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randia
시벨리우스(Sibelius Jean: 1865 ~1957 )
판란드인들은 세계의 그 어떤 나라의 국민들보다도 애국심이 강한 민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형태는 핀란드의 음악가 시벨리우스가
모국 핀란드를 사랑하여 작곡한 전세계인들의 애청곡인 핀란디아를 보아도 알수 있다.
핀란드는 13세기경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던 대공국이었으나,
1808년 러시아의 핀란드에의 침공을 스웨덴이 격퇴하지 못했기 때문에
1809년 이후로는 러시아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영토화 되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스웨덴 시대로부터 이어왔던 대공국으로서의 대우를 유지했으나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1세(재위 1825~55년)의 시대 이후
핀란드의 자치권이 침해당해 오다가,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핀란드의 자유는 박탈당하여, 러시아의 속령화 정책이 강제로 추진되었다.
그 때문에 핀란드에서는 애국 독립 운동이 격렬하게 고조되었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행사가 벌어졌는데,
그 중의 하나로는 문화적 행사를 가짐으로써 국민의 애국열을 높이고,
나아가 독립 운동의 자금을 모금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그 한 가지로 민족적 역사극 '옛부터의 정경'이 상연되게 되었다.
1899년의 일이었다.
시벨리우스는 음악가로서 이 연극의 상연에 참가했다.
이 희곡을 위하여 쓴 음악은 각 장면을 위한 전주곡과 대사의 배경 반주음악,
그리고 힘찬 피날레였다.
이 극음악에서 후에 '역사적 정경, 제 1'(직품 25)와 교향시 '핀란디아'가 만들어졌다.
이 작품 속에 담겨진 열렬한 애국심을 오늘 날에는 누구든지 금방 감지할 수가 있지만,
처음 발표 당시에는 청중도 비평가들도, 이 곡의 의미를 잘 몰랐었던 것 같다고,
시벨리우스 연구가 칼 에크만(Karl Ekman)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곧 청중은 이 작품 속의 뜨거운 애국심을 알아들었다.
이것을 눈치 챈 러시아 관헌은, 핀란드 국내에서 이 곡의 연주를 불온하다 하여 금지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눈이 미치지 않는 나라에서는
다른 타이틀로 바꾸어서 러시아의 눈을 피해 연주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교향시의 중간부의 선율에는 후에 베이코 코스켄니에미(Veikko Koskenniemi)가
시를 써넣어 '핀란디아 찬가'라는 합창곡으로 만들었다.
이 곡은 오늘날 핀란드의 준 애국가처럼 애창되고 있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 적군(赤軍)은 46만 병력을 투입해 핀란드 국경을 밀고 들어왔다.
1000여 대의 소련군 항공기가 수도 헬싱키를 무차별 공습했다.
핀란드가 독일의 소련 침공 루트가 될 것을 우려한 일종의 예방 전쟁이었다.
1940년 3월 29일 비푸리등 핀란드 남동부 지역의 국민들은 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다.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입을 예방한다는 구실로 핀란드를 침공했다.
소련군은 ‘누워서 떡 먹기’로 생각했다.
일부 병사는 스칸디나비아의 혹독한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름철 군복을 걸치고 왔다.
야외 전투 없이 어디든 점령해 따뜻한 실내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침략자들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핀란드인들의 저항은 대단히 거세었다.
소규모 스키부대와 자전거부대가 숲 속에 매복해 게릴라식 공격에 나섰고
레지스탕스의 화염병 공격도 시작됐다.
화염병은 이때부터 소련 외교장관 몰로토프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 칵테일’로 불렸다.
핀란드의 저항활동은 한때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각국의 지원이 쇄도했고 외국에 나갔던 핀란드 이민자는 물론 외국인들까지 자원병으로 참전했다.
소련군의 실패는 자만과 무능에서 비롯됐다.
소련군은 아무 준비도 없이 병력의 우위만 믿었던 것이었다.
소련군 1개 사단이 핀란드 소부대의 매복공격에 의해 거의 대부분의 병력(2만3000명)을 잃은
‘라텐티에 사건’은 지금도 군사학에서 해서는 안 될 대표적 실수로 꼽힌다.
