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소련군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점령과 공산화 야심[WW2 Soviet Army Occupation of Vienna with ambitious communization Plan ]

슈트름게슈쯔 2013. 1. 12. 21:10

 

 

 

 

 

 

 

 

 

 

비엔나 시내에서 독일군과 교전을 벌이는 소련군 - 1945년 4월

 

 

 

 

비엔나 시내로 쇄도하여 들어오는 소련군의 미제 M-4 셔먼 전차대 - 1945년 4월

 

 

 

비엔나에서 사망한 독일군 병사의 사체 - 1945년 4월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묘비를 바라보는 소련군 장교 - 1945년 4월 비엔나

 

 

 

요한 스트라우스의 묘지에 헌화하는 소련군 장교들 - 1945년 4월 비엔나

 

 

 

 

 

소련군과 대화를 나누는 오스트리아 여성들 - 1944년 4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젊은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소련군 - 1945년 4월

 

소련군은 독일 여성에 대한 극심했던 강간 못지 않게 오스트리아에서도 여성들에게 강간을 자행했다.

 

 

 

 

 

 

소련군과 대화를 주고 받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시민들 - 1945년 4월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점령한  소련군 - 1945년 4월

 

 

 

 

 

전쟁이 끝난후 비엔나의 풍경 - 1945년 5월  

 

 

 

 

 

 

 

 

오스트리아는 현재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한때 국토가 동서로 분단이 되어 있던 국가였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오스트리아는 동부전선에서 독일 본토로 밀고 들어오는 소련군에 의해 

독일로부터 강제 합병되었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가 해방과 동시에 점령되게 된다.

이 부분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영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서부 유럽 국가들의 해방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소위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에게 해방되었던 대부분의 국가들은

 나치 독일과 같은 추축국이자 우군이었던 입장에서 벗어나서

소련측으로 기울어 그제부터 독일에 적이 되어 총부리를 거꾸로 돌렸다. 

그리고 종전후 소련에 의해 해방되었던 국가들은

다시 소련에 의해 공산주의 위성국가로 전락되어 버렸다. 

  

 

1944년 4월 동부전선에서 물밀듯이 쇄도해 들어와  

나치 독일군대를  괴멸시킨 소련군은 오스트리아 국토의 절반 정도를 점령했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후반기 소련군이 점령한 유럽 국가들에 대한

스탈린의 사악한 공산화 야심을 눈치 채고

그를 혐오했었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대단히 우려했던 부분이었다.

늦었지만 다행히 오스트리아의 서쪽은 미군이 점령했었다.

만약 당시에 소련군이 미군에 앞서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점령했었다면

현재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볼수 있다.

 

 1944년 3월 30일 오스트리아에  진입한 소련군은 4월 13일에는 비엔나를 점령했다.

이후 2여년후 1946년 UN협약에 따라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비로소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이 될수 있었던 국가였다.

현재 스위스와 더불어 알프스 산맥의 대표적인 영세중립국인 오스트리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다행히 소련 공산주의 의 영향력에서 벗어날수 있었던 

행운의 국가이기도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은 냉전시대에 기록된 가장 반() 냉전적 정치협상의 산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분할 점령된 동서 냉전의 핵지대를 통일된 정치 공동체로 전환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레너이다.

레너는 오스트리아의 학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구 제정 오스트리아의 가난한 농부의 열여덟번째 자식으로 태어나,

비엔나 대학 재학중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

법사회학자로서도 명성을 얻고  오스트로-마르크시즘의 대표적 우파 논객으로,

 1907년 하원의원으로 시작하여 1919~20년 오스트리아 제 1공화국(1918~1934) 초대총리가 되고,

 1931~1933년 의회의장을 역임하였으나, 1934년 나치 침공 이후 투옥되는 고초를 겪는다.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면, 1차 대전의 종언과 더불어 새로 탄생한 오스트리아 제 1 공화국은

출범 이후 줄곧 정체성 위기에 시달리면서, 극심한 정치적 내쟁(內爭)에 휘말린다.

 특히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어 천주교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검은 진영’과

오스트로 마르크시즘을 표방하는 ‘붉은 진영’은 전국민을 둘로 가르고

극한적인 투쟁을 벌리다가 끝내 시민전쟁까지 일으키는 비극적 상황을 연출했다.

이후 1938년 이 나라는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었고, 얼마 안가서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전세가 연합국 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1943 11 1,

 ..영의 세 나라 외상들이 회동하여 모스크바 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선언에서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야욕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임을 명백히 하였으나,

아울러 전쟁참가의 책임을 얼마간 패전국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유보적 문구가 첨가되었다.

이로써 모스크바 선언은 전후 오스트리아가 처하게 된 특수한 입장을 집약적으로 표현하였다.

이후 1945년 얄타 회담은 위의 모스크바 선언을 재확인하고, 이를 부연하여

‘국민 중 모든 민주적 요소가 광범하게 대표되는 임시 정부의 수립’과 ‘자유선거의 조속한 실시’를 명문화하였다.

마침내 2차대전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1945 4월 중순,

소련군이 연합군 중 가장 먼저 오스트리아 동부 지역에 진입, 수도 비엔나에 이르렀다.

그러자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전전(戰前)의 제 1 공화국의 대표적 정치세력이었던

천주교 보수계와 사회주의계가 기존 조직의 재정비에 나섰고,

군소정치세력의 하나였던 공산당도 유리하게 전개되는 정치상황에 맞춰 독자적 세력구축에 나섰다.

이후 4 27일 레너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위의 정치세력이 함께 참여하는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위의 3(국민당/OeVP, 사회당/SPOe 및 공산당/KPOe)간의 연립정부는 처음에는 소련에 의해서만 승인되었고,

 그 정치적 영향력도 소련군 진주 지역에 한정되었다.

