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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최초의 기갑차량이었던 M 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Korea Army First Armored Vehicle M 8 GreyHound ]

슈트름게슈쯔 2012. 4. 28. 12:02

 

 

공장에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의 엔진을 장착시키는 미국 엔지니어

 

 

 

프랑스 아브랑슈에 전진한 미군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프랑스 까랑탕의 파괴된 몽테부르 거리를 지나가는 미군 76.2mm 포  포병대와 

 

하프트랙과 지프및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행렬 - 1944년

 

 

 

독일군의 거점에서 포격을 가하기 전에 마을로 진격하는 미군의 M-4 셔먼전차와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 1945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북부 전투에 투입된 미군의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미군 113기병 연대 소속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와 M2 하프트랙 장갑차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된 지역의 주민들에게 환영받는 미군 113 기병연대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불타는 민가의 도로를 지나는 미 제 3군 소속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 1944년 9월 6일 벨기에 Ramillies-Offus

 

 

 

 

 

M-8 그레이 하운드 장갑차의 액슬(Axle)을 교체시키는  미군 병사들

 

 

 

미군 제 29 연대 정찰대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독일군의 거점에 사격을 가하는 미군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노획한 미군의 M-8 그레이 하운드 장갑차를 살펴보는 독일군 - 1944년

 

 

 

노획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를 활용하는 독일군

 

 

 

 

미군 제 42연대 소속의 M-8 그레이하운드를 노획하여 사용하는 독일 제 111기갑사단의 독일군  - 1944년 9월 프랑스 Lorraine 

 

 

 

노획한 미군 M 8 그레이하운드 전차를 활용하는 독일군 - 1945년 벨기에 아르덴느

 

 

 

 

해방된 파리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 1944년 8월 25일

 

 

파리 개선문 앞의 미군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 1944년 8월

 

 

 

독일군과의 교전이 끝난후의 미군 610 대전차 연대(TD Battalion)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 1944년 11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발지 전투 당시 바퀴에 체인을 감은 M-8 그레이 하운드 장갑차 - 1944년 12월 

 

 

 

 

 

M8 그레이하운드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포드 사가 개발 및 생산한 6륜(6x6) 장갑차이다

 그레이하운드 이름은 미국이 영국에 공여한 M-8 장갑차에 대하여 붙인 명칭이었다.

1941년 7월 미국 육군 병기국은  3/4톤 화물 트럭 후방 화물칸에

 M3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6 대전차포 탑재차량을 대체시킬 새로운 고속 구축전차 개발을 지시한다

그것은 일반 도로에서 고속으로 적진으로 이동할 수 있는 차륜형에

당시 독일군이 사용하던 1호나 2호 전차를 상대하기 적당한

 37mm 주포를 장착시키는 형태로 계획되었다.

 그러한 계획에 따라 M-8 장갑차는

장갑이 속도를 우선시하였기 때문에 측면은 30구경 정도의 총탄만 방어할 정도에

정면 장갑은 50구경 기관총탄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계획했다.

 이것은 별로 어려운 제안이 아니었던 입장에 따라

 포드사나 크라이슬러사및 스튜디베이커 등의 업체가 프로토타입 제작에 참가했다.
 스튜디베이커 사의 프로토타입은 T21, 포드사는 T22,

크라이슬러의 프로토타입에는 T23이라는 기호가 붙여졌다.

 3개사의 프로토타입은 모두 설계 및 외관이 비슷했다.

1942년 4월, 포드사의 T22 수정 개발안이 최종 채택되었다

T22 개발안이 최종 채택될 무렵, 장착하기로 한 37mm 대전차포의 위력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런데 미군에 최종 모델이 채택이 될 무렵에 전쟁의 병기 상황이 바뀌어 버린다.

미국의 주적인 독일군의 전차가 전쟁 초기에 사용했던 1호, 2호 전차의

세력은 감소하여 2선급 내지는 후방으로 돌려지고 있었으며

주포 구경이 증가된 3호, 4호 전차로 주력 전차가 바뀌어 있었고

 

소련군 T-34/76전차의 출현에 충격을 받은 독일군은

3호 4호 전차보다도 훨씬 화력과 장갑이 증대된 5호 전차인

판터전차와 타이거 전차를 개발하여 전장에 나타나 있었다. 

그러한 독일 전차들을 상대하기에

 37mm 대전차포로는 이들 전차의 전면 장갑을 관통시킬 수 없다는 점이 명백했다.

.

하지만 어차피 주력 전차는 M4 셔먼 전차가 될 것이었고

딱히 새로운 구축전차를 새로 개발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해서

이 안을 그대로 살려 구축전차 대신 정찰용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계약 문제와 몇 가지 설계 변경 작업으로 생산은 1943년 3월까지 지연되었다.

1943년 3월 이후 본격 생산을 개시하여 1945년 6월까지 생산했다.

전체 생산량은 8,523대였다.

그리고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가 처음 실전 배치된 것은 1943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였다.

그리고 극동 전선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일본군 전차의 빈약한 장갑에는

정찰용이 아닌 구축전차로서의 역할도 해 냈다.

하지만 차륜형 방식인지라 야지에서의 성능은 불만족스러웠고

유럽의 진창 지형에서는 도로가 아니면 활동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유럽 전선에서는 전차도 장갑차도 아닌

신뢰성이 어중간한 차량으로 취급을 받았다.

개발 자체가 구축전차로 시작되다 보니 정찰용도 대전차용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거기다 얇은 장갑 때문에 지뢰나 간단한 개인 중화기로도 쉽게 대파되었으니

화력이 강화된 유럽 전선의 전투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실전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도 않은 1943년 부터 미군은 새로운 정찰 차량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타입이 나올 무렵인

1944년에는 이런 형태의 차량은 필요가 없었던지라 계획은 취소되었다.

 하지만 8500대 이상이 만들어진 댓수로 그대로 병기 창고에 사장시키기에는 아까웠고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는 미국의 동맹국에서 다시 제 3세계 국가들로 퍼져나갔다.

그 중에는 한국이 있었다.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하여 서울에 입성하는 미군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 1945년 9월 7일

 

 

 

시가 행진중인 대한민국 육군 최초의 기갑병기 M-8 그레이 하운드 장갑차

 

 

 

한국은 6.25 동란 이전 제대로 된 기갑전력은 전무했던 국가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부터 공여 받은 M8 장갑차로 육군 독립기갑연대

예하 장갑대대에 27대의 M8이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 기갑전력이라고 하는게 M8 27대, M2 반궤도 24대 정도)

사실 당시 한국은 기갑병력이나 항공병력이나 포병 병력이나 제대로 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의 침략에 의한 6.25 동란이 터졌고 M8 장갑차도 전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한이 소련에서 제공받은 T-34/85 전차는  2차 세계대전 후기까지 세계의 유명 전차들중에서도

 가장 걸작으로 평가되었던 전차였고 본격적인 진짜 전차전에

M-8 장갑차가 상대가 될리가 없었다.

또한 한국의 기갑전력은 독립된 기갑연대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당시 소대별로 분할하여 각 보병대에 지원을 나가 있었다.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기갑 전력을 집중하여 사용한 사례가 있음에도

이렇게 한 것은 한국군 수뇌부의 판단 착오라기 보다 한국 기갑이 가진 한계성 때문이었다.

애초에 37mm 소구경 포를 장비한 미제 M-8장갑차가 85mm 대구경 포를 장비한

소련제 T-34/85 전차를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고

어차피 전차로서 적 전차를 상대하지 못한다면 보병지원이라도 할 수 있게 하자는 의도였다.

덧붙여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당시 한국군이 가지고 있던

장거리 통신장비는 M-8에 달린 SCR-506 만한 장비가 없었다.

그러했던 관계로 이 M-8 장갑차를 각 사단에 분산 배치해서

작전시 통신을 원활하게 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차라고는 한대도 없었던 한국군에게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는  그나마 든든한 지원 차량이 되어 주었다.

적 전차가 굴러다니고 포탄이 보병 앞에 떨어지는 상황에서 철제 차량 한대라도

하나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는 없는것보다는 확실히 다른것이다.
하지만 M-8 장갑차의 한계는 37mm 주포로는 적 전차를 관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6.25 동란 당시 38선의 방어는 1사단(개성)과 7사단(의정부) 6사단(춘천) 8사단(강릉)이 맡고 있었다.

M-8 장갑차는 지원을 위해 가장 먼저 도착한 7사단의 작전지역인 의정부 축선 전투에서 북한 공산군의

소련제 T-34/85전차에 대응하여 대전차 사격을 가하였지만

포탄들은 발사하는 족족 T-34/85전차의 장갑을 관통시키지 못하고 튕겨나가 버렸다.

그리고 T-34/85전차가 발포하는 85mm 전차포의 공격에 M-8장갑차는 한대씩 파괴되어 나갔다.

하지만 김포와 영등포 일대에서는 인민군 6사단을 상대로 효과적인지연전을 펼쳤다.

옥천 전투에서는 M-8 장갑차에서 발사된 37mm 대전차 포탄이 T-34/85전차의 무한궤도를

파괴시킴으로써 소련제 전차에 대한 탱크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한국 장병들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기도 했다.,

 이후 정확하게 M-8 장갑차가 몇대가 전투에 사용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북한 청진 지역 전투를 마지막으로 M-8 장갑차에 대한 기록은 사라지고

개전후 6개월만에 모든 M-8 장갑차가 파괴되었다.

그 이후에는 한국군은 미군의 도움으로 M4 전차를 공여받아 본격적인 전차를 운용하게 된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의 날 행사에도 선 보인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 1956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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