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엉덩이가 유난히 큰 아프리카 남부의 호텐토트족 여성[SouthAfrica Hottentot Tribe Woman,s Big Hip]

슈트름게슈쯔 2013. 2. 6. 17:36

 

 

 

남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굴 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여성을 묘사한 토우

 

  

 

이탈리아에서 출토된 선사시대의 토우

 

 

 

엉덩이가 유난히 큰 선사시대의 토우

 

 

 

엉덩이가 매우 큰  고대 이집트의 여인상

 

 

 

엉덩이가 큰 여인을 묘사한 이집트의 벽화

 

 

 

 

 

 

19세기초 아프리카의 호텐토트족 여성을 묘사한 그림

 

 

 

 

호텐토드의 비너스라 불리웠던 호텐토트족 원주민 여성 바트만

 

 

 

 

 

 

 

 

어린애  한명을 넉넉히 태울수 있는 호텐토트족 여성의 엉덩이

 

 

 

호텐토트족 여성의 체형

 



호텐토트족은 나미비아 남부에 사는 유목민족이다.
부시맨족과 같이 설타음(舌打音)이라고도 하는 흡착음(吸着音)을

 흔히 사용하는 코이산어족에 속하는 말을 쓴다.
부시맨과 호텐토트는 신체의 특성, 언어, 문화 등 3요소가 아주 비슷한데
부시맨은 채집·수렵, 호텐토트는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 방법으로 구별된다.
일찌기 동·중앙·남아프리카에 널리 분포되었던 부시맨이 15세기 무렵까지 남하해온
반투족의 압박을 받아 남부아프리카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반투족과 융화하여
소를 유목하는 동시에 사회조직까지 동화된 일부가 호텐토트로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호텐토트는 일찍이 남부아프리카 서해안에 널리 살고 있었으나

17세기 이후 백인의 침입으로 인구가 급감되었고,
경제·사회도 거의 전통적 형태를 남기지 않았다.
현재 가장 순수한 모습을 갖춘 부족이라 인정되는

나마 호텐토트가 나미비아를 중심으로 약 2만명이 있고
나머지는 절멸되었거나 케이프컬러드라는 혼혈그룹에 흡수되었다.
호텐토트란 보어어로 <말더듬이>라는 뜻이며,

스스로는 <인간 중의 인간>이란 뜻을 지닌 코이코인이라 자칭한다.
부시맨보다 약간 키가 커 남자의 평균신장은 160㎝이다.
여자는 지방둔(脂肪臀), 소음순(小陰脣)이 기형적으로 늘어진 것이 특징이다.
강수량이 적은 반사막고원지대에서 소로 유목생활을 하는데,

 남자는 가축의 사육관리를, 여자는 젖짜는 일을 맡는다.
유제품을 주식으로 하며 수박·옥수수·콩 등도 재배한다.
나마·코라나·고나·그린가 등 4부족으로 나누어져 각각 몇몇 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친족의 조직화는 약하고 정치조직도 간단하며 수장도 큰 권력은 없으며, 최종 결정은 장로회의에서 한다.
일부일처가 원칙이지만 일부다처도 많다.
수원이나 목초지는 부족에 의해서 통제된다.


 


호텐토트족 원주민 Steatopygia

 

 


19세기 영국인들에게 보여진 호텐토트족 여성을 묘사한 삽화

 

 

 

 

호텐토트의 비너스(Venus Hottentot)라 불리며 19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에서 전시되었던 소위 인간 예술품이 있었다.
그녀는 세례명이 사라 바트만이라 불리운 나미비아의 흑인 원주민 여성이었다.
그녀는 노예로 팔려 영국으로 건너간 후 발가 벗겨져

여러 도시에서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특별히 큰 엉덩이와 대음순을 가진 흑인 여성 전시는 엄청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호텐토트는 열등하다는 뜻의 네덜란드어 이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우수한 원숭이 정도로 생각했다.
이런 차별적 인종주의가 끔찍한 인종 청소 전쟁을 벌이게 만들었다.

 나미비아(Namibia)는 아프리카 남단 대서양 연안에 있는 국가이다.
나미비아라는 나라 이름은 길게 뻗은 나미브 사막에서 유래했다.
19세기 초반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는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탐욕의 대상이었다.
많은 독일 사람이 나미비아로 몰려들었다.
독일인들은 1892년에 이르러 나미비아 영토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땅을 합병했다.
땅을 차지한 독일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이 땅을 차지하고 착취를 시작했던 시기가 공교롭게도 3차에 걸친 대가뭄 시기와 겹쳤다.
대기근으로 아시아 전역과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약 3000만∼5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어 갔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기근과 가축 페스트(당시 아프리카 열대지방 가축의 95%가 죽었다)에 맞서 싸워야 했다.
천연두·인플루엔자·모래벼룩·체체파리·메뚜기 등이 극성을 부렸다.

 독일인들은 나미비아에 살고 있던 헤레로족을 목초지에서 쫓아냈다.
가축 페스트가 번지면서 그들의 전 재산이자 생명이라 할 수 있는 25만의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원주민들은 독일인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노예로 팔거나 죽여 버렸다.

