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신라 22대 지증왕의 신부감 고르기 조건

슈트름게슈쯔 2012. 1. 14. 13:21

 

2012년 새해를 맞이하여 얼마전 친구들과 같이 모여

경주에 거주하고 있는 옛 친구 의경이를 만나러 갔었다.

오랫만에 모였던 친구들은 그 동안의 회포를 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일정이 좀 넉넉했으면 국립경주박물관에도 한번 관람했으면 했는데

모두들의 일정상 다음날 오전에 불국사에 들른후 점심을 같이하고

헤어져야 했던 아쉬웠던 시간이었다.

신라의 고도 경주하면 먼저 성호국민학교 시절

고전읽기 책으로도 볼수있었던 삼국유사중의

신라 제 22대 왕이었던 지증왕이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신라의 화려한 금관및

100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져있다 발견된 천마총의 천마도,

박혁거세 시조 매장시 뱀이 하늘에서 내려와

몸뚱아리를 다섯 갈래로 나눠버렸던 몸을 매장했다는 박혁거세의 5능과

 2대 석탈해 왕의 본명인 토해 토해및 신라의 토우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 무관랑과 사다함의 어머니가 불륜적인 사랑을 나누었다던 경주 월성및

신라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게 당했던곳이자

술바가지를 띄워 놀았던 장소가 아니라 제사장터였다는 포석정등등...

시간이 나면 한번 더 가고 싶기도 하다.  

 

 

신라 22대 지증왕

 

 

1980년대 초 가수 정광태가 부른 지증왕 13년 신라 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로

잘 알려져 있는 노래인 [독도는 우리땅]의 노래가사에도 나오는

신라 22대 왕인 지증왕의 이름은 지대로(지대로) 혹은 지도로(지도로)

및 지철로(지철로)라고도 하며 64세에 왕위에 올랐다.

습보의 아들이요, 내물왕의 증손이며

그의 어머니는 오생부인 김씨니 눌지와의 따님이다. 

 비는 모량부마을 상공의 딸 박씨이다.

지증왕은 키가 대단히 커서 신장이 8척이 넘었다 한다.

또한 큰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임오 3년 (齊 中興 2년 서기 502년) 3월에

순장(殉葬:이에 앞서 국왕의 장사에는 남녀 각 5인으로서 순장하였음)을 금지하였고

신궁에 친히 제향에 올랐다.

3월에 여러 고을의 군주에게 나누어 분부하여 농사를 권장하게 했고

전답의 경작에 비로서 소를 사용하였다.

 

4년 국호를 신라로 통일 호칭하였고,

왕의 호칭도 왕(王)자로 통일하고 처음으로 시호제를 썼다.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로 나라의 이름이 정해지지 아니하여

혹은 사라(斯羅)라 이르고 혹은 사로(斯虜)라 이르며 혹은 신라라고 이르는데

신등의 생각에는 신은 덕업이 날로 새롭다는 뜻이옵고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옵니다.

그러므로 국호를 신라로 하는 것이 옳겠나이다.

 

또한 살피옵건데 예로부터 국가를 통치하는 자는 모두 제 또는 왕이라고 칭하옵니다.

우리 시조의 나라를 세움으로부터 지금까지 22세를 전해오는데

 다만 방언을 일컬음 뿐이요 존호는 정하지 못했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 국왕으로서 존호를 올리옵니다.

”하니, 임금께서 이를 쫓았다.

5년 4월에 상복법(喪服法)을 마련하여 반포하였다.
6년 2월에 임금께서 나라가운데서 주/군/현을 친히 정하고 실직주:[삼척] 설치하였다.
7년에 봄부터 여름까지 가뭄이 계속하여 백성이 굶주리거늘 창곡을 풀어 진휼하였다.
13년에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실리고 우산국[울릉도]을 위혁하니 항복하였다.

 

15년 정년에 작은 서울을 아시촌에 설치하고 7월에 육부의 주민을 옮겨 채웠다.

이달에 임금이 훙하였다.

시호를 지중으로 올리고 법흥왕이 즉위하니 신장이 7척이요 관후하여 사람을 경애하였다.

 

 

 

 

지증왕은 신라 제22대 왕으로 이름은 지도로 혹은 지철로 이다.

재종형인 소지왕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64세의 늙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 데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왕이 되었지만

지증왕은 신라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는 503년 그 동안 성행하던 순장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려 노동력의 상실을 경계하였고

각 주와 군에 명하여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농사를 지을 때는 소를 이용하는 우경법을 보급하는 등 농업생산력 향사에 힘썼다.

지증왕 무렵부터 확대 보급되면서 당연히 수리사업도 활발해졌다.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30호분 출토, 높이 34cm

 

경주 인왕동의 국립 경주박물관에 어린이들을 데리고 간 어른들은

그 항아리 앞에 선 애들과는 멀리해야 할 토우 형상이 있다.

 
온 몸으로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남녀상은 유독 관람객들의 눈을 자극시킨다.