하지만 겨울을 넘기면서 주변국의 지원은 시들해졌다.
독일과 스웨덴 등 주변국은 핀란드에 정전 협정을 맺도록 압력을 가했고
핀란드군의 탄환도 바닥이 났다.
결국 1940년 3월 6일 핀란드는 정전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4개월간의 전쟁 동안 소련군은 최소 12만7000명이 사망했다.
핀란드군의 희생자는 2만7000명에 불과했다.
핀란드의 명백한 군사적 승리였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가혹했다.
핀란드는 영토의 10%를 소련에 넘겨야 했고 일부 요충지를
소련의 군사기지로 장기 임대해 줘야 했다.
약소국의 설움이었다.
핀란드는 이 휴전의 댓가로 비푸리 지역과 한코(Hanko)반도를 소련에 30년간 내주게 되었다.
핀란드는 이듬해 독일과 소련의 독소전쟁이 발발한
틈을 타서 소련군을 몰아내고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소련군에게 독일군의 패색이 완연해짐에 따라
핀란드는 다시 소련에 항복하면서 많은 영토를 소련에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게 된다.
핀란드화(Finlandization)란 단어는
흔히 약소국이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주변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처지를 의미하는 조어(造語)이다.
1960∼70년대 서독의 정치논쟁에서 비롯된
이 말은 핀란드가 옛 소련에 거스르지 않는 비자주적 외교정책을 편 것을 빗댄 것이다.
핀란드인에겐 모욕이 아닐 수 없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것이라는 항변이다.
특히 ‘핀란드화’의 시작인 겨울전쟁(Winter War)을 살펴보면 그 억울함을 이해할수 있다.
1939년 소련군의 핀란드 침공 루트
핀란드를 침략한 소련군 제 7사단의 T-26 전차 - 1939년 12월 핀란드 칼렐리야 이스머스(Karelian Isthmus)
카렐리야 이스머스(Karelian Isthmus)의 위치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핀란드군은 1개 사단도 안 되는 1만 1천명 병력으로
불시에 모국 핀란드로 침략해 들어온 소련군을
제대로 구비되지 못했던 모자라고 열악했던 전쟁 장비로 상대해야만 했다.
내 가족과 이웃을 지키려는 나라 사랑의 강한 애국심으로 하나 같이 똘똘 뭉쳐진 핀란드군은
4만 병력으로 침략해 들어온 소련 최강이라는 제44사단과 163사단을 괴멸시켰다.
그 결과 소련군 2만 7500여명이 핀란드 수오무살미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다.
소련군 1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이 핀란드군에게 집단으로 항복하는 상황마저 발생했다.
1939년 12월 11일 소련군 163사단은 핀란드동부의 수오무살미 마을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핀란드 제9사단은 후방을 차단시키고 포병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은채 공격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은 제 44사단을 증강시켜 구원을 나섰지만 마을 동쪽 8km지점에서 포위되어 버렸다.
12월 25일 핀란드 포병대의 도착으로 병력이 증강된 핀란드군은 공격을 가하여 소련군을 괴멸시켰다.
소련군의 실책은 두가지였다.
그 첫번째는 전투 상황에 따른 기상 조건을 등한시 했다.
두번째는 핀란드군보다 우월했던 조건의 방대했던 소련군 전쟁 물자를 믿고
핀란드군을 얕잡아 보았던 것이다.
이러했던 소련군은 핀란드군을 무시하고 바로 내륙으로 침공하기 위해
눈이 내리는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2개 사단이 동원시켰다.
그러했던 결과는 참혹하였다.
핀란드를 침략한 4만여명의 소련군 병력중
소련군 2개사단 병사들은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핀란드군에게 철저히 괴멸되어
2만 7500명이
혹한의 날씨에 그대로 꽁꽁 얼어 붙어 동사체가 되어버렸다.
소련군과 맞서 싸운 1만 1천명의 핀란드군중에서 전사자는 1000명이었다.
또한 소련군2100명이 핀란드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소련군이 핀란드 수오미살미 전투에 투입시켜 파괴된 전차의 댓수는 43대 였다.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핀란드군이 침략자 소련군을 상대로 벌였던 눈부신
이 승리는 세계 전쟁사에서 빛나는 전과로 기록되게 된다.