 헤레로족의 대추장이던 마하레로(Maharero)는 원주민들에게 독일인에게 대항해 싸울 것을 호소했다.
1904년 1월 12일 헤레로 부족은 독일인을 습격했다.
독일 농장들을 습격해 약 100명의 독일 거주민을 죽였다.
그러자 독일은 강제 진압을 결정했다.
1904년 6월 독일은 트로타(Lothar von Trotha) 장군이 지휘하는 진압부대를 파견했다.

 병력과 무기에서 전연 상대가 되지 않자 헤레로족은 가족들과 소들을 끌고 물이 있는 산인 워터버그 산으로 퇴각했다.
독일은 서두르지 않았다.
사막기후에 속하는 나미비아는 낮에는 기온이 40도 이상 올라가는 무더위를 보인다.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면서 일교차가 30도 이상 보일 정도로 춥다.

 “몇만 명이 물과 식량이 부족한 좁은 지역에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저항하는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날씨가 우리에게 승리를 줄 것이다.
좀 더 기다렸다가 일격에 쓸어버리자.” 트로타 장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으면서 몇 달을 기다렸다.
그의 예견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무더위와 추위, 가뭄과 기아에 전의를 상실한 헤레로족은 싸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단 몇 차례의 전투 끝에 헤레로족은 항복하고 말았다.
트로타 장군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헤레로족을 사막으로 내쫓았다.
이로 인하여 헤레로족은 대부분이 기갈(飢渴)로 죽어 갔다.
8만5000명의 헤레로족 사람 중에서 겨우 1만5000명만 살아남았다.
독일에 의한 민족 살해 정책이 잔인하게 진행됐던 것이다.

 1998년 독일 대통령 헤르초크(R. Herzog)가 나미비아에 국빈으로 방문했다.
나미비아 민족운동가들은 헤레로족에 대한 민족 살해를 근거로 보상을 요구했다.
독일 대통령은 한마디로 보상을 거절했다.
역사는 잔인한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힘이 없는 민족은 그저 서러울 뿐이라는 것을.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로 치닫던 1907년, 대한매일신보가 울분을 담아 보도했던 '조선동물'사건이 있었다.
이해 5월 일본 도쿄에서 '메이지(明治) 40년 박람회'가 열렸는데,
전시장 내 조선관에는 살아있는 조선인 남녀가 '진열'됐다.
조선인 유학생들이 상투를 튼 남성과 치마.장옷차림 여성이 희귀동물인 양
전시된 데 격분해 본국에 알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일본인들은 박람회장을 나오면서 "조선동물 2개가 있는데 참 우습더라"며 낄낄거렸다는 것이다.
당시 서양이나 일본에 조선인은 미개인으로 비쳤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제3회 올림픽대회에서는
'인류학의 날'이라는 명목으로 이틀간 번외경기가 열렸다.
미개인들이 근대 스포츠에 잘 적응하는지 알아보자는 취지였다.
아메리카의 수족 인디언, 멕시코 코코파족, 아프리카 피그미족, 필리핀 루손섬의 이골로트족 등이 동원되었다.
경기는 올림픽사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멕시코 인디언 줄리아 파스트라나는 여성인데도 흉칙한 얼굴에 온몸이 털투성이였다.
그는 1854년 흥행사의 꾐에 빠져 구경거리로 미국 땅을 돌다가 런던으로 건너갔다.
인간과 오랑우탄의 혼혈'로 불리며 유럽인의 호기심을 채워주다가 1859년 출산 중에 숨졌다.
그러자 흥행사는 산모.아기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또 돈벌이에 나섰다.
파스트라나는 생존시기를 포함, 1970년대까지 1백10여년이나 노리갯감이 되어야 했다.


1789년 태어난 아프리카 남부 코이코이(네덜란드어로 호텐토트)족 여성 사르지에 바트만(위의 흑백사진)도 비슷한 운명이었다.
튀어나온 엉덩이 등이 영국 의사의 눈에 띄어 1810년부터 유럽의 서커스단.박물관.술집을 전전하다 6년 후 사망했다.
프랑스 과학자들은 '호텐토트 비너스'로 불리던 그녀를 해부하고 유해 일부를 박물관에 전시했다.
코이코이족은 1995년부터 바트만 유해 반환운동을 펼쳐왔다.


AFP통신에 따르면 2002년 4월 29일 2백년 가까이 '인간전시품'으로 모욕당하던
바트만의 유해가 드디어 남아공 정부에 인도 되었다.
남아공은 그녀를 고향땅에 안장하고 기념관도 세울 예정이다.
'조선동물'이나 바트만의 비극이 옛날이나 먼나라 일이라고 만은 볼수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와 다름'에 대한 시야의 편견에서 인종에 대한 집단적,개인적인 차별은
어쩔수 없이 세계 각국에서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는 실정이다.

 

 

 

호텐토트의 비너스 재현 연극

 

 


 

 

 

 

 

철사로 된 심을 넣어 엉덩이 부분이 뒤로 돌출 되도록 제작했던 드레스

 

 

 

호텐토트족 여성의 엉덩이를 닮았던 유럽의 드레스 패션

 

 

 

 

 

 

 

 

 

 

엉덩이가 매우 큰 호텐토트족  여성의 유전인자를 가진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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