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로 향하는 미국 해군의 최초의 항공모함 랭글리(USS Langley)와 항모 에섹스(USS Essex)
오키나와 전투( Battle of Okinawa) 또는 코드네임 아이스버그 작전(Operation Iceberg)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이던
1945년 4월 1일 부터 6월 23일까지 83일에 걸쳐 치른 전투로
이오지마 전투에 이어 최초로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으로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최초로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를 냈으며,
일본 측은 사령관, 군인 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들까지 전원 옥쇄해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거나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등의 비극이 일어났다.
미군은 이오지마 점령 후에 일본 본토 내로 공격해 들어가기 위해
미군 탈환 지역에서 가장 가깝고 일본 규수 지역을 폭격할 수 있는 오키나와섬을 골랐는데
미군은 사이먼 B 버크너 중장의 지휘 아래에 18만 3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상륙 준비를 했다.
그리고 상륙 지역에 일본군을 공격해 많은 피해가 나지 않도록 상륙 전 한 달 동안 3만 발에 달하는 포탄을 상륙 지역에 쏟아부었다.
일본군은 이에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 이사무 소장 등을 보내 방어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오키나와로 향하는 미군 함정 - 1945년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미군은 상륙 당일인 1945년 4월 1일 오전에 주력 4개 사단이 오키나와 가네다만으로 순조롭게 상륙하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아무 저항 없이 광대한 오키나와 북부 지역을 장악했고 상륙 며칠 동안은 일본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4월 5일 부터는 미군이 방심을 한 사이에 일본군의 사령부 슈리 성에서
무수한 동굴 진지가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수류탄으로 동굴 진지를 하나 하나 제거했고 제거하는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4월 7일 에는 이토 세이이치 함장이 이끄는 7척의 남은 연합 함대와 전함
야마토가 오키나와 보우노사키 해협에서 미군 전투기들의 공격으로 거의 전멸당했다.
미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처참한 전투 끝에
5월 29일 미군이 슈리 성을 함락시켰고 5월 31일에 일본군은 전력의 85%를 잃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섬 남쪽 지역의 마부니 고지 동굴로 퇴각했고, 옥쇄 준비를 했다.
6월 11일 오로쿠 지구에서는 일본 해군 사령관 오타 미노루와 군대 전원이 옥쇄했고
6월 15일에 일본군의 남은 병력 6천 명이 미군의 화력에 견디지 못하고 붕괴했다.
6월 18일 지휘관이던 사이먼 B. 버크너 중장이
일본군의 포격으로 급작스럽게 전사하지만 전세는 되돌려지지 않았다.
6월 19일 에는 일본군 사령부 참모까지 전사했으며,
우시시마 미쓰루 중장과 조 이사무 소장이 6월 23일 오후 4시 30분에 할복 자살함으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군인, 사령관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들에게도 할복 자결을 명해
수많은 주민들이 수류탄으로 자결하거나 가족끼리 서로 목졸라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고
주민 사망자는 대략 12만 명으로 추산된다.
미군은 많은 피해를 내면서도 오키나와를 점령하면서
가까운 규슈 지역 등을 폭격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의 항복을 앞당겼다.
일본군들이 은닉해 있는 동굴앞에 접근하는 미군 해병대 - 1945년
일본군들이 숨어있는 참호에 화염방사기를 뿜어 공격하는 오키나와의 M4 셔면 전차
일본군의 참호를 살펴보는 미군 해병대 병사 - 1945년 3월
오키나와 내륙으로 진군하는 미군 - 1945년 4월
새끼 염소에게 물을 길어 먹이는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 1945년
우중 참호속의 오키나와 미군 해병대 - 1945년
레이션 캔으로 식사를 하는 미군 해병대 병사 - 1945년 5월
파괴된 일본군의 거점을 지나서 전진하는 미군 해병대
함포 사격으로 파괴된 일본군의 거점을 지나 전진하는 미군 해병대
오키나와 일본군의 거점에 로켓탄을 발사하는 미 해군 코르세어 전투기
.
브라우닝 자동소총으로 사격을 가하는 미군 해병대 병사
오키나와 일본군의 거점에 사격을 가하는 미 해병대
수렁에 빠져버린 M4 셔먼전차 내부의 물을 퍼내는 미군
오키나와에 설치된 미군의 캠프
오키나와인을 부축하여 이동시키는 미해병대 병사들 - 1945년 6월
전쟁의 참화를 입은 오키나와 어린이들
화재가 난 오키나와의 민가에서 불타 죽은 돼지를 노획한 미군들 - 1945년 3월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후 일본군들의 거점이었던 동굴속에서 밖을 내다 보는 미 해병대 병사 - 1945년 6월 22일
서태평양까지 뻗었던 일본군의 거점을 미국이 차례로 붕괴시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3월 23일,
오키나와 전투는 미군의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미군은 이 섬을 1,500척의 군함으로 포위하고 전투 부대 18만 명을 포함한 54만 명의 대병력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현지에서 징집된 보조 병력을 포함하여 11만 명이었다.
산호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오키나와 섬 중남부에는 수많은 종유 동굴이 있다.
일본군은 그런 동굴과 새로 판 지하 진지에 숨어서 계속 싸웠다.
당시 일본 정부와 군은 미군과 일본 본토에서 맞서 싸우는 ‘본토 결전’을 예상했다.
그러나 준비가 다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오키나와가 미군에게 점령된다면 B-29 폭격기의 대량 폭격으로 인하여
일본 본토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수 있는 거점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오키나와가 점령당하여 미군 B-29폭격기가
폭탄을 가득싣고 일본 본토 폭격을 나설 이,착륙 비행기지를 만들지 못하게끔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 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그러나 이 지구전을 위해 전 주민이 전투에 휘말렸고, 오키나와 현민 중 1/4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 전사자 1만 2,500명에 비해 일본군은 약 9만 4,000명이며, 주민 사망자 수도 이와 비슷하다.
사망자 수는 몇만 명이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군의 ‘군민공사(軍民共死)’ 사상에 따라 집단 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또는 피신한 참호에서 일본 군대가 쫓아내서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교훈이 평화에 대한 강한 염원과 함께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지게 되었다.
거기에는 적과 아군,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지 않고 23만 9,209명(2004년 6월 현재)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또한 현지 조사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 이전에 오키나와에는 100개가 넘는 군 위안소가 설치되었으며,
거기에는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위안부로 다수 수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오키나와 전투의
실태와 일본군의 특성 등을 배울 수 있는 지역이라는 이유로 매년 방문자가 증가하고 있다.
photo from : Forems.squrd.com
realwarphotos.com
historywarsweapon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