핀란드를 침략한 소련군의 T-26 전차부대를 수오무살미(Suomussalmi) 라테 전투에서 괴멸시킨 핀란드군
- 1940년 1월 17일 수오무살미 라테(Ratte) 로드
핀란드를 침공한 선봉대의 소련군 전차는 T-26이라는 보병지원용 전차였다.
이 소련군 전차는 1930년에 만들어진 무게 8.5톤의 경전차이다.
치체에 37㎜ 전차포와 7.62㎜ 기관총 1정으로 무장했다.
얼마후 소련을 침략한 독일군의 전차를 상대할 때에는 장갑이 얇아
독일군 대전차포에 쉽게 관통되어 파괴되는 깡통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 당시 핀란드군에게는 힘겨운 상태였다.
결국 소련군은 독일,영국 등 다른 유럽국과 비교했을 때
첨단 군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핀란드를 건드린 셈이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 T-26전차에 맞서 기발하게 화염병을 만들어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화염병을 당시 소련 외무장관의 이름을 따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불렀다.
몰로토프는 핀란드 침공 전 불안에 떠는 핀란드인을 향해 “우호적 협력관계를 갖겠다.”고 거듭 약속한 인물이다.
핀란드군은 거짓말을 한 그에게 “휘발유로 만든 폭탄 칵테일을 돌려주자.”는 심정으로 그렇게 불렀다.
수오무살미의 위치
핀란드의 위치
핀란드 전도
핀란드의 정식 명칭은 핀란드 공화국(Republic of Finland)이며
핀란드어로는 수오맨 타사발타(Suomen Tasavalta)
또는 수오미(Suomi: 호수의 나라)라고 한다.
서쪽으로는 스웨덴 동쪽으로는 러시아,북쪽으로는 노르웨이
남쪽으로는 에스토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남쪽으로 핀란드만(灣)을 사이에 두고
발트해에 접해있고 서쪽으로 보트니아만에 접해있다.
위치상 스웨덴과 소련이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여 역사적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 왔으며 친서구적 국민 감정이 강하다.
행정구역은 20개의 주(maakunta)로 구성되어 있다.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은 소련의 북유럽 국가 핀란드의 침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자국의 이익을 추구 하려는
파렴치한 소련 공산주의의 야욕에서 비롯되었다.
그로써 핀란드는 겨울전쟁에 이어 소련군이 두번째로 핀란드 국경을 넘을 때부터
‘계속전쟁’의 종전까지 국토가 전운에 휩싸이게 된다.
1944년 6월 9일 소련군은 3개군 병력 26만명과 항공기 1000여대,화포 7500여문 등을 동원하여
라도가 호수 근처의 카렐리야 지협을 공격했다.
하루 만인 6월 10일 핀란드군의 1차 방어선(발케사리 섬)을 무너뜨리고,
6월 14일 2차 방어선(바멜스-타메팔리)마저 돌파했다.
핀란드군은 비푸리-쿠파르사리-타이팔레 등으로 이어지는
3차 방어선인 ‘VKT라인’을 형성하고 ‘배수의 진’을 친다.
핀란군의 만네르하임 총사령관은 “VKT라인에서 더 이상 후퇴는 없다.”며
결사항전을 당부한다.
6월 12일 핀란드군은 동맹국 독일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군은 공군 비행대와 제122보병사단 등을 지원하지만,
자신들도 동맹국의 딱한 사정을 봐줄 처지가 아니었다.
핀란드는 소련에 평화협상을 제안했지만 무조건 항복이어서 퇴짜를 맞았다.
이제 다시한번 핀란드 병사들의 투혼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비푸리 남쪽의 ‘탈리’를 공격했다.
소련군의 병력은 제97,제109군단과 152전차여단 등 15만명이었다.
반면 핀란드군은 18사단과 3여단,13연대 3대대 등 3분의 1수준인 5만명에 불과했다.
스웨덴 자원병들도 나섰지만 맞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핀란드군은 이번에도 지독한 소련군의 파상 공격을 물리치고야 말았다.
모든 전략은 핀란드의 지형을 충분히 이용하여 전투를 펼쳤다.
