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국 국가간의 군수품 무기 무상양여(Land Lease)로 소련으로 보내어질 영국의 밸런타인 탱크 - 1943년
소련에 보내어질 밸런타인 탱크에 영국의 밸런타인 탱크 공장 노동자들이 탱크의 이름을 스탈린(Stalin)이라고 지어 놓았다.
밸런타인 탱크공장을 방문하여 소련으로 보내어질 군수품 원조에 대하여
영국 공장 노동자들에게 감사의 연설을 하는 영국 주재 소련 대사 이반 마이스키(Ivan Maisky) - 1943년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에게 노획된 소련군의 영국제 밸런타인 탱크
파괴된 소련군의 영국제 밸런타인 탱크를 훑어보는 독일군
소련군에게 노획한 독일군의 영국제 밸런타인 탱크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아이러니중의 하나는
영국과 미국에서 Land Lease로 소련으로 무상 양여해준 군수품 전차들을
소련군들은 썩 달갑게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소련군들은 무상으로 제공받았던 미국의 M3 리(Lee)탱크를 일곱 동지들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소련군들이 자국에서 생산된 T-34 전차 보다도 미국과 영국이 자국에
군사 원조로 무상 양여 해준 전차들의 성능에
대하여 그리 큰 신뢰와 기대를 가지지 못했었던 부분이라고 볼수 있다.
소련군에 양여된 미국제와 영국제 전차들중 독일군들과 전투를 벌이던 소련군의 전차들중
그중 일부는 독일군에게 노획되어 다시 사용되게 되었다.
이러했던 경우는 미국과 영국이 소련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독일군에게 전차를 제공해준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다.
즉 소련군에게 보낸 전차들을 활용하여 독일군을 상대로 잘 싸워주길 바랬었던 형태였지만
그 무기들이 독일군의 수중으로 넘어간 형태는 죽쑤어 개에게 준 꼴이 되어 버린것이나 같은 격이었다.
2차 세계대전중 연합국의 대륙간 무기 무상 양여를 했던 배경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 처칠 수상이 소련을 돕자고 견해를 같이 했던 것은
독일과 일본이라는 두나라를 상대로 각각 전쟁을 겪어 오던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동부전선에서 소련의
선전을 기대할수밖에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유럽 전역의 국가들을 동시에 침략한
소련과 독일을 약화 시키기 위해서는 미국과 영국측에서
소련을 견제하는 동시에 반드시 독일을 상대로 같은 전쟁을 벌이는 연합국이 된
소련의 영향력에 기대를 가질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중반기였던 1943년 미국과 영국은
당시 시점으로 볼때 2차 세계대전 초기 전투에서 전적으로 수세에 몰렸던
소련에 대하여 독일에게 무너질것이라는 생각 또한 떨쳐버릴수가 없는것 이기도 했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초기 핀란드를 침략하였다.
또한 독일과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고 난 이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 또한 폴란드의 반대편 지역을 침략하였다.
소련의 이러한 야만적인 침략적인 형태에 대하여
미국과 영국은 소련이 대단히 교활한 국가라는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같았던 사실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시키고 소련을 침공한 독일로 인하여
미국과 영국에게 적성국에서 연합국으로 반대로 작용하게 되어버렸다.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유럽 대륙에서 소련을 나치스 독일의 팽창주의를 막을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인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비록 소련이 미국과 영국과는 국가적 이념을 달리하는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독일을 견제하려면
유럽에서의 강대국인 소련을 연합국으로 포함시켜 그들과 손을 잡지 않을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 만큼 전세계 인류에게 2차 세계대전 이라는 전대 미문의 대단히 심각한 형태의 전쟁 기간 동안
유럽에서 소련의 위치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미국과 영국에게는
그야말로 독일의 나치스 팽창주의 세력을 약화시킬수 있는
막대한 군비적 측면의 국가적 짐을 덜수 있게 해줄수 있는 한 부분이었다.
또다른 부분의 예를 들어 보자면 실제로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소련이 돌연 전쟁을
중지하고 독일과 휴전의 강화를 맺을 경우도 또한 고려를 해야 되는 정치적 측면이 스며 있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을 고려했을때 미,영의 소련에 대한 군수품 무기 무상 양도 정책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 처칠 수상이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 서기장의 눈치를 보며 소련 국민들에게
스탈린의 전시에 독재적인 국가적 정책에 대한 부분을 옹호해주는 입장으로
그의 체면을 간접적으로 세워 주는 정책이기도 했었다.
그러한 이유의 궁극적인 배경은 뭐니 뭐니 해도 유럽에서 막강했던 독일군을 상대로
매일 매일 격렬하고도 참혹한 인류 최대의 지옥같았던 전쟁을 펼치고 있던
소련군의 역할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반기 미국과 영국및 연합국들이 독일과 소련의 매일 매일 전투 상황을
예의 주시했었던 소련의 한 도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2차세계대전 승패의 엇갈림으로
작용할수 있는 중요한 전투 지역이 독일군이 소련 국토 내부에 깊숙이 침략해 들어갔었던
스탈린그라드였기 때문이었다.
photo from : ww2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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