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차 세계대전 WW1

타넨베르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Battle of Tannenberg Victory Heroes Hindenburg & Ludendorff]

슈트름게슈쯔 2013. 4. 25. 18:03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힌덴부르크 장군과 루덴도르프 장군 - 1916년

 

 

 

 

1차 세계대전 당시 탄넨베르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힌덴부르크 사령관과  루덴도르프 참모장 - 1917년

 

 

 

 

 

 

서부전선의 지도를 보며 작전을 구상하는 독일 힌덴부르크 장군과

 

카이저 빌헬름 2세와 루덴도르프 장군 - 1918년 9월 28일

 

 

 

루덴도르프 장군과 히틀러와 에른스트 룀 - 1924년 3월 1일 뮌헨

 

 

 

아돌프 히틀러의 후원자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 - 1923년

 

 



 

 

1차 세계대전 당시 동프로이센을 선제 침략한 러시아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타넨베르크 전투의

 

전장을 찾은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루덴도르프 장군과 막켄젠 장군 - 1933년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1군단 프랑수아 장군은 독단적인 행동을 벌인다.

1914년 8월 20일 독일 1군단 헤르만 폰 프랑수아 장군은 러시아군이 접근한다는 보고에

굼빈넨(현 구세프)까지 진출하여 러시아 선봉부대를 격멸하였다.

하지만 야습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약간 뒤로 후퇴한 러시아 2군단은

굼비넨 외각지역에서 밤동안 참호를 준비하고 지형과 건물등을 이용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으며 포병을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3개의 척탄병연대를 보유한 용감한 독일 제국군의 1군단은

더 이상 러시아군을 향해 진격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러시아군의 포격과 사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오히려 러시아군의 측면공격에 노출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또한 러시아 제3군단이 굼비넨 아래쪽으로 전개하며 독일 1군단을 압박하는 상황이 되자

독일 17군단(주6)이 1군단을 구원하기 위해 러시아 3군단을 향해 공세를 취하게된다.

하지만 사전정찰 없이 이루어진 이 공세에서 독일 17군단은 급조되었지만

 잘 만들어진 러시아 3군의 참호 앞에서 무너지고 후퇴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되자 오토 폰 벨로브(Otto von Below, 1857년-1944년) 장군이 이끄는 독일 1예비군단은

독일 17군단의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전진 중인 러시아 4군단을 향해 공세를 취하게 되고

 굼비넨 지역에서의 전투는 혼전으로 흐르게 되며 독일군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전개에 당황한 프리트비츠 장군은 자신의 작전계획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자

참모본부에 타전하여 비스툴라 강 서쪽으로 철수하여 러시아군을 저지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비스툴라 강에서도 러시아군을 저지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내용에 놀란 참모 본부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새로운 참모장으로 임명하고 동부전선으로 파견하게 된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등장은 독일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당시 퇴역하여 고향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몰트케 참모총장의 건의를 받은 빌헬름 2세가 "다시 출근할 의사가 있는가?"라는

짧은 전보를 보내오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동부전선에 부임하게 된다

(이때 예전에 입었던 자신의 군복이 맞지 않아 고생했다고 한다).


힌덴부르크가 전선 사령부에 부임했을때에는 막스 호프만 중령의 작전 계획에 따라 이미 각 부대들은 이동하고 있었다.

힌덴부르크는 비록 자신의 승인을 받지않고 실행에 옮겨진 상태였다.

이때 힌덴부르크는 자신의 승인도 안받은 일개 중령의 작전 계획을 사후 승인하여 그대로 진행하라고 한다.

이것이 독일군의 승리를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


호프만 중령의 작전 계획은 러시아군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분석에 의한 독일군 승리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독일군 스 호프만 중령은 러시아군이 1군과 2군의 간격이 수십 Km에 달해

 서로 원활한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간격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러시아군의 기동로에 위치한 마주리안 호소지대 또한 러시아군의 간격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호프만 중령은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다음과 같은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예하 군단에 하달한다.


북쪽의 렌넨캄프의 1군은 1 기병사단으로 방해작전을 펼치며 견제한다.
독일 1군단과 3예비사단은 20군단의 우익으로 이동시킨다
1군단과 3예비사단의 이동 기간 동안 20군단은 러시아군과의 전투를 최대한 회피하고
17군단과 1 예비군단은 서서히 서쪽으로 철수하다가 러시아 1군의 추격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 지면 이들을 바로 러시아 2군의 격파에 투입한다.

17군단과 1군단은 지도*상에서 보면 러시아 2군의 북쪽이며, 우익에 해당한다.
러시아 2군의 좌익은 프랑소와 군단장의 1군단이 맡았다.
계획대로만 되면, 렌넨캄프의 1군으로부터 독일군의 이동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던

러시아 2군은 (1군 역시 2군으로부터 어떤 정보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말발굽과 같은 독일군 포위망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동부전선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몰트케 참모총장의 지시로 서부전선에서

투입되었던 일부 병력을 급히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 부대가 독일 내 기차 선로 위에서 한참 달리고 있을때 전투는 독일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문제는 이들이 차출됨으로 인해 서부전선 독일군에 큰 구멍이 생겼고

 이 구멍을 포착한 프랑스군이 반격을 감행하여 파리를 위협하던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마른 전투였다.

이후 서부전선은 악명높은 참호전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고,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던 독일군 부대는 양쪽 어느 쪽에도 참전하지 못하여,

전력을 낭비한 결과를 초래하고, 장기적인 전쟁 수행에 (결과론이지만) 악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러시아군의 삼소노프는 포위 섬멸이 확실해지자 권총으로 자살했다.

질린스키와 렌넨캄프는 직위 해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군적에서 군적 자체를 박탈당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하는 아돌프 히틀러 - 1933년 3월 21일 포츠담

 

 

 

히틀러와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괴링 - 1933년 1월

 

 

 

 

 

독일 베를린 Volkstrauertag을 나오는 힌덴부르크 대통령 - 1934년 1월

 

 

 

1934년 8월 2일 87세의 일기로 타계한 독일 힌덴부르크 대통령

 

 

photo from : studgenpol.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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