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베살리우스 - 근대 해부학의 아버지

슈트름게슈쯔 2012. 3. 2. 15:36

 

 

 

 

 

베살리우스 [Vesalius, Andreas, 1514.12.31~1564.10.15]

 

 

 

베살리우스는 벨기에의 해부학자이자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출생했다.

대대로 의술을 업으로 하여온 그의 아버지도 역시 궁정 약제사였다.

그는 루뱅에서 교육을 받고 17세 때는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의 스승들이 한결같이 고대그리스의 의학자 갈레누스가 세운 해부설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만족할 수 없어 파리를 떠나 루뱅으로 돌아와서 독학으로 해부학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종종 인체해부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1537년 이탈리아의 파도바대학에서 의사자격을 얻고,

그 대학의 해부학 겸 외과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베살리우스는 해부학 혁신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많은 학생들에게 해부학을 강의하여 예로부터의 잘못된 인체해부설을 타파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543년 7권으로 된 획기적인 저서

《인체해부에 대하여 De humani corporis fabrica libri septem》를 바젤에서 출판하였다.  

플랑드르어로 Andries Van Wesel.

 

 

갈레노스의  인체이론은 고대이래 중세를 통해서 계속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활발해진 해부 활동으로부터 얻어진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에 의해 갈레노스의 체계는 몇 가지 문제점을 노정하게 되었다.

당시의 해부학자들 가운데 특히 베살리우스는히 해부학의 중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 이전에는 직접 손을 써서 하는 해부나 수술은 의사들 사이에서 경시되었고,

의학교육에서도 해부는 별반 중요성을 갖지 못하고 의사나 의학교수가 아닌 해부사에 의해 교육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인체에 관한 해부학적 지식은

갈레노스 체계에 관한 지식이 책과 그 속에 담긴 설명도에 나타난 정도였다.

베살리우스는 이런 상황을 비판하고 손을 써서 행하는 해부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자신이 직접 행한 인체의 해부를 통해서 그간 받아들여져 온

갈레노스의 해부학적 지식이 많은 경우 인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나 원숭이 같은 동물의 것이었음을 지적해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해부활동을 통해서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인체이론에 들어맞지 않는 해부학적 사실들 몇 가지를 밝혀내었다.

 

그 중 첫째는 '격막구멍'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피가 심장의 격막을 통과해서

우심실에서 좌심실로 전달된다는 갈레노스의 설명이 문제를 빚게 되었다.

둘째는 좌심실과 동맥에 있는 피의 양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좌심실에서 피(자연의 영)는 생명의 영으로 바뀌고

이것이 동맥을 통해 전달이 된다는 갈레노스 체계의 주장과 들어맞지 않았다.

셋째는 허파에서 심장으로 오는 허파정맥(pulmonary vein)에도 피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갈레노스 체계에 의하면 그 속에는 허파에서 심장으로 전달되는 공기만 들어 있어야 했다.

넷째로 심장에서 허파로 가는 허파동맥(pulmonary artery)이 굉장히 크고 맥박이 뛴다는 사실이었다.

갈레노스 체계에 의하면 허파로 영양분(자연의 영)을 공급해 줄 따름인

허파동맥이 그렇게 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이것은 심장의 맥박이 팽창에 의해 피를 끌어들이는 현상이라는 갈레노스의 이론과도 상반되는 사실인 것이다.

 다섯째로는 정맥이 심장에 가까워지면서 커져서 간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할 때보다 훨씬 크고 두텁다는 것인데,

 만약에 피가 간에서 생성되어 온몸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일환으로 심장에도 피를 공급하는 것이라면

이 사실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베살리우스는 이들 문제들을 제기만 했고

그에 대한 대안이 될 설명은 제시하지 않았다.

 즉 그는 해부에 의해서 관찰되는 인체의 조직과 구조에 관한 경험적 지식만을 중요시하고

그 작용이나 기능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베살리우스는 인체 해부을 할 때 갈레노스가 주장한 인체의 세 가지 체계를 따라서 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도 

 

르네상스 시대의 플랑드르 의사였던 베살리우스는

인체에 대한 자세한 해부학적 묘사로 생물학의학의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 자신이 직접 해부했을 때 관찰한 것을 기초로 해부학에 관한 최초의 포괄적인 교과서를 쓰고 삽화를 넣었다.