지형 지물을 이용하여 소련군을 분쇄시켰던 핀란드군의 모티 전술은
잘 알려져 있다.
소련군은 6월 24일까지 1차 공격에 실패하자 제30근위군단,108군단 병력을 잇따라 증원해 재공격에 나섰다.
핀란드군도 4,17,18사단 예비대 등을 총동원했다.
독일군 303돌격포 여단이 전선에 도착했을 때 핀란드군이 승기를 잡았다.
핀란드군은 6,11사단이 새로 배치되면서 공세를 폈고,
소련군은 46,63,64근위사단과 268사단,30근위전차사단 등이 방어에 나서면서 그야말로 혈투를 치렀다.
6월 30일 핀란드군은 스스로 탈리를 버리고 이한탈라에서 방어전을 준비하지만,
탈리 방어전을 통해 신규 전력을 어느정도 비축한 상태였다.
핀란드군은 7월 3일 새벽 4시에 소련군 63사단과 30기갑여단이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우연히 입수한다.
이것은 한 부사관이 소련군의 실수로 흘러나온 통신문을 감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공격개시 몇분 전에 250여개 화포로 4000여발의 포탄을 소련군 진영에 퍼부었다.
소련군은 혼란 속에서 오전 6시에 공격을 강행하지만 승패는 처음부터 갈렸다.
7월 9일 마침내 핀란드군은 이한탈라 방어전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핀란드군의 피해는 8561명이었지만
소련군은 3배에 가까운 2만 2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핀란드군은 이한탈라에 이어 7월 10일 비푸리 전투,7월 16일 니에챠르비 전투,
7월 17일 아이라빠-뷔살미 전투에서 잇따라 소련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9월 19일 소련군의 제안으로 양군은 모스크바에서 정전협정을 맺었다.
핀란드군은 독일군의 StuG와 StuH42 등 돌격포가 효과를 발휘하자
소련군도 나중에 JUS-122,JUS-152 등을 만들어 전선에 투입했다.
독일군은 돌격포와 함께 야크트 계열의 구축전차도 잘 활용했다.
구축전차는 돌격포처럼 포탑 없이 강력한 포를 달고 주로 적 전차를 잡는 일종의 전차다.
돌격포와 큰 차이를 두기 어렵다.
핀란드군은 적 소련군의 전차도 노획해 소련군 공격에 사용했다.
6월 25일 포르틴호이까 전투에서 부상당한 핀란드군 보병이 교차로에서
소련군 KV-1과 T-34가 매복 중인 사실을 알려주자
단 두방으로 KV-1과 T-34를 날려버린다.
실제 핀란드군은 전쟁 기간에 소련군의 T-34/76를 7대 노획해 사용했다.
7대 중 3대는 독일군이 지원한 것이었다.
핀란드군이 얼마나 알뜰하게 노획 전차를 사용했는지,7대 중
1대는 전후에도 멀쩡히 남아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T-34/76을 파괴시
독일군이 지원한 1회용 대전차 로켓 판저 파우스트를 사용한다.
한 핀란드군이 사용방법을 잘 몰라 후폭풍이 강한 판저 파우스트를
가슴에 대고 발사하는 바람에 전차는 잡았지만,
자신의 가슴도 구멍이 뚫려 뒤로 날아가기도 했다.
핀란드군은 독일군의 강력한 대전차포 판저슈렉도 적절히 사용해 소련군 전차를 파괴했다.
핀란드군 포인트(전방 수색) 전차의 전차장이 포탄과 연료가 바닥나자
수오미 기관단총을 쏘면서 머리 부분이 4개인 독일군의 ‘강화형 수류탄’을 사용했다.
핀란드군은 그런 중에도 군복과 철모는 고유의 개성을 살려 착용한 점이 흥미롭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독일군에 협력하고 소련군에 저항한 일부 동유럽 국가들과
핀란드의 운명은 다른 길을 간다.
다시말해 소련은 전후에 동유럽 국가들에게 독일군에 협력한 책임 등을 뒤집어씌워 위성국으로 삼고 만다.
