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1972 리처드 닉슨과 마오 쩌둥과 조우 언라이의 조우 [1972 Richard Nixon & Máo Zedong & Zhou Enlai an encounter]

슈트름게슈쯔 2013. 3. 3. 13:52

 

 

마오 쩌둥과 리처드 닉슨 - 1972년 2월 21일

 

1972년 2월 21일 미국의 닉슨대통령은 20여년 지속된 미국과 중국

 

양국 사이의 냉전을 끝내고 수교를 위하여 전격 중국을 방문했다.

 

 

 

 

 

 

1972년 2월 21일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미국 대통령은 그의 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와 같이 공산국가 중국과 관계를 회복하고

두 국가간의 수교를 체결 하기 위해서 베이징을 방문하게 된다.

실리주의 외교를 추구한 미국의 중국 방문 사건으로 인해

공산진영은 소련과 중국을 양대 축으로 공공연하게 갈라서게 된다.

그야말로 미국 닉슨 대통령의 중국에 대한 문호 개방정책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것은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과 미국의 관계 개선은 중국-북한 공동 투쟁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었고,

남한의 박정희 정권에게도 닉슨의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1971년 초 미국이 베트남 주둔군을 단계적으로 철수 시키고,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6만2천 명의 주한 미군중에서 2만 명의 병력을 을 감축시키자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신뢰에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양측의 불안으로 인해 북한 김일성은 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를 환영하는

 평양 대규모 집회에서 남조선의 전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과 만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게 되고,

그 직후 남한은 남북 적십자 회담을 제안한다.

북한은 이를 즉시 수락했다.

 

 

 

 

조우 언라이와 닉슨의 마오타이주 건배

 

 

닉슨과 마오쩌둥의 역사적 만남으로 죽(竹)의 장막에 갇혀 있던

중국이 처음 세계에 얼굴을 내밀 때, 그 현장에는 마오타이주(茅台酒)가 있었다.

닉슨의 중국 방문 작업을 준비했던 보좌관은 “마오타이주를 직접 마시면 곤란하다.

건배 제의가 있더라도 입에 갖다 대는 시늉만 하라”고 건의했지만,

 닉슨은 얼굴을 잠깐 찡그린 뒤 술을 다 마셨다.

 마오 쩌둥이 홍군을 이끌고 대장정을 할 때 마오타이주의 고장인 마오타이진 주민들은

홍군에게 이 술을 건네며 장정의 고단함을 달래주었다.

 

 

 

 

항저우 서호루(西湖樓)를 찾은 조우 언라이와 닉슨 대통령 부처 - 1972년

 

 

미국의 전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조우 언라이 총리는 닉슨 대통령을 항저우 서호가에 있는 유명한 음식점

서호루(西湖樓)로 초대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 투명하게 반짝이는 왕새우 위에 초록색의 찻잎 몇 점이 싱그럽게 놓여 있는 요리가 올라왔다.

그 맛을 본 닉슨대통령은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요리는 바로 널리 이름난 항저우의 특선요리  용정하인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중국 만리장성에 발을 디딘 미국의 대통령 이었던 리처드 닉슨 - 1972년 2월

 

 

 닉슨과 조우 언라이에 대한 만리장성 방문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닉슨 대통령이 중국에서 같이 탁구 경기를 관전하던중
갑자기 조우 언라이가 자리를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었다.

  그래서 닉슨 대통령이 조우 언라이 총리에게 어디를 다녀오셨나요?
라고 물으니 “내일 귀하께서 만리장성을 가신다고 하니,

그쪽에 쌓인 눈을 미리 치워 놓도록 조치를 하고 왔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미국의 제37대(재임 1969~74)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1913~94)은

많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업적에 비해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명이다.

일례로 2008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그때까지의 역대 미국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평가 순위에서

닉슨은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과 함께 공동 37위를 기록해

여느 여론조사에서와 다름없이 ‘워스트 텐’(Worst 10) 명단에 그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닉슨은 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1953~61)한 뒤 대통령 재선에도

 성공한 유일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또 첫 재임기간에는 베트남전쟁을 종결시키고 중국과 구(舊)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끈 업적으로 1973년 재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1969년 발표한 그의 대아시아 외교 정책은 닉슨독트린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을 포함한 세계에 널리 알려지며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의 전도를 결정적으로 망친 것이 앞서 말한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974년 8월9일 대통령직에서 떠난 닉슨은

그 후 내내 미국 역사상 초유의 임기 중 사퇴라는 불명예의 멍에를 지게 된다.

닉슨은 1913년 캘리포니아 주 요르바 린다에서 출생했다.

휘티어대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뒤 듀크대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1937년 캘리포니아에 돌아와 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에 지원해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군에서 그는 활약을 인정받아 소령까지 진급했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