 그라니우스가 국고를 축냈고 상환하지 않는 전력등 

자신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초대해 종들에게 목을 졸라 죽이라 시키니..

 이때 술라는 고함을 지르며 기를 너무 써서 농종이 터지면서 피가 많이 쏟아져 죽었다고 한다.

말로 표현하기도 대단히 처참한 이런 죽음에 당시 집정관 레피두스가

장례식을 격식대로 치르지 않으려 하자 폼페이우스가 이 불평을 잠재우고

유해를 로마로 호송해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뤄주었다고 한다.

그의 묘비는 전쟁의 신이라 불리우는 마르스의 광장에 있는데..

그 비문은 자신이 생전에 지었는데 이렇게 쓰여져 있다고 한다.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술라는 역사상 최초의 전면적인 로마 내전(BC 88~82)에 승리했으며

뒤이어 딕타토르(독재관)를 지내면서(BC 82~79)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세기에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한 헌정개혁을 실시했다.

BC 82년말 자신이 행운아라고 믿는 마음에서 펠릭스라는 이름을 썼다.

정치적으로 대단치 않은 한 귀족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사치를 좋아했으며 정치가를 지망했다.

BC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휘를 받으며

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와 맞서 싸웠을 때 콰이스토르(재무관)를 맡아 정치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계략을 써서 유구르타를 생포하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으나

 이 공적은 마리우스와 분쟁을 일으키는 출발점도 되었다.

마리우스는 킴브리족의 침공을 물리치는 전쟁에 술라를 계속 기용하기는 했으나

BC 103년 시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술라는 마리우스와 공동 지휘관직을 맡게 되었다.

 

 

술라는 BC 94년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어 동맹시 전쟁에 참전했으며(BC 90~89),

BC 88년 공화정 최고의 직책인 2인 콘술(집정관)의 한 사람이 되었고

소아시아에서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와 벌인 전쟁의 지휘관을 맡았다.

BC 88년 카이킬리아 메텔라와의 4번째 결혼으로 그는 중요한 동맹세력을 얻었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평민파의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결탁하여

술라 대신 지휘관으로 임명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술피키우스를 살해했으며 마리우스는 피신했다.

BC 88년 미트라다테스와 전투를 위해 그리스로 떠난 그는 BC 87년 봄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했고

오랜 포위전 끝에 BC 86년 아테네도 함락했다.

미트라다테스 군대의 지휘관은 보이오티아로 달아났으나

BC 86년 뒤쫓아간 로마군과 2차례의 전투 끝에 마침내 패배했다.

BC 85년 술라와 미트라다테스는 헬레스폰트 해협에 면한 다르다노스에서 만나

미트라다테스를 응징하는 성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아시아와 그리스에 로마 지배의 질서가 회복되고 미트라다테스는

또다시 로마의 봉신(封臣)이 되었다.

아테네에 오랫동안 머문 뒤 술라는 BC 83년 여름 병력 4만 명과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남부 이탈리아의 브룬디시움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로마를 비운 동안 평민파가 지배권을 장악해 술라는 공공의 적으로 선포되어 있었다.

 

그의 법령은 폐지되고 저택은 파괴당했으며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리스로 피신하여 그와 합류했다.

콘술을 역임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BC 86년 술라 대신 아시아 지휘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술라에게는 여전히 행운이 따랐다.

 

플라쿠스는 부관에게 살해당하고 술라는 브룬디시움에서

평민파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규합해 로마로 진군을 개시했다.

뒤이은 내전기간 내내 술라는 콘술인 그나이우스파(派) 피리우스 카르보 및

소(小)마리우스(그의 아버지인 마리우스는 BC 86년에 죽음)와 싸웠다.

 

로마 북쪽 교외의 콜리네 성문에서 술라가 승리하고 BC 82년말

프라이네스테가 함락되어 내전은 끝났으나 학살과 추방이 뒤따랐다.

술라는 발레리아 법(Lex Valeria)에 따라 딕타토르로 임명되었는데

이 법령은 그에게 정치체제와 입법·군사·사법에 관한 전권을 부여했으며

로마 역사상 최초로 딕타토르의 임기에 관해 제한을 두지 않았다.

BC 81년 국가체제가 개편되고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그해 벽두(1. 27~28)에 술라는 미트라다테스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를 벌였다.

