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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의 난 - 북청사변[The Boxer Rebellion 1900]

슈트름게슈쯔 2013. 7. 6. 19:04

 

 

 

중국 청나라의 서태후(西太后 )-1901년

 

 

서태후는 광서제 대신 단친왕(端親王) 재의의 아들 부준(溥儁)을

즉위시키려 했으나 서양 열강은 광서제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각국 공사들은 광서제를 진찰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광서제를 진찰한 프랑스 의사는

 "황제의 맥박이 정상이며,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발표하여 서태후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열강의 공사들은 부준의 대아가(大阿哥; 황태자) 책봉에도 축하하러 오지 않았다.

서태후와 단친왕은 본래 반청 단체였던 의화단을 구슬려

열강 8국(러시아,일본,영국,프랑스,미국,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과 대항하도록 하였다.

의화단에 의해 각국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원명원은 불에 탔으며,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시안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 과정에서 서태후는 진비를 우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서태후와 광서제는 평복 차림으로 피난을 갔고 먹을 것과 물을 찾지 못해 이틀이나 굶기도 했다.[

피난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서태후는 북경에 남아있던 경친왕 혁광 등에게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열강의 어떤도 받아들이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1901년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이 1901년 체결되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오만하고 보수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

연회를 열고 공사 부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한편 그때까지 했던 것 이상으로 사치를 일삼았다.

북경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감금 상태에 있었던 광서제가 1908년 사망하자

서태후는 광서제의 이복동생 재풍의 아들 부의를 황제로 정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처럼 여인이 정사에 관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조를 남기고 이튿날인 11월 15일 죽었다.

서태후의 장례는 120만 냥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성대하게 치러졌고

수천 명의 사람이 장례에 동원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신해혁명에  의해 1912년 2월 12일 종말을 고했다.

 

 

 

창을 든 중국 청나라 의화단 병사 - 1900년

 

 

 

장검과 창으로 무장한 청나라 의화단 병사들

 

 

 

북청사변 당시 중국 의화단과 맞선 프랑스 군대의 바리케이트 - 1900년

 

 

 

북청사변 당시 베이징의  일본군 바리케이트 - 1900sus

 

 

 

열강군대의 포격에 의해 대파된 베이징의 성곽

 

 

 

열강의 군대에 포로가 된 의화단

 

 

 

형틀에 가두어진 의화단

 

 

 

잡혀서 처형되는 의화단

 

 

 

텐진으로 피난을 떠나는 의화단

 

 

 

북청사변 당시의 미국군 장교

 

 

 

 

중국 의화단 병사들의 목을 효수시킨 일본군

 

 

 

의화단 병사를 효수하는 독일군

 

 

 

청나라 궁궐로 입성하는 독일군 - 1901년

 

 

 

베이징 궁궐 내에 모인 외국 군대들 - 1900년

 

 

 

효수되는 의화단

 

 

 

열강의 군대가 보는 가운데 의화단 병사를 효수시키는 청나라 병사

 

 

 

중국 의화단의 난은 1900년 초 외세에 대한 중국인들의 해묵은 감정이

반기독교운동으로 전개되면서 화북지방에서 일어났던 난(亂)으로 다른말로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알려져 있다.

의화단의 난이 궁극적으로 발생하게 된 주요 원인(遠因)은 1898년 황하의 범람으로 비롯되었던 산뚱 지역의 기근이었다.

굶주린 중국의 농민들이 의화단 운동에 참가해 청조를 겨냥했지만,

중국 관리들의 노련한 공작으로 의화단의 분노는 청조에서 외국인들을 향하게 되었다.

의화단의 기원은 영국이 청나라에 아편을 수출하고 백성들 일부를 마약중독자로 만들고 국부인 은을 대량 유출해가는

형태를 못마땅하게 여긴  린쩌쉬가 중국인들을 보호하려고 한 전쟁이었던 

 아편 전쟁 이후 자발적으로 반기독교운동을 벌이던 백련교의 일파인 의화권(義和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권법(拳法)만 익히면 탄환이나 도검(刀劍)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신흥종교 집단이었다.

의화권은 청일전쟁 이후 열강의 침략이 격화되면서 일반 민중들 사이에 급속히 확대되어

 1898년에는 그 명칭을 의화단으로 바꾸고 투쟁 이념도 종래의 ‘반청복명(反淸復明’에서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바꾸어 본격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00년 의화단은 산동성에서 봉기하여 외국 선교사와 기독교 신자들을 공격하였다.

그 의화단의 단원 수는 20만명에 이르렀다.

청국 정부는 의화단에 대한 생각을 통일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열강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서태후(西太后)는

꽝쉬제(光緖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월 21일 열강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각국 공사관을 포위 공격하도록 하였다.

바로 그날 북경 외교단을 청군과 의화단이 포위해 버렸다.

이 포위 기간에 베이징에서 66명, 수도 밖의 중국 북부지역에서 약 250명의 외국인이 살해되었다.

그러했던 의화단의 경천위지는 55일 천하에 불과했다.

20세기 초 중국을 침략했던 세계 열강이었던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8개국 연합군 1만6천여명은 55일만에 그들 국가의 공사관 구역을 해방시켰다.

이에 따라 중국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죄와 관련자들의 처벌은 물론 4억5천만량의 배상금 지불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의화단 의정서’가

리훙장과 연합군 정권대표들 사이에 체결되었다.

러시아는 의화단 사태의 와중에서 만주의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18만명의 병력으로 만주전역을 사실상 점령해 버렸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내 보수파 세력이 몰락하고 혁신세력이 등장하게된다.

 그러했던 사회적 분위기는 11년뒤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키는 원으로 작용하게 된다.

중국의 의화단 사건은 당시 한반도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국내 친중국 반기독교 세력은 도처에서

선교사와 기독교인을 해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염려한 고종은 자신이 의화단의 반(反)기독교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조선의 고종은 그런 조치의 하나로 의화단과 싸우고 있는 서양 연합군에게 보급품을 보내주었다.

의화단 사건은 조선 신문들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이미 포기하기는 했지만 중국에 대해 갖고 있던 조선 지식인들의

마지막 실낱같은 기대마저 포기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신문들은 중국의 혼란이 조선에까지 전염될 걸 우려하면서 국경을 철통같이 방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photo from : kingsacadem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