베살리우스는 의사와 약제사 집안 출신이었다.

1529~33년에 루벤대학을 다녔으며 그곳에서 '인본주의 문학'을 공부했다.

1533~36년 그는 파리대학의 의학부에 다녔고,

그곳에서 2명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야코부스 실비우스와 귄테리우스 안데르나쿠스의 지도로 동물해부법을 배웠다.

또한 그는 사체를 해부할 기회도 가졌고, 그당시 파리의 공동묘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의 뼈에 대한 연구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53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베살리우스는 그의 고향인 브라반트로 돌아와 루벤대학교에서 한 해를 보냈는데,

그곳은 아랍 의학의 영향력이 여전히 우세한 상황이었다. 일반적인 관습을 따라

1537년에 그는 10세기 아랍 의사인 라지의 업적에 대한 의역(意譯)을 준비했는데,

이는 아마도 의학사학위를 위해 요구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뒤 그는 해부학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진보적 교육기관인 파도바대학교에 다녔다.

의사 자격을 얻자마자 그는 해부학 실습의 책임자 겸 외과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인체해부에 관한 철저한 지식이 외과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체해부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미숙한 보조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자신이 해부할 것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주치의였고,

베살리우스 시대의 의학교육에서도 여전히 갈레노스의 해부학책이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되던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의 이론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1540년 1월에 그는 갈레노스에게 의존하던 전통을 깨고 스스로 해부하고,

사체로부터 해부학을 배우며 고대의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그 자신의 방법을 공개했다.

볼로냐대학교를 방문하는 동안 이를 시행했는데,

이러한 방법에 의해 그는 갈레노스의 해부학이 로마 종교에 의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던

인체해부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갈레노스의 해부학이 주로 개·원숭이·돼지 등의 동물해부로부터 얻은 결과를 사람에게 적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인체해부학에 대한 교과서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대담하게 선포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결론 때문이었다.

1542년초에 베살리우스는 그의 교과서에 들어갈 삽화를 위해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인 티치아노의 작업장이 있는 베네치아로 떠났다.

 해부그림을 목판에 새겨 원고와 함께 스위스의 바젤로 가져가서

Fabrica〉라고 알려진 그의 주요저서인

〈인체구조에 관한 7권의 책 De humani corporis fabrica libri septem〉(1543)을 출판했다.

베살리우스는 이 획기적인 저서에서 그의 모든 과학적·인문학적·미학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Fabrica〉는 그 이전의 어떤 책보다도 인체에 대해 포괄적이고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새로운 해부학 용어를 사용했고 인쇄와 체재에서도 세련된 완벽함을 갖추었다.

1543년초에 베살리우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그의 책을 선물하기 위해 마인츠로 떠났고,

카를 5세는 그를 황실의 정규의사로 고용했다.

이처럼 28세가 되기도 전에, 베살리우스는 그의 목표를 성취했다.

그는 파도바의 직장을 그만두고 안나 반 하메와 결혼하기 위해 1544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유럽 여행 동안 황제의 주치의로서의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

1553~56년 베살리우스는 브뤼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는 점점 축적되는 부(富)에 걸맞는 위풍당당한 집을 짓고 의학실습에 열중했다.

1556년에 스페인의 카를 5세(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가 왕좌에서 퇴임하면서

그에게 평생연금을 제공하고 백작으로 임명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559년에 베살리우스는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 궁전의 의사 중 1명으로

그를 지명함으로써 아내와 딸과 함께 스페인으로 갔다.

1564년에 베살리우스는 성묘순례여행을 위해 스페인을 떠나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도중 베네치아와 키프로스에 들렀고, 그의 아내와 딸은 브뤼셀로 돌아갔다.

베살리우스의 업적은 고대 학문의 인문주의적 재생의 극치이며,

의학교육과정에 인체해부를 도입했고, 유럽의 해부학적 문헌의 증가를 가져왔다.

 베살리우스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을 면밀하게 해부했다.

 베살리우스 이후에 해부학은 생리학은 물론 생물학과도 매우 깊은 관계가 있는 과학분야가 되었고,

의학은 수준 높은 전문직이 되었다.

 베살리우스 말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순례여행에서 유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병에 걸려 그리스의 자킨토스 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