기념식 끝무렵의 연설에서 그는 자신에게 펠릭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그리스의 문헌에는 에파프로디토스라고 나옴).

폭넓은 헌정개혁을 추진하면서 그는 주로 로마 국가체제에서

원로원이 갖는 최고지위를 다시 확립하고자 했으며

 그가 실시한 개혁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공화정의 최후까지 존속되었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 형사재판의 법정 수를 늘리고,

속주총독 및 군지휘관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새로운 반역죄 처벌법(Lex Cornelia Majestatis)을 고안하고,

호민관들이 입법안을 원로원에 제출해 승인을 받게 하고,

사법·행정 기관의 권력남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여러 가지 법률을 제정한 것을 들 수 있다.

 

BC 79년초 술라는 직책을 사임하고 캄파니아의 푸테올리 근처로 은퇴했다.

이 조치는 로마에 일대 화제를 일으켰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고대 작가들을 비롯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술라가 개혁이 완수되는 대로

권좌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약속을 정직하게 지켰다고 보는 것이다.

사임 이후에 술라는 일개 시민으로 지내면서 줄곧 회고록 집필에 매달렸다.

마지막 날까지 원기왕성하던 그는 78년 봄 열병에 걸려 쓰러졌다.

그의 후손으로는 메텔라에게서 난 두 아이와 다섯째 부인 발레리아가 낳은 유복자인 딸이 있었다

 

 

 

로마 공화정 말, 로마의 정계는 원로원파와 민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원로원파는 원로원의 전통적인 경로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이었으며,

민중파는 전통적인 과정 대신 시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정치가들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숙부인 마리우스는 민중파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원로원파였다.

 

이 두 인물의 대립으로, 로마는 내전을 겪게 된다.

 

 

내전의 계기가 된 것은,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가 로마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이 전쟁의 지휘권을 갖기를 원했고, 결국 술라가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술라가 로마를 떠나자, 어느 호민관이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법안을 통과킨다.

 

 

이에 술라는 로마로 진군, 자신의 지휘권을 주장하며 마리우스에게 망명을 강요한다.

그리고 술라는 다시 원정을 떠났지만,

그 틈을 노린 마리우스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입성한다.

 

로마를 장악한 마리우스는, 술라의 지지자들을 대거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한다.

 

 

기원전 86년, 마리우스가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

 

 

로마의 정세가 바뀌는 것은, 술라가 미트라다테스와 협정을 체결한 기원전 84년이다.

부관 루키우스 무레나를 소아시아에 남겨두고, 술라가 이탈리아 땅을 밟은 것이다.

 

술라는 기원전 82년에 로마를 장악했고, 스스로를 독재관에 임명했다.

 

 

원래 독재관은 로마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사람에게

정치체제의 변경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제도인데, 임기는 6개월이었다.

 

하지만 술라는, 6개월이라는 임기 제한을 없애버린다.

 

술라의 명령으로 마리우스의 동상은 모두 파괴됐고, 그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내어져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또 술라의 살생부 명단에 오른 마리우스파 수백명이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이 살생부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오른다.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그의 동조자였던 킨나의 사위였기에, 민중파로 취급받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어린데다 정치적 활동은 하지 않았다는

술라의 측근과 여사제의 청으로, 술라는 살생부에서 그 이름을 지운다.

 

 

이후 술라는 원로원 지배체제의 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한다.

대표적인 것들을 꼽아 보자면 기존에 300명이었던 원로원 의원 수를 600명으로 늘리고

그 권한을 강화한 것, 본국 이탈리아와 갈리아의 경계인

루비콘 강의 이남으로는 군사를 이끌고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

군단을 이끌 수 있는 전직 집정관과 법무관은 반드시 원로원이 임명하게 한다는 것 등이었다.

 

또 평민들의 수호자 격인 호민관을 역임한 사람은 다른 관직에 취임할 수 없고,

임기가 끝나고 10년이 지나지 않으면 다시 호민관에 취임할 수 없게 했다.

 

 

기원전 80년, 술라는 독재관 자리에서 물러나 개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년 뒤인 기원전 78년에 세상을 떠났다.

 

 

 

 

 

 

photo from : ferrebeekeeper.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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