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이광수 침투공비 전향자와 공비잡다 부상당한 이종갑의 상반된 인생 항로

슈트름게슈쯔 2012. 7. 23. 20:37

 

 

 

1996년 강릉시 해안으로 침투하다 좌초된 북한 잠수함의 생존자 이광수씨(오른쪽)가

14일 육군 제23보병사단 장병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2011년 9월 14일

 

 

1996년 당시 침투공비로 군에 생포돼 전향한 이광수(49)씨는

작년 2011년 9월 14일 동해안 경계를 담당하는

 육군23사단 안보 교육과 전술 토의에 참여했었다.

이씨가 여러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년 9월이 처음이었다.

 이씨는 중대장급 이상 간부를 대상으로 안보 교육을 한 뒤

북한군의 침투전술과 군사적 위협에 대해 강의했었다.

당시 침투현장이었던 통일안보공원을 답사하고

북한군의 도주로였던 청학산 일대에서 전술토의까지 했었다.

 베이지색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알이 큰 선글라스를 낀 채

15년 전 자신이 타고 왔던 잠수정이 전시된 현장에 선 이씨는

군 초소, 도로변 가드레일, 모텔, 등대, 비트 확보 및 접선 장소 등

당시의 지형지물까지 일일이 거론하며 침투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씨는 “북에서 훈련을 받은 곳과 이곳의 차이는 도로에 차가 많이 다니고

불이 환한 것만 빼고는 똑같았다”며 “군 초소가 있지만,

근무를 서지 않는 것까지 알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대부분 잠수정이 후진하다 암초에 걸린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앞으로 들어 왔으나 파도가 너무 쳐서 옆으로 밀리면서

암초에 걸렸고 프로펠러가 망가지면서 좌초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잠수함 내부를 불태우고 11명만 자살한 것은

탑승 승조원이 11명뿐인 것으로 위장하려던 치밀한 계획이었다”고 설명했었다.

 

이러한 사실을 근 15년만에 털어놓았던 그의 진술을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듣고 보았던 소회는

한마디로 북한의 대남 공작 침투 무장공비에서

남한 민간인으로 전향한 자라는 신분으로

그 신분적 본말이 어쩔수 없이 전도되어 버린자의

가증스러운 증언이라고 아니 할수 없었다.

또한 그들의 다음 대통령 ㅍ암살 저격 작전을 위한

11명의 1차적 위장 자살 작전은 

과거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일어날수 있는

극단적으로 경악스러운 인명 경시 사상에서 기인된 형태라고 볼수 있었다.  

당시 이들이 침투하여 대한민국에 끼쳤던 국가적 피해와

특히 강원도민에게 끼친 경제적 피해는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였다.

 

49일동안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던 북한 잠수함 및 무장간첩 침투사건은

남북간 경제 협력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터졌다는 점에서

대북경계심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안보에 중대한 "구멍"이 뚫려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침투한 무장간첩 대다수를 사살,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음에도

작전과정에서 드러난 군지휘부 혼란,아군간 오인사격,민간인 희생 등은

군의 대북경계태세에 대수술이 필요함을 입증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은 북한 잠수함과 26명의 무장간첩이 일시에

우리 영해를 제집 드나들 듯이 했다는 점과 작전과정에서 보여준

 군의 허술하고도 안이한 대응태세에 엄청난 실망감을 안았다.

49일 동안의 작전에서 아군측 사망자는 모두 15명.대령 1명을 포함한 9명의

 군인과 경찰 예비군 각 1명 등 11명의 군경이 전사했고 민간인도 4명이나 사살됐다.

아울러 영동 지역 6개 시.군이 작전지역에 포함돼

관광객감소와 농어업손실및 요식접객업소 매출 감소로

 총 2천억원대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었다.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일지

 

 

1996년 9월14일 05시 북한 잠수함 26명 태우고 함남 퇴조항 출항
15일 21시 강릉 해안에 공작원 3명, 안내원 2명 상륙
17일 23시 잠수함 좌초 
18일 01시 잠수함 버리고 상륙
18일 01시35분 택시기사 이진규씨 좌초 잠수함 신고
18일 03시40분진돗개 하나 발령
18일 16시30분 청학산에서 간첩 11명 자살 주검 발견
18일 16시40분 간첩 이광수 생포
19일 10시15분 단경골에서 간첩 3명 사살
19일 14시10분 칠성산에서 간첩 3명 사살
19일 16시10분 괘일재에서 간첩 1명 사살
22일 01시30분~06시40분 칠성산에서 간첩 2명 사살
28일 06시45분 강릉시 성산면에서 부함장 유림 사살
30일 15시18분 강릉시 묵계리에서 기관장 만일준 사살
10월 5일 10시30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야산에서 정찰조 2명 사살

 

 

 