한 여인이 엉덩이를 내민 채 엎드려 있고

그 뒤로 한 남성이 남성 거시기를 내밀며 후위자세를 취하고 있다. 

토기위에 과감한 표현이 우릴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여인의 얼굴 표정이다.

왼쪽으로 얼굴을 쓱 돌린 여인의 웃음이다.

작은 토우의 얼굴 속에 핀 미소와 웃음은 익살스럽다.

여유만만한 당당함이 신라인들의 성문화를 이르는 표현일까. 

표정과 그 자태는 전혀 외설스럽지 않게 보인다.

신라인의 여유와 성적 문화의 자연스러움까? 

곰곰히 되씹어 볼 수록 토속적이고 소박한 향기가 빼어나온다.

 

 

이 자연스러운 자태는  천년전의 신라인의 꾸밈없는 성적 패러다임이 배여 있기 때문이다.

은밀한 인간의 성행위를 표현했지만 부끄러워하지않는 자연스런 표현의 발로이다.

화랑세기 속에 나타난 신라인들의 성적 개방성에

현재의 한국인들도 혀를 내 두를 정도이다.

유교적인 사고 방식을 거쳐온 현대인들이다.

그 토우 앞의 자태에서 얼굴을 빨개질 정도로

민망스럽게 느껴지는 신라인들의 성문화의 대담성이다. 

특히 이 항아리 토우에서 대표적으로 느낀다.

성 자체를 해학스럽게 만들고 마는 성적 미학을 만들줄 아는

신라 장인들의 솜씨가 그들의 삶 자체임을 알 수 있다.

 그 비밀을 찾아 감상할 줄아는 눈 높이를 높이면 

신라 토우의 진정한 미학과 매력을 알 수 있다.

그 항아리가 바로 이 국보195호이다. 

 

 

남녀의 애정 표현이 리얼하게 묘사된 국보 195호 신라 토우 장식 항아리

 

 

 

지증왕은 노동력도 중요시 생각해 아이를 많이 낳은 여자들에게는 포상을 하기도 하였다.

 쌍둥이를 낳은 사람에게도 포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처음에 결혼을 하기 힘들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말로는 지증왕의 음경이 너무 컸다고 한다.

그의 음경의 길이가 자그마치 무려 1자5치 (약45cm)였다.

음경이 너무 큰 관계로 마땅한 신부감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각 지방에 사람을 보내어 자기의 음경에 맞는 여자를 구하려 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신하들이 신부감을 구하려 가다가

우연히 모량부라는 마을에 도착했다가 큰 개 두 마리가

북크기의 똥덩어리를 같이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본 신하들은 저 정도의 똥을 눈 사람이라면

분명히 모든 것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신하들은 마을로 내려가 그 똥의 주인이 누구인지 수소문했다.

그것은 모량부 상공이라는 자의 딸이 눈 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서 보니 처녀의 키가 7자 5치 (약 2m20cm) 나 되었다.

신하들은 빨리 이 사실을 지증왕에게 알리고 처녀를 데리고 입궁했다.

그리고 지증왕과 맞추어 보니 딱 맞아 왕비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갈문왕 습보와 조생부인의 아들인 지증왕은

생식기가 1자 5치, 즉 45cm나 되어서

큰 똥의 임자인 연제부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유를 잘하는 삼국유사였기에 사실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증왕은 어떻게 왕위에 올랐을까?

지증왕은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의 손자이니까, 소지왕(비처왕)의 6촌 동생이다.

비처왕과 이렇게 촌수가 차이나는 데도 왕이 된 이유는 아들 법흥왕(원종)에게 있다.

비처왕은 원종을 선혜후와의 사이에서 난 보도를 아내로 삼게하였고 그 덕도 있었지만,

비처왕이 지증왕을 부군으로 삼고 원종을 국공으로 삼았기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삼국유사가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후 연제부인을 맞았다고 기록했지만.

지증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나이가 예순 네살이였으므로,

왕위를 잇기 전에 법흥왕을 낳았다고 볼 수있다.

또한 증거가 되는 것이 비처왕 때에 법흥왕이 국공이 되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법흥왕이 연제부인의 아들이기에

법흥왕이 보위에 오른 후 연제부인이 태후가 되었다는 기록이 증거이다.

이 처럼 지증왕은 왕위에 오른 후,

연제부인을 맞이한 것이 아니기에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 후 있었던

큰 똥의 임자와 결혼한 이야기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허면, 지증왕의 큰 생식기는 무엇을 비유한 것일까?

 

남자의 생식기는 오래 전부터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했었다.

이것은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 후,

신라의 높은 사람이 죽으면 그를 따르던 낮은 사람도 같이 매장하는 순장제도를 없애고,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벌하고,

신라의 이름을 정확하게 한 지증왕의 강력한 권위를 나타내는 이야기라고 볼수 있다.

 

 

 

 

 

 

photo from : thot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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