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한국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소달구지[Korean War Refugees OX Carrier]

슈트름게슈쯔 2013. 3. 27. 20:27



한국 6.25 전쟁 발발전 서울 시내의 소달구지 -1948년 10월 




한국 6.25 전쟁 발발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를 지나가는 소달구지- 1948년 10월


 

 

중국 공산군대의 한국전쟁 개입과 유엔군의 1.4후퇴에 따라 피난을 떠나는 피난민들 - 1951년 1월 5일 서울

 

 

 

 

피난을 떠나는 포항 피난민 행렬의 소달구지 - 1951년 8월

 





한국 6.25 전쟁 당시 대구의 소달구지 - 1952년 




한국 6.25 전쟁 당시 부산의 소달구지 - 1952년 




한국 6.25 전쟁 당시 김해의 소달구지 - 1953


 

 

한국전 6.25 동란 직후 시골길의 소달구지 - 1954년 경기도 북부




한국 6.25 전쟁이 끝난지 7년후 다부동 전투가 벌어졌던 

볼링 앨리(Bowling Alley의)를 지나가는 소달구지 

- 1960년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한국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벌어진 전투는 

북한군 전차대를 상대로 벌인 미군 최대의 전차전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은 대한민국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은 국토의 5%밖에 안 남은 대구-부산지역의 공략에 총공세를 펼쳤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지점이 바로 국군 1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다부동지역이었다. 

1950년 8월 3일 부터 8월 29일 사이에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다.

그러나 유엔군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인민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로 진출하려던 세를 꺾어 버린다

다부동 지역은 바로 대구의 북쪽 관문에 해당됐기 때문에 

피아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북한은 이곳에 T-34전차를 집중해 돌파하고자 했다.   

미 8군은 증강된 미 27연대를 증원해 대 전차전을 벌이게 했다.

 미 27연대는 천평동에서 진목동 간의 4㎞의 직선도로인 

이 지역을 볼링 앨리(Bowling Alley : 볼링 계곡)라고 불렀다. 

볼링 앨리라는 명칭은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전차와 대포가 쏜 포탄들이 

이 계곡의 산등성이에서 작렬하는 소리가 마치 볼링장에서 볼링 핀이 쓰러질 때 

발생하는 소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 전투는 북한군 전차가 집단으로 아군에 저항하며 싸웠던 마지막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