 서방 연합군이 진입한 서부 및 남부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은 당초 레너 정부에 대하여 얼마간 회의적이었다.

같은 해 7월 연합국 4개국은 모스크바 선언에 준거하여 이른바 제 1차 통제 협약을 체결하고,

 이에 의해 4개국 분할지역을 확정했다. 아울러 분할 통제의 정상기관으로 연합국 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연합국의 분할 점령에도 불구하고 레너의 임시정부는 단일의 행정권 아래

오스트리아 전역을 통합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소련 측의 본래 속셈은 사회주의자인 그를 내세워 오스트리아를 공산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제1공화국 초기 수상직을 역임한 경륜을 바탕으로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폭넓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던 레너는 소련의 속셈을 쉽게 간파하고

오스트리아를 공산화의 마수로부터 지키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한 때 적대세력이었던 천주교 보수계의 국민당과 더불어 공산당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임시정부 관할권 밖의 제주(諸州)의 정치지도자들과 감정이입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끝내 레너 정부의 관할권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같은 해 10월 연합국 평의회는 이를 각서의 형식을 빌려 최종 승인했다.

레너의 주도로 연합국의 분할점령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전역을 관할하는 단일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은,

이후 오스트리아가 분단의 단애(斷崖)를 넘어 진정한 독립과 통일로 향하는 주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1945 11 25일 전후 최초의 자유 총선이 실시되었다.

 여기서 보수계의 국민당은 85석을 자치했고, 사회당은 76석을 차지한 반면,

공산당은 예상을 훨씬 밑도는 4석을 얻는데 그쳤다. 위의 3당으로 구성된 연립내각에

수상에는 국민당의 휘글(L. Figl), 부수상에는 사회당의 쉐르프(A. Schaerf)가 선출되었다.

 각료 구성을 보면, 국민당 8, 사회당 6, 무소속 2, 공산당 1명이었다.

소련의 간접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이후 쇠퇴 일로를 걸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47년 공산당은 내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공산당의 탈퇴를 계기로,

국민. 사회 양대당을 축으로 하는 좌우 합작의 대연정(大聯政) 시대가 바야흐로 막을 열었다.

 레너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50년 그가 서거할 때 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전후 국민당과 사회당의 정치지도자들이 보여 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종래의 교조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멍에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중도를 향하여 다가왔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레너는 살아있는 전범(典範)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제1공화국 시대의 치욕적인 시민전쟁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히틀러의 폭정 아래에서 양 진영의 지도자들이 수용소에서 함께 체험한

고난으로부터 새로운 공감대와 교훈을 얻었다.

이들은 이제 극단적인 이념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

 오스트리아의 완전 독립을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은 다짐한 것이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내는 슬기를 터득한 것이다.

당시 양당 지도자들은 종전 후 동구를 석권하면서 동진(東進)을 획책하는

공산주의의 위험한 그림자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이에 강력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유 민주주의를 일종의 상위 이데올로기로 승화시켜야 하겠다는 다짐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당은 종래의 오스트로마르크시즘에서 크게 후퇴하여

온건한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했고, 국민당 역시 종교와 밀착된 교조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

사회적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국민 정당으로 환골탈태 하였다.

1946 2월 오스트리아의 완전독립을 위한 조약체결을 둘러싼

연합국간의 접촉이 시작되었으나,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바로 이즈음 노정객 레너는 오스트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스위스식 중립화안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같은 해 10,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새로운 정강을 발표하면서 중립화 방식을 지지하였다.

국민당도 조심스럽게 중립화안에 대한 선호를 내비쳤다.

그러나 국내 정당들의 의지가 연합국간의 협상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48 2월 이후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국제환경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건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였고,

베를린 봉쇄 역시 연합국 협상 테이블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스탈린과 티토의 관계에도 금이갔다.

이러한 숨가쁜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주위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숱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결국 ‘마셜플랜’에 참여하고

서유럽의 경제통합을 추구하는 구주 경제협력 회의(OEEC)에 가입했다.

 국토의 일부가 소련의 점령하에 있는 나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정치적 결단이었다.

 바야흐로 냉전질서가 정착되기 시작하는 국제적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하여 이 나라가 이념적으로나,

경제정책적 차원에서 볼 때, 분명 서방문화권에 속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하였다.

이처럼 오스트리아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가치정향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소련의 지나친 욕심을 사전에 견제, 공산화 포기로 유도하고자 했다.

레너는 1950 12월 오스트리아의 완전독립과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중립화라는 우회로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1955 5 15, 비엔나의 유서 깊은 벨베데르 궁전에서

오스트리아의 외상 휘글과 연합국 4개국 외상들이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에 서명함으로써

10년의 각고 끝에 오트리아 국민들의 숙원이었던 완전 독립을 성취하였다.

 1955 6 7일 오스트리아 의회는 만장일치로 영세중립을 선포한다.

실로 이 나라는 국난의 위기를 맞아 가장 절박한 시기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를 갖고 있었다.

위에서 밝혔듯이 당초의 소련의 점령군은 사회주의자 레너를 앞세워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이른바 ‘인민전선’으로 전환시켜 오스트리아 공산화의 전위대로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레너는 이 기회를 오스트리아 전역에 걸치는 통일적 행정체제 구축과

정치 세력 간의 합의도를 높이는데 역이용했고,

그의 속내를 보수계와 서방연합군이 바르게 간파하고 그를 도왔던 것이다.

공산당은 중도적 정치공간에서 연립정부의 형태로 구축된 좌우합작 세력에 밀려

끝내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고, 소련은 오스트리아 국가에

공산주의 세력의 전초기지를 세우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