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나치의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학살 만행[Nazis Genocide in Belarus & Ukraine]

슈트름게슈쯔 2012. 9. 13. 15:44

 

 

1941년 벨로루시 민스크 의 유태인 분리 격리구역  게토(Ghetto)

 


     2차 세계대전시 나치가 계획한 유태인 인종말살 정책에 따른

동유럽의  유태인 격리구역 게토의 지도

  

 

 

 

  

      민스크 시내의 유태인 게토 구역

 

 


  1941년 민스크 의 포로수용소- 이들은 민스크 게토에서 봉기하다 잡힌 유태인들이다. 
  
1941년 8월 14일 과 26일 31일에 강제노동에 동원된 5000여명의

 유태인들은 처형되어 사라져버렸다.

히믈러는 민스크 게토의 봉기군 수용소를 시찰하러 나온뒤  

그를본 유태인 목격자 100명을  본보기로  사살시켰다. 

 

 

  

 

 빌헬름 쿠베


 1941년 8월31일의 벨로루시 민스크에서의 인종범죄자 빌헬름 쿠베의 모습이다.

빌헬름 쿠베는 아돌프 아이히만, 하인리히 로스와 더불어

나치유태인 인종말살정책의 대표적인 3인방으로

1943년까지 독일군을 동원하여 민스크지하 레지스탕스대원과

시민을 인질삼아 본보기로 1000여명을 살해했다.


 1942년 우크라이나 키에프시 인근 사릭 Sarig의 

독일군에 협력하는 우크라이나 괴뢰경찰 

 

 

 

 

 1942년10월 14일 우크라이나  미조크(Mizoch) 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학살한 독일군의 만행


 

우크라이나 미조크(Mizoch) 의 위치

  

 


독일군의 유태인 인종정책은 점령지 우크라이나 에서도 예외가 될수 없었다. 
이들은 가슴에 유태인을 상징하는 육각표시 별을 달고서

노예처럼 강제노동에 동원되었고 이후 대부분 희생되었다. 

 

 


1942년 9월18일 민스크 시로카야 거리에서 소비버수용소로 이송되는  소련군 포로

 

 

- 소련군 포로였던 알렉산더 페체르스키와 알렉산더 슈바예프는

소비버 소련군 포로수용소 4동 에서 비밀리에 봉기를 도모하여 

독일군보초와 장교를 차례차례 살해하고 도주하여 80여명이 탈출했다.

이들은 이후 대부분 생존했으며 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 강제수용소를 탈출하여 생존한 유일한 역사를 남겼다. 
소비버 수용소는 폐쇄 될때까지 6000여명이 가스실에서 희생되었다.

 


 나치 독일군의 양민 학살 특별행동조((Einsatzgruppen)의 인종 범죄에 의해 

학살당하는 우크라이나 이반고로드 지역의 유대인들- 1942년 


 죽는 순간까지도 아기를 살리려고 앞으로 끌어 안고 있는 우크라이나 여인의 처절하고도 숭고한 모성애를 느끼게 만든다.


이 사진은 동부전선에서 독일 본토로 보내어지는 독일군의 우편 차량을 저지시켜 탈취한 

폴란드 레지스탕스 대원이 독일군의 우편물 속에서 발견하였다. 





 1942년  노예처럼 강제노동에 부리기 위해 독일로 실려가는 젊은 벨로루시 여성들


 

 

  1944년 숲속에 방공호를 마련하여 기거하는 벨로루시인 파르티잔 가족



  

1943년 민스크 인근에서 처형된 벨로루시인들

이들은 파르티잔들에게 동조하지 않은 비 파르티잔Anti Partisan)이었다.

 

                 


     동료 여성의 밀고로 나치에게 잡혀  (파르티잔에 동조한 죄로 죽는다 ) 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파르티잔에 동조한 죄로

교수형을 당하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마샤 브루스키나

  

 


마샤 브루스키나의 교수형 장면 사진

 

먼저 교수형을 당하여 목메달린 마샤 브루스키나옆에서 

나치 독일 장교에 의해 목에 밧줄이 매달리는 빨치산 여성 동료의 

처절한 절망감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공포에 찬 얼굴 표정의 

이 유명한 한컷의 사진은 

미국 샘 페킨파 영화 감독의 전쟁영화 

크로스 오브 아이언(Cross of Iron) 앞부분에도 삽입이 되기도 했으며 

 2차 세계대전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사진중의 하나가 되었다.





  17세의 나이에 파르티잔 에 협력한 본보기로 나치에 의해

 목 매달려 희생되었던 마샤 브루스키나



 붉은군대(Red Army) 의 1944년 벨로루시 반격


              

           

 1944년 7월 소련군의  여성 저격병


 

 1944년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벨로루시

 


 

 1944년 민스크의 해방을 위해 독일군과 싸운 벨로루시 여성 파르티잔들

 

 


   침략자의 명암 - 1944년 소련군에 의해 벨로루시 민스크 시내를

 

 항복군의 행진을 하는 독일군 전쟁로로


1941년 동부유럽의 국가들은 점령군 독일의 또다른 세력인 악명높은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게 가혹하고 처절한 인종범죄를 당해야했다.
점령지의 유태인들은 모조리 색출되어  격리되었으며

노동력 제공이 가능한 젊은층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살 당했다.
또한 독소전에서 잡혀온 러시아의 전쟁포로및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의 젊은 노동인력을 대거

독일의 군수품공장에 사역 목적으로 강제로 차출되어 독일 각지로 송출되었다.
 벨로루시에서는  민스크 게토가 제일 대표적인 유태인집단 격리지역이었다.
이곳에서는 처음부터 저항이 없었던 폴란드와는 달리 게토로

유태인들을 격리후 곧바로 유태인들의 봉기가 일어났는데

독일군은 1941년 8월 보름기간동안 이곳에서 5000여명의 유태인들을 학살시켰다. 
독일군은 민스크에서 파르티잔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민간인들도

전시 파르티잔 동조 본보기로 대단위로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독일군의 만행으로 반감을 가진 벨라루시인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파르티잔에 가담하게된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3년기간동안 벨라루시가

소련군에 해방이 되기전 까지 약 50여만명의 벨로루시인들이

파르티잔에 가담하여 철로폭파와 후방교란의 게릴라전으로 활약했다.
벨로루시의 파르티잔들은 1412일 동안 독일군을 상대하여 벌였던 전투로

  독일군 11128명을 사살시켰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제일 잘 알려져있는 악명높은

나치독일의  유태인 집단학살의 사례는

1942년 10월14일에 자행된  Mizoch 에서의

유태인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었다.

 

 



 

  

 1985년 소련 엘렘 클리모프 감독이 제직한 영화 Come & See에서

 나치 독일군이 점령한 벨로루시에서 양민 학살을 자행하는 장면

 

 

photo from : deathcamps.org

                     belarusguide.com

                                    holocaustresearchproject.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