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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시 공화파 여성과 반란군 여성[Spain Civil War Republican Woman Combatants & revolution Woman Combatants]

슈트름게슈쯔 2013. 7. 23. 13:41

 

 

스페인 내전 당시 정부군이 소련에게 지원 받은 T-26 전차속의 공화파 병사

 

 

 

바르셀로나 거리에 붙여진 여성 자원 전투원 모집 벽보 -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바르셀로나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시민군 - 1936년 8월 28일

 

 

 

바르셀로나 근처에 포진된 대포위에서 소총을 든 여성

 

 

 

바르셀로나 호텔 옥상의 17세 공산주의자 전투원 마리나 지네스타(Marina Ginesta)

 

스페인 내전 당시였던 1937년 스페인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은

공화파간에도 여러 파벌들의 또 다른 충돌로 유혈사태의 대립이 벌어졌다.

그러했던 상황은 미래의 비젼이 불확실했던 스페인의 정치와도 같은 형태였다.  

 





 

 

마드리드 카사블랑카 빌딩의 폭발 - 1938년 3월 19일

 

폭발의 원인은 공화파의 충성파 세력이 6개월동안 터널속에 600야드에 걸쳐 설치한 지뢰에 의한 대폭발이었다.

이 폭발로 프랑코 반군세력 300명이 사망하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의 스패니쉬 새끼 포인터를 안고 있는 프랑코측 반란군 병사와 뒤로 보이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 1937년

 

 

 

스페인 프랑코측의 반란을 반대하며 미국의 종군 기자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 1937년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경험했던것을 토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썼다.

 

 



 

 

 

스페인 내전은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반란군 사이에 있었던 내전이었다.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고,

1939년 4월 1일에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프랑코 반군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 전지역이 황폐화되었다.

반파시즘 진영인 인민전선을  소련과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인 국제 여단이 지원하고,

프랑코파를 파시스트 진영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 그리고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지원하여 제 2차 세계대전 전초전 양상을 띠었다.

아울러 스페인의 가톨릭교회 왕당파는 프랑코파를 지원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화국 정부에 군수 물자를 지원하였으나

국제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이유로 스페인 정부에 대한 지원에 미온적이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지만, 공화군 측에는 비행기를 팔았다.

그리고 프랑코 반군세력 측에도 가솔린 연료를 팔았다.

 

 

 

 

 

 

스페인 내전 당시 아나키스트 시민군  - 1936년 7월  

 

 

공화파 정부는 쿠데타의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으나 이를 사전에 차단하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초동 진압에 실패함으로써 반란군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반란 초기 반란군에 맞서 싸운 것은 공화파 정부를 지지하는 시민들이었다.

마드리드는 많은 시민의 희생 끝에 반란군에게 몬타나 요새를 점령당하였으나 마드리드를 지킬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아나키스트 시민군이 조직되어 반란군과 결전을 치러 승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군은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진군한 요피스를 체포하여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코군이 아라곤과 카탈리나 전역을 점령하게 되자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고립되었고

이로 인해 내부마저 혼란을 겪게 되었다.

내전 초 공화파는 발렌시아와 스페인 동부 대부분을 지켜내고 있었다.

스페인 동부 중에서 프랑코파의 수중으로 넘어간 곳은 아스투리아스지역과

칸타브리아 지역과 바스크지역의 일부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코파의 점령지역은 확대되어 갔으며

결국 안달루시아 지방과 수도 세비야까지 함락되었다.

공화파 정부의 대응에 대해 노엄 촘스키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스페인 공화국의 정부는 마비상태였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무장하여 시민군으로서 반란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는 군사 반란만큼이나 무장한 노동자 군대를 두렵게 느꼈기 때문에

 반란군의 손에 희생당하는 그들을 방관하였다.

항구에는 정부의 군함이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 결과 반란군은 스페인 전역을 점령하였고 결과적으로 정부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 정부측 충성파 여성 전투원들의 1936년 의류 패션

 

 

 

권총 사격 훈련을 받는 공화파 자원 여성

 

 

 

간단한 점심식사로 빵을 쨈에 찍어 먹는 공화파 자원 전투 여성들 - 1936년 8월

 

 

 

 

정부군으로 부터 사격 훈련을 받는 스페인 공화파 자원 여성들 - 1937년 6월 2일

 

 

  

 

 

바리케이트를 치고 반군 세력과 대치한 공화파 지지 전투 자원 여성들

 

 

 

스페인 정부를 위해 싸우는 공화파의 여성 스나이퍼 - 1936년

 

 

 

마드리드를 떠나는 공화파 여성 - 1937년 2월 27일

 

 

 

공화파는 스페인 내전을 폭정이냐 민주주의냐를 놓고 벌인 싸움으로 보았다.