강릉 앞바다에 침투하여 후진중 스크류가 암초에 파손되어 좌초된 북한의 유고슬라비아제 소형 잠수함

 

 

 

 

 강릉 해안에 좌초된 무장간첩 잠수함을 조사하고 있는 해군 장병들- 1996년 9월 19일

 

 

 

 

강릉 앞바다로 침투하여 내륙으로 도주한 북한 무장 공비들을 뒤쫒는 육군 제23 보병사단의 특전사 장병들 - 1996년 9월

 

 

 

 

 

야산으로 도주하여 국군 특전사 장병들과 교전을 벌이던중 사살된 강릉 잠수함 침투 공비들

 

 

 

죽음과 함께 사라져간 음모: 이들은 저격조 3명을 상륙시킨 뒤 잠수함을 타고 북한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작은 사진은 생포된 간첩 이광수

 

 

 

생금된 강릉 침투 간첩 이광수 - 그는 대한민국의 군인이 아닌 경찰들한테 생포되었다.

 

 

 

1996년 9월 잠수함을 이용해 강릉에 상륙한 무장 공비는 10월7일 김영삼 대통령이 춘천에서 개막된

전국체전 개막식에 참석할 경우 저격할 목적이었음이 드러났었다.

 이러한 사실은 안기부에서 신문을 받고 있는 생포된 공비 이광수의 진술을 통해 밝혀진 것으로,

얼룩무늬 아군 복장으로 위장한 저격조 3명이 총번과 제조국 이름을 지운

 M16 소총으로 저격 임무를 수행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저격조가 상륙한 후 승조원과 잠수함은 북한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좌초 사고가 발생해 전원 상륙하게 되었다고 당시 이광수는 밝혔었다.

이러한 사실을 전한 정부 소식통은, 안기부가 이광수의 진술 내용이 사실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북한 인민무력부가 대변인과 판문점 대표를 통해

 ‘백배 천배로 보복하겠다’는 위협을 계속하자,

10월2일 국방부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발령했다고 한다.

 

 

 

 

1996년 강릉 앞바다에 침투했던 북한 무장공비가 소지하고 있던 식량 및 무기류

 

 

1996년 9월 18일 강릉 바다에 간첩활동을 위해 남하했던 북한의 잠수함이 난파당했다.

 당시 26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했고 택시 운전기사의 간첩 신고 후

50여일이 가까이 흘러 무장공비는 소탕되었다.

우리 군의 무장공비 수색작전을 통해 남하한 북의 무장공비 총 26명으로

 주민의 신고로 1명은 생포되었고,

잠수함 난파의 책임을 물어 사살한 듯한 집단 자살 11명과 수색 도중 교전으로 인해 13명이 사살되었다.

 나머지 1명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어서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또한 우리군 11명과 경찰·예비군 각 1명, 민간인 4명이 희생되는 인명피해를 당했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강릉에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한지 15년이 흐른 지금,

 생포된 무장공비 이광수는 전향해서 해군의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반면 큰 부상을 입었던 이종갑은 군대 전역 후 일정한 직업없이 상이군경회 회원으로 소속되어 있다.

전향해 북의 정보를 제공하는 간첩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장공비와 싸우다 부상당했지만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 상이용사,

결과만을 놓고 봤을 때 국가는 형평성이 맞지 않는 대우를 하고 있다.

 

 

 

 

 잠수함 침투사건 1년 뒤 인터뷰 당시의 이광수씨

 

 

 

 

해군 교육사령부에서 교관으로 활동 중인 이광수

생포된 이광수는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당시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3기지 22전대 잠수함 조타수로 활동했다.

 이광수는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 마을에서 농가에 출몰해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 2명에게 붙잡혔다.

그 당시 이광수는 170cm의 키에 38구경 권총 1정과 실탄 9발을 휴대하고 있었고,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이었다.

이광수는 조사를 통해 동해안에 침투한 간첩단이 모두 20명이 넘는다고 밝혔고,

 이후 남으로 전향의사와 함께 해군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1997년 해군 5급 군무원으로 특채로 선발되어 해군교육사령부의 교관으로 근무,

 해군 정신교육 교관으로 현재도 북한군의 편제와 실상 등을 가르치고 있다.

 1999년에 부인 임모씨를 만나 해군사령관 주례로 결혼식을 올려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다.

또 박재규 경남대 총장의 권유로 1999년 경남대 법행정학부에 입학해 편입을 권유받았지만

 남한사회의 젊은이들과 어울려 캠퍼스 생활을 하기를 원해 1학년으로 입학,

 2003년 학사모를 썼다.

이후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안보정책학을 전공해 석사학위까지 받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5년 이광수 씨가 경남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을 때의 모습

 

 

 

가족과 함께 찍은 이광수씨의 졸업기념사진

 

 

침투사건 당시 잠수함 조타수였던 이씨는 동해안 침투사건 이후

 전향의사와 함께 해군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1년 뒤 해군에 특채로 들어가 해군교육사령부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경남대 박재규 총장의 권유로 99년 경남대에 입학해

지난 2003년 2월 법행정학부를 졸업한 뒤 2년여만에 다시 석사학위를 받게 됐다.
이씨는 "대학에서 북한에 대한 시각과 지식 등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며

"북한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북한 관련 전공을 살려 더 공부해 보고 싶다"고

여전히 식지 않은 학업에 대한 열의를 보였었다.

그는 "처음에는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친구도 없어 외로워 여러번 방황도 했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도 많이 사귀게 됐다"며 "

자신과 같은 탈북자를 만나면 학교에 가라고 권유한다"고 말했다.
해군정신교육교관으로 장병들에게 북한군의 편제와 실상 등을 가르치고 있는

이씨는 지난 1999년 4월 임은경(33)씨와 만나

해군사령관 주례로 결혼식을 올려 현재 두 딸을 두고 있다.

 

 

 

 

 

 

 

이종갑씨 - 2011년 8월

 

 

1996년 9월 강릉에 침투했던 무장 공비들과 교전을 벌이던중

 

간첩들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던 이종갑씨의 총탄 관통상 상처 

 

 

 

이종갑 - 무장공비와 교전 중 얻은 상처…영광 대신 냉대와 차별뿐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강원도 일대는 초 긴장상태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종갑은 군 생활 18년 중 10년을 대북침투조를

양성하는 북파공작원(HID)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 당시 육군 3군단 정보분석장교로서 북한군의 이동경로를 예측하고 대응책을 짰다.

공수부대와 특전사, 특공여단이 저격조로 나섰고 군인과 예비군 수천명이

칠성산, 홍천, 오대산 등 강원도 일대를 누볐지만,

북한군 2명은 포위망을 교묘히 피해 다니며 민간인까지 피해를 입혔다.

 

1996년 9월 무장공비 도주 경로 표시

 

 

 

 

 

 

 

이종갑은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에 출동해 탄피를 분석하던 중

숨어있던 북한군에게 3발의 총격을 당했다.

한발은 왼팔 윗부분을 관통했고, 두발은 팔꿈치 아랫부분을 스치는 중상을 입었다.

북한군 2명은 뒤쪽에서 덮쳐오던 특전사 요원에게 사살 당했다.

이종갑의 부상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심해,

 오른다리 정강이 뼈를 잘라 왼팔에 붙이고 혈관도 이식했지만

뼈와 근육을 간신히 연결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지금도 살은 여전히 움푹 파여있고 왼팔과 왼손가락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병원에서 1년 정도 치료를 받은 이종갑에게 육군은 치료기간이 길어져

소속부대가 바뀌었다는 통보와 함께 관사 퇴거 명령을 내렸다.

졸지에 가족은 떠돌이 신세가 되었고, 병원비 마저 일부는 본인이 부담하고

몇 년이 지나 할부로 나눠 받는 방식이 취해졌다.

작전 종료 후 40여명이 훈장, 20여명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나,

정작 사지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참모총장 표창에 그쳤다.

이 뿐만 아니라 용대리 교전 현장에는 장병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지만

기념비 안에는 부상자들의 이름은 없다.

 살아남은 부상자들은 공로는커녕 무관심으로 대해졌다.

   

 

 

잠수함 침투장소가 보이는 곳에 설립된 건립취지문 


강릉간첩사건 이듬해인 1997년에는 중령 진급심사가 있었다.

이종갑은 전상을 입었고 최우수 교관으로 선정되는 등의 촉망받는 인재로 진급심사 대상이었지만

 비주류인 3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에 실패했다.

차별과 냉대, 희망이 없는 군이라고 느낀 이종갑은 1997년에 전역하고

5년여 동안 10개 가까운 직업을 전전했다.

그가 거쳐 온 직장 중에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서서 구해준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그나마 군인연금과 상이연금,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보도에 따르면 이종갑과 이광수와의 너무나도 대조적인 처지에

 억울하지 않냐는 인터뷰에서 이종갑은 “그런 생각은 단 한번도 안 했다.

그도 나도 각자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고 말하며,

“손자병법에 ‘천일양병, 일일용병(千日養兵, 一日用兵)’이라고 했다.

 결국 군인은 한 번 싸우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몸을 바쳤기에 침투한 무장공비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망신창이가 된 부하를 내팽개치면 어떡하나.

 더 이상 나 같은 군인은 없어야 한다”는 말은 꼭 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베일에 감춰진 북한의 정보를 제공한 이광수에게 그만한 배려를 해준다면

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기여한

대한민국의 상이용사들에게도 걸맞은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