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차 세계대전 WW1

프랑스의 식민지군으로 유럽전선에 투입된 안남군 병사들[WW1 West Front Ypres French colonial troop Annam Soldiers]

슈트름게슈쯔 2013. 5. 16. 19:04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군으로 유럽의 서부 전선에 투입된 안남(Annam) 병사들 - 1916년 벨기에 이에페르

 

 

 

안남(安南)은 중국 당나라가 하노이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서 유래하여

현재의 베트남 북부에서 중부를 가리키는 지리적 명칭이다.

베트남의 독립과 그 후의 역대 군주에 대한 중국 측의 안남 국왕(한나라 때는 안남도통사) 책봉 등에

베트남 여러 왕조가 사용하던 지리적 명칭이었다.

역대 베트남 왕조도 중국이나 일본등에 대해서는 안남이라는 국호를 이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하에서는 인도차이나 연방을 구성하는 보호국, 즉 완조(阮朝)(이하 응우옌 왕조)지배 하의

베트남 중부지역을 안남이라고 호칭하였다.

다만 이것은 프랑스 측의 호칭이며 완조 베트남의 행정구분에 있어서의 다낭에 해당하고 있다.

응우옌 왕조는 월남(越南), 후에 대남(大南)이라고 국호를 칭하였다.

또 프랑스 식민지 당국이 통킹과 코친차이나를  포함한 월남(베트남, Vietnam)이라는

용어를 꺼려한 것도 있고, 프랑스어의 학술서 등에서는 베트남 전역을 안남이라고 호칭하는 경우도 많았다.

프랑스 지배하의 베트남, 더 정확히는 식민지가 되기 이전

츠엉키(중부 행정구)로 알려졌던 지금의 베트남 중부지방.

베트남인들은 프랑스 식민지시대를 포함해서 '안남'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

프랑스인들에게 안남으로 알려져 있는 베트남 중부 지방은 마 강과

바키엠 곶(예전에는 사이공이라 불렸던 호치민시티의 동남동쪽 76㎞ 지점) 사이에

펼쳐져 있는 고지대로서 옛 제국의 수도였던 위에가 주요 문화 중심지로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이 지방의 대부분은 한때 참 제국의 통치를 받았으나 베트남인들의

국가가 팽창하던 1471년 베트남인들이 이들을 물리치고, 메콩 강 삼각주로 느리지만 꾸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위에 시는 구엔[阮]과 친[鄭] 두 영주 가문이 베트남을 사실상 분할 통치하던

16세기에 구엔가(家)의 중심지였으며 가륭제로 알려진 구엔 안[阮映]이

1802년 베트남을 통일한 후에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1883~85년 이곳은 위에에 있던 이름뿐인 왕궁과 함께 프랑스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혼란스럽던 시기에는 베트남이 북위 16°선에서

잠정적으로 분할됨에 따라 각기 다른 점령군의 손에 넘어갔다.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후 열린 제네바 회담에서 임시분계선이

또다시 베트남 중부를 관통하는 북위 17°선으로 결정되었다.

베트남 중부의 구릉지대와 고원지대에는 다양한 산악부족들이 거주하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참어에 속한 여러 방언들을 사용하며, 나머지는 몬크메르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

좁지만 기름진 해안평야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으며 주로 벼농사를 짓는다.

최대 도시는 다낭이며 가장 훌륭한 정박지는 캄란 만이다.

겨울철에 북동계절풍이 해안과 평행으로 불기 때문에 연강수량은 약 760㎜로 적은 편이다.

 

1883년 후에 (순화)의 완조 정부는, 프랑스의 군사적 압력 아래

계미조약(제 1차 후에조약만 조약)을 체결해, 안남이 프랑스 보호령인 것을 승인 당했다.

이 조약에는 남부의 빈트안(평순)을 코친차이나 식민지에 할양해,

북부의 타인호아(청화), 게안(예안), 하틴(하정)의 3성을 통킹에 편입하고,

안남 지방은 관세, 토목을 제외하고 응우옌 왕조의 황제에 의해 통치되며,

수도 후에 에는 프랑스 대사관을 둘 것, 통킹은 보호령으로서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관리하에 둘 것 등을 규약하고 있었다.

다음 해 1884년에 맺어진 갑신조약(제2차 후에조약 파트노톨 조약)에는

프랑스의 대표인 총독이 안남국의 외교권을 총괄하고,

후에 황궁에 프랑스 수비대를 상주시키는 것 등을 추가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노골적인 침략은 베트남의 종주국이었던 청나라의 개입을 불러

청불 전쟁(1884년 - 1885년)이 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텐진조약에 의해서

청나라는 결국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베트남 국내에서는 각지에 근왕운동이 발생해, 대 프랑스 저항운동이 전개되지만,

 후에의 왕궁을 도피하여 산중에서 근왕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함의제가 1888년 프랑스군에 체포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안남은 처음에는 프랑스 외무성의 관할하에 있었지만, 1887년의 정령에 의해서

해군 식민지성의 관할하에 들어갔고, 동시에 신설된 인도차이나 총독에 의해서 총괄하게 된다.

이렇게 안남국은 인도차이나 연방을 구성하는 일원이 되지만,

후에 조정의 완조 황제 아래에서 베트남인 관리가 국내행정을 담당해,

1916년 경까지는 과거시험도 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베트남어, 프랑스어 혼성 교육기관 졸업자가 공무원에 등용되게 되게 된다.

 

 

 

안남(安南)국은 현재의 베트남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에 의한 대리전쟁격의 베트남전에 얽매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과 베트남의 국제결혼이 일반화된 형태에 따라

한국과 베트남은 사돈지간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에는 베트남의 그 옛날 국명인 안남이란 단어가 붙는 학교가 있다.

그곳은 경남 창원시 대방동에 소재해 있는 안남(安南)초등학교와 안남(安南)중학교이다.

현재 다민족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베트남 안남국과 그 옛날 삼국시대부터

문물교류가 있었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베트남인과 국제 결혼이 흔한 시대이지만 외국인과의 결혼이 흔치 않았던

 고려시대에 안남국의 백성이 고려로 건너온 기록이 있다.

고려의 고종시기에 안남국의 리왕족 이용상이 고려로 피신하여 고려국에 살았고

그 후손이 한국에 살고있음을  KBS 방송의 <역사스페셜>에서 밝힌바 있다.

하지만 실제로 고려에 귀화한 첫 안남국 왕족은 리양혼으로

그의 문중기록과 화산이씨 족보를 연구한 하노이대 역사학과의 결론이다.

화산이씨 리용상은 고종때에 귀화 하였지만 정선이씨 시조 리양혼은 그보다 150여년 이른 인종때 귀화 하였다.

 그들 족보에 따르면 리양혼은 그의 리왕조를 봉한 宋에 머물다

최후로 고려 인종때 귀화하여 고려의 경주(현 대륙 하간현)에 머물게 되어 그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이로서 여러 문헌에서 고려의 대륙존재설을 입증하고  있으며 <요사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고려의 경주는 개주로서 현 하남성 하간현이다.

또 중요한 사실중에 하나는 정선이씨의 6대후손에 무신의 난의 주인공 중에 한사람이자

고려 의종을 살해했던 이의민이 있으며  

또다른 실권자 이의방(초대 무신 권력자)은 고려사와 반역열전에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실록과 용비어천가에는 고려의 무신 이의방이 이성계의 6代祖이기 때문에 이를 숨기고 있다,

이성계는 고려시대 자기 선조의 폐해와 치부는 은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의민을 천민 출신이라 한것은 이의민에 대한 정보를

후대 문신 사가들이 방기한 것으로 본다.

 

 

 

 

 

photo from : weaponsandwarfa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