하지만 소련군에게 강력하고 처절하게 저항한 핀란드는 전쟁의 상처를 신속히 극복하고
오늘날 최고의 기술선진국이 된다.
‘운명은 스스로 노력하고 지키려는 자에게 손짓을 한다.’는 교훈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핀란드인의 93% 이상은 유럽인과 다른 유전 형질을 지닌 소수민족인 핀(Finn)족이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와 우랄 산맥의 서쪽 볼가 강에서 발원한 아시아·유럽계 혼혈족이다.
볼가 강 남서쪽에 거주하던 헝가리 마자르족과 형질이 가까운 편이다.
유럽대륙에 사는 아시아인은 마자르와 핀 등 두 민족 뿐이다.
특히 핀족은 언어학적 분류로 한민족과 비슷한 알타이어계다.
언어의 구조가 한국어와 유사한 점이 많다.
원시 발원지나 언어적 측면을 따지면
한민족 입장에서는 중국인보다 훨씬 가까운 게 핀족이다.
핀족은 원래 검은 눈과 머리를 특징으로 했으나
중세 때 스칸디나비아의 유럽계 바이킹족 등과 피가 뒤섞여
북유럽인처럼 금발 등 외형이 변하고 있다.
하지만 강인한 저항 정신,기발한 발상의 창의력,낙천적이면서도
강한 애향심 등과 국토가 스웨덴과 러시아 두 강대국 사이에 접해 있어 외침을 받아
그에 저항하면서 겪어온 역사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접하여
수많은 외침을 받아온 한 민족과 역사가 닮아 있는 모습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요즘 ‘신속한 소통’을 특징으로 하는
휴대전화나 무선통신,인터넷 등의 강국이
나란히 핀란드와 한국이라는 점은 단순한 우연일까.
카렐리야(러시아어 :Карелия, 카렐리야어: Karjala, 핀란드어: Karjala,영어: Karelia)는
북유럽의 넓은 지역에 걸친 카렐리야인들의 땅을 이른다.
역사적으로 이 지여은 핀란드와 러시아 그리고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 러시아의 카렐리야 공화국,러시아주와 핀란드에 속한
두 개의 주 인 남카렐리야와 북카렐리야로 나뉘어 있다.
이 지역의 이름은 카렐리아어와 핀란드어는 카리알라(Karjala),
러시아어로는 카렐리야(Карелия), 스웨덴어로는 카렐렌(Karelen)이다.
카렐리야 지역은 13세기 스웨덴과 노브고르드 공국간의 분쟁지역이었다.
1323년 뇌테보리 조약으로 카렐리야 지역은 양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비보리(Viborg; 후에 비푸리 Viipuri, 현 비보르크 Выборг)가 스웨덴령 카렐리야/카렐렌의 수도가 되었다.
1721년 제정 러시아와 스웨덴이 맺은 뉘스타드 조약으로 카렐리야 땅 대부분은 러시아에게 넘어갔다.
핀란드전쟁으로 핀란드가 러시아령이 된 후 카렐리야 땅 일부가 핀란드 대공국에 병합되었다.
1917년 핀란드가 독립한 후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국경이 이같이 합의되었다.
러시아 내전이후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이 설립되면서
러시아령 카렐리야는 1923년 카렐리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40년대에 핀란드령 카렐리야 땅의 대부분은 겨울전쟁(1939년~1940년)을
종결시킨 모스크바 평화협정을 통해 러시아로 넘어가고
다시 계속전쟁(1941년~1944년)때 다시 핀란드에 점령되었다.
핀란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러시아령 동카렐리야도 점령하였다.
그러나 핀란드는 다시 러시아에 카렐리야 땅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특히 당시 핀란드 제2의 도시였던 비푸리(비보르크),부옥시강 유역의
산업지대, 핀란드 중부를 핀란드만과 연결시킨 사이마 운하 ,라도가호의 어업 수역을 잃어버렸다.
당시 핀란드 인구의 8분의 1은 실향민이 되었다.
모스크바 평화협정에 따라 카렐리야 자치공화국은
1941년 카렐리야ㅡ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었고
1956년에 칼렐리야 지역은 다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91년에 자치공화국은 카렐리야 공화국이 되었다.
photo from : sitesatl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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