반면 프랑코파는 자신들의 반란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등 빨갱이들로부터

재산권을 보호하고 사회 안정을 회복하며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여

무정부상태의 무법천지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내전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어느 쪽이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코파측에 가담한 세력으로는 카르리즘, 정통주의와 같은 왕당파,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및  보수주의자와 왕정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 같은 세력들이 있었다.

한편, 공화파는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바스크와 카탈루냐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와 같은 세력들이 결집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정치는 좌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파는 다양한 성향의 세력들로 나뉘어 있었다.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당자당은 코민테른에 대표자를 파견하고 있었고

소련은 이를 이용하여 스페인의 정치에 개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코민테른 5차 대회 및

 7차 대회의 참석을 거부하는 등 소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후 소련의 코민테른 강령에 따른 스페인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한편 우파의 대표적인 정치 세력은 16개 우익 정당의 연합체인 팔랑헤가 1931년 결성되었다.

이들은 모든 분야에서 격렬히 대립하였다. 제2공화국 정부의 개혁 법률들은 우익을 결집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프랑코파측을 지지한 사람들은 가톨릭 성직자, 지주, 기업가, 그리고

 파시스트 군대에 병력을 제공한 바스크 지역 외곽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 등이었다.

반면에 제 2공화국 정부의 지지자들은 대도시 노동자, 소작농, 고학력 중산층들이었다.

특히 공화국 정부는 자산이 없는 서민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공화파는 소련,멕시코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구성된 국제여단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았다.

공화파의 중심 세력은 노동자, 소작농, 도시 서민 등이었으나, 공산주의나 아나키즘 혁명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아스투리아스지역과 카룰루냐 지역의 일부 자본가들 역시 공화파를 지원하였다.

정부군 측은 스스로를 충성파,인민전선 ,공화파,정부파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적인 프랑코 반란군은 이들 모두를 빨갱이라 지칭하였다.

한편, 로마 가톨릭이 강세인 바스크 지역과 카탈루냐 지역 보다 급진적인 좌파가 우세하였던

갈리시아 지역은 마드리드의  중앙 정부에서 분리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들의 분리 독립 청원은 중앙 정부에 의해 기각되었다.

이러한 모든 세력들이 연합하여 인민 공화군을 구성하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의 프랑코 지지파 반란군 세력의 여성

 

 

 

 

 

 

스페인 내전에 승리를 거둔 프랑코 지지파 반란군 세력

 

 

 

프랑코파 세력은 스페인의 제2공화국 정부에 의해 반란군,역적,파시스트 등으로 불렸다.

반군 세력은 권력의 중앙집중과 반공주의를 공통 분모로 하는 여러 세력의 연합이었다.

이들은 왕당파, 지주, 유산가, 보수주의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여러 운동 세력에 의해 스페인이 분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정부의 반 교권주의로 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프랑코파 측을 지지하였다.

당시 스페인 내에서는 급진적인 공화파에 의해 교회 파괴와 반 기독교 운동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교회 공격에서 종종 성직자가 살해되는 일도 벌어졌다.

프랑코파 측은 이들의 만행이 극에 달해 전쟁 전에 이미 7,000여 명 이상의 성직자가 학살당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반란군은 당초부터 프랑코가 전권을 쥐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코와 대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몰라의 사고사 (1937년 6월) 등이 겹쳐 권력의 집중이 진행되어,

 팔랑헤 당 (창시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후작은 인민전선 측에 붙잡혀 사형당함)과

다른 정당을 통합, 개편하고 그 당수로 프랑코가 취임, 다른 정당 활동을 엄금하고 군사독재 체제를 굳혔다.

 

 

이 외에 스페인 내전 당시 다른 세력으로 카탈루냐 민족주의와 바스크족 민족주의 세력이 있었다.

 두 세력은 스페인에서 각각 분리 독립하기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제2공화국 정부를 지지하였는데,

이는 프랑코파측이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반교권주의적인 성향도 지니고 있었으며

카탈루냐 지역에서 일어난 성직자 살해와 같은 일들은 상당수가 이들의 소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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