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독일군의 이동식 밥차 굴라쉬 카노네 [WW2 German Field Kitchen Carrier Gulaschkanone]

슈트름게슈쯔 2012. 6. 10. 14:50

 

 

 

 

 

 

 

 

 

 

 

 

 

 

 

 

 

 

 

 

 

 

 

 

 

 

 

 

 

 

 

 

 

 

 

 

 

 

 

 

독일군의 이동용 급식차 굴라쉬 카노네

 

 

독일군의 야전 솥이었던 굴라쉬 카노네는 한국에서 독일제 압력솥으로 잘 알려져 있는

휘슬러사의 창시자 였던 독일의 칼 휘슬러가 개발했었다.

휘슬러사는 1845년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군용차 뒤에 트레일러 형태로 달고 다니며

군인들에게 고기 수프를 대량으로 배식시킬수 있는

야전용 요리솥을 처음 만들면서 휘슬러 사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굴라쉬 카노네(Gulaschkanone)는

 영어로 표현하자면 Field Kitchen이고 한국어로는 야전 급식차내지 취사차라고 할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경우에는 독일의 굴라쉬 카노네같은

야전 급식차 스타일이 아닌 통조림 형태의 씨 레이션이었다.

현재 미군의 중요한 전투식량인 MRE는 

2차 세계대전 레이션 에서부터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대한민국 또한 1,2형의 군대 전투식량이 미군의 MRE 같은 전투식량으로  발전했지만 

실제로 전투 식량은 군대 취사반에서 밥을 지어 뜨끈 뜨끈한 국과 함께 먹는 것만 못하다.

군인들의 식량을 해결하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아주 중요하다.

전쟁 발발시 기본적으로 제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 나라의 군병력과 병기일수도 있지만

군량미가 떨어진다면 결코 그 군대를 유지시킬수가 없다. 

그만큼 군대에서 제일 중요한것은 식량이다.

전쟁터에서 식량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서 만든 

통조림 발명의 계기 또한 나폴레옹이 전투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상금을 걸고 아이디어를 공모한 결과였다.

 

나폴레옹에게 통조림이 절실했던 이유는  

장기간의 원정을 위해서 다수의 보급기지와 보급품이 필요했었다.

. 1803년 프랑스에서 병사들이  전쟁터에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방법을 찾던 중

 

니콜라 아페르가 발명한 통조림 방법이 채택되어 널리 쓰였다.

 나폴레옹 1세의  정복전쟁이 활발하던 당시

 프랑스 군대의 음식저장수단은 밀봉한 유리병에 음식을 담아서 저장하는 병조림이었는데,

 문제는 병조림이 유리재질이라 깨지기 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니콜라 아페르라는 사람이 대체수단으로 개발한 음식 저장수단이 통조림이었다.

통조림은 과일,채소,생선,육고기등의 다양한 먹을거리들을 보관할 수 있고,

가벼워서 이동이 쉽다는 장점이 있다. 

 

 

 독일군의 야전급식차 "Gulaschkanone"은 "Vonderwagen Hf.11"과 "Grobe Feldkuche Hf.13"라는

 2대의 연결된 수레를 말 2 필이 끄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Vonderwagen Hf.11" 은 조리병이 탑승하여 말을 몰 수 있는 수레로,

좌석 아래에 배급식량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주로 미리 구운 빵과 소시지등을 실었고 그리고 뒤에는 물통을 실을 수 있었다.


  실질적인 조리를 담당한 것은 "Grobe Feldkuche Hf.13"큰 뚜껑이 보이는 수레이다.

 

가운데 스튜 요리를 할 수 있는 200리터의 통이 있고,

 그 통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꼭지가 달린 90리터의 커피 메이커,

우측 또는 전방에  감자와 소시지를 구울 수 있는 조리기(Range)가 있다. 

스튜 요리 통은 타는 것을 막고 보온을 위해 2겹 구조이고,

석탄과 장작으로 불을 때서 조리를 했다.

 
  각 독일 사단은 식량보급을 위해 제빵(베이킹) 중대와

 정육 중대를 구성,운영하여, 빵과 소시지를 미리 만들어,

"Gulaschkanone"를 이용하여 일선 부대에 보급을 하였다.

또 독일군은 전장에서 누구나 계급의 구분없이 같은 음식을 먹은 사실로 유명하다.

그 전투 식량은 독일인이 평소 먹던 것과 같은 구성이었다.

밀과 호밀로 만든 빵, 소시지(돼지고기로 만든), 감자,

그리고 소시지와 감자등으로 만든 단백질이 풍부한 스튜가 기본 식단이었다.

그리고 따끈한 커피도 빠지지 않았다..
 야전급식차 "Gulaschkanone" 1대는 독일군 125~225명에게 급식을 시킬수 있었다.

즉 굴라쉬 카노네는 전쟁터에서 먹거리에 대단히 큰 비중을 두었던

 독일군의 밥차이자 밥통이었던 것이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의 신체적 특징중 하나는

미국인이나 프랑스인 영국인및 유럽 다른나라의

인종들 보다도 우선 신장이 평균 10~15 cm 더 컷으며 몸무게도 더 많이 나갔다.

이것은 독일인들이 영양 섭취를 잘 한데 따른 결과로 볼수 있다.

또한 독일인들은 다른 나라의 인종들보다 더 많은 식량을 소비 했었다.

먹는게 남는것이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독일인들의 먹성은 대단했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었던 레마르크의  자전적 소설격인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보면 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독일군의 탐식성이 잘 나타난다. 

그만큼 독일인들은 먹는데 대단히 신경을 많이 쓴다.

하지만 어릴적부터의 고른 영양 섭취는

그 어린이가 자라면서 청소년기에 성인의 골격과 체형을

이루는 대단히 중요한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국가가 어린이들에게 할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바로 우유를 먹이는 일이다 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달리 생긴말이 아니다.

어린이들이 건강해야 그 나라에 미래가 있다.

 

 

 

 

예로부터 감자는 독일인의 주식이었다.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와 삶은 감자를 으깨어 접시에 담아 내는

식단은 독일인의 보편적인 먹거리이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이다.

남아메리카를 침략했던 스페인 군대에 의하여

이 감자는 유럽으로 전래되었다.

서늘한곳에서 잘 자라는 감자는 독일과 아일랜드에서

밀 대용의 훌륭한 식량으로 활용되었다.

그 결과 감자가 전래된지 50여년 만에 유럽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중 게르만 족의 증가율이 현저히 높아

 

감자가 유럽에 전래되어 보급된 이후 독일은 식량을 자급자족할수 있게 되자 

엄청나게 불어난 인구로 인해 독일의 도시 곳곳에

새로운 주거지역이 늘어났고

경제가 발전하게 되는 원동력을 제공하게 되었다.

 

감자라는 식량이 밀대용의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되자

우선 유럽 각국들의 식량사정이 대폭적으로 개선되었다.  

독일 국가의 미래에 근본적으로 문화와 경제의 혁명을 가져다준것은

바로 남아메리카에서 가져와 전래되어

독일인의 식량이 되었던 감자였던 것이다.  

 

 

 

 

photo from :militarymodels.co.nz

              Axis History Fo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