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크림반도 케르치의 통곡[WW2 Ukraine Crimea Peninsula Kerch City parents lamentation]

슈트름게슈쯔 2013. 1. 4. 18:49

 

 

 

이 장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아들의 시체를 보며 오열하는 우크라이나  여인의 모습이며

이 사진은 독소전쟁을 대표하는 유명한 사진중의 한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흑해 크림반도 동부의 케르치 시 인근의 장소이다.

1941년 말기 이 지역을 침공한 독일군과 자기 나라를 지키려던 소련군과의 전투가 벌어졌었다.

양측의 치열했던 전투는 결국 소련군의 패배에 따라1942년 5월 독일군이 이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자식의 주검을 보며 비탄에 잠겨 오열하는 우크라이나인 부모 - 1942년 4월 4일

 

 

 

 

 

 

 

 

 

 

독일군에 의해 학살 당한 가족들의 사체를 보며 오열하는 게르치의 우크라이나 남성

 

 

 

 

부모는 언제나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며 걱정을 하기도 한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며 느끼는 걱정중에서 가장 큰 걱정중의 한가지는  

바로 자식이 부모보다 일찍 죽는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자식을 걱정했던 부모의 한사람으로 유명했던 사람중의

 한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있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 제도의 꽃을 피웠던 정치가 페리클레스였지만  

그가 겪었던 최대의 인간적인 고민은 자식을 잘못 가르친 것이었다.

그의 아들 크산티포스는 아버지의 엄격함을 견뎌내지 못하고 많은 사고를 저지르고 다녔다.

한번은 크산티포스가 타인에게서 많은 돈을 빌려서 써버렸다.

채권자가 페리클레스에게 자식이 빌려간 돈을 갚아 달라고 하자 페리클레스는 돈을 갚기는커녕 그를 혼내서 돌려보냈다.

이 일이 있은 후 아들은 공공연히 아버지를 욕을 하고 다녔고,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 페리클레스가 정을 통했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다.

페리클레스는 지독히 자식 복이 없었다.

가장 사랑했던 막내아들도 전염병으로 죽었고  페리클레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였다. 

페리클레스와 절친했던 어떤이는 그에게  자식을 잃는 슬픔을 경험할까 두려워

나는 자식을 두지 않았다고 했었다 한다.

전쟁은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킨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살펴보면 외세의 침략과 동족들의 갈등에 의한

대량 살륙의 학살이 너무나도 많았다.

조선을  불법적으로 침략한 일본에 대항하다가 일본 군대에 참혹하게 학살당한 우금치 전투의 동학군들및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 독립군 출몰 지역 주변 마을에서 일본군들에 의해 철저히 학살당한 조선인들과

3.1운동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과 일본의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앙심을 품고 일본인들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는 폭도의 오명을 씌워 학살당한 조선인들과

한국전 6.25 동란 당시 한반도 남한을 기습 침략하여 북한 공산군들에게 가족을 학살당한 무고한 양민들과

6.25동란의 영향으로 파생되어 발생했던 거창 양민학살사건및 제주도 양민학살 사건과 마산 진동 양민학살등과

그리고 군부 쿠데타의 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쿠데타 군 수뇌의 명령으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동족에 대한  

무차별 발포에 의해 가족들을 학살당한 국민들을 떠올릴수 있다. 

이렇듯 불의에 의해 가족과 형제,자식울 잃은 깊은 슬픔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은

동병상련의 지정과 같이 상대적으로 나마

타인의 그러한 슬픔을  진정 이해하고 아픔을 헤아려 줄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 흑해에 위치한  크림반도는 수세기 동안 전쟁터로 그 이름이 유명한 지역이었다.

1974년 마산성호국민학교 5학년 시절 마산 성호동 철길옆에 살았던 독서광이자 책벌레였던

성호68 이진우는 방과후 과외 시간에 박재진 선생님집에서 항상 우스개소리로 크림전쟁을 아이스크림 전쟁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크림반도하면 우선 1853년 러시아제국과 그 반대 세력이었던 오스만 투르크 ·영국 ·프랑스 · 프로이센,사르디니아

연합군이 크림 반도와 ·흑해를 둘러싸고 일어난 크림 전쟁을 떠올릴수 있으며

크림전쟁 당시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간호 해준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을 떠올릴수 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수상과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의

연합군 수뇌부들이 모여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 구도를 비밀리에 회담한 크림반도의 얄타회담을 떠올릴수 있다.

또한 소련이 붕괴되고 옐친 대통령의 러시아가 다시 탄생될때

소련 공산주의의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휴가를 즐기던 휴양지였던

흑해 연변의 크림반도에서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휴양 도시인 소치를 떠올릴수도 있다.

하지만 독소전쟁사나 2차 세계대전사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겐

크림반도 하면 흑해의 군항인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킨 독일 만슈타인 원수의 거포 동원 포격과

흑해에 딸린 내해이자 크림반도 옆의 바다인 아조프해 입구에 있는 케르치에서

벌어진 독일군의 잔혹한 우크라이나 케르치 양민 학살을  떠올리게 한다.

독일군이 자행했던  게르치의 양민 학살로 인해  목숨을 잃고 땅바닥에 버려져 있는

자식을 쳐다보며 오열하는 한 여인의 모습은

인류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의 깊은 슬픔을 느끼게 만든다.

아이러니한 이야기 이기도 하지만 어떤이는 크림반도의 케르치라 하면

바닷물고기 게르치를 연상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연해에서 낚시를 할 경우 수십개의 낚시 바늘에 미끼를  줄줄이 달아 놓고

수심이 깊은 바다밑으로 줄낚시를 던져 잡는 어종이 있다.

그것은 주로 수심이 깊은곳에 서식하는 열기,볼락,게르치등인데

게르치는 대한민국의 연안에서 비교적 깊은곳에 서식하는 심해어 어종이다.

이 게르치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케르치는 발음이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명사로 물고기와 지명의 이름인 것이다.

 

 

 

 

 

 

photo from : World War